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91화 (91/248)

91. 에할름의 충고

“혼자서 8명의 선제후와 맞먹을 정도의 힘을 가진 사람이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내전은 3백 년 전의 일 아니었습니까? 그렇다면 최근까지도 생존해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인간이 맞기는 합니까?”

“믿기 어렵다고 있었던 일이 없는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윌리엄 경. 통치자는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과연 인간인지는 저 역시 의문입니다. 인간답지 않은 수명도 그렇지만 그 긴 세월 동안 젊음을 유지했다고 하니 어쩌면 인간이 아닐 수도 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인간의 일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가 3백 년 전의 내전에 관여했던 것도 그가 머무르던 도시가 전화에 휩쓸리자 참지 못하고 나온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할름은 억제기가 터진 듯했다,

그는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자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의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사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솔직한 내 느낌을 그에게 전했다.

“인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적이기는 했군요.”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비밀로 하라고 요구했던 것이겠지요. 그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유로운 생활을 원했다고 합니다.”

에할름이 직접 그를 만나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황궁에 있으면서 간접적으로 그에 대한 정보는 많이 접한 모양이다.

그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에 대해 아는 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황궁에서 정보를 다루는 관리들 몇과 선제후와 그들의 직계 뿐입니다. 그가 자신의 존재를 비밀로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알아야 할 사람들에게만 진실을 알린 것이지요. 사람들 앞에 나서서 활동한 것은 3백 년 전의 내전 시기와 1백 년 전의 황제세습을 시도했던 때, 단 두 번뿐입니다. 세월의 흐름은 그의 정체를 묻어버리기에 좋은 수단이었던 것이지요. 듣기로는 황제 선출에 문제가 생기면 선제후들에게 직접 압력을 넣기도 했다고 합니다. 선제후들 중에는 그의 압력을 거부했다가 그대로 사라진 경우도 있습니다. 기록에서야 급환으로 죽었다거나 건강을 해쳐서 은퇴를 했다는 식으로 서술해 놓았지만, 당시 상황을 보면 제거당한 것이 분명한 경우가 몇 번 있습니다.”

신기한 이야기였다.

마치 인간들 사이에서 거니는 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감정과 인간성을 가지고 인간과 교류를 즐겼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 중 하나가 이곳에 존재했다면 저런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에할름 역시 평범한 황궁 도서관의 관리는 아니었다.

역사학자라는 가면 뒤에 숨은 진짜 얼굴은 정보를 다루는 기관의 실무자 정도는 되었던 모양이다.

운이 좋았다.

그가 평범한 역사학자였다면 내 의문은 오랫동안 해답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 20년 전입니다. 그 이후로는 그를 본 자가 없습니다. 언제나처럼 여행을 떠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고 합니다. 사고사를 생각하기에는 너무 강한 존재였으니 스스로 모습을 숨겼거나 아니면 수명을 다해 죽었으리라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습니다. 어쩌면 인간에 대한 흥미를 잃고 떠났는지도 모르지요.”

“에할름 경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그는 죽었을 겁니다.”

“단정하시는군요.”

“살아있었다면 아무리 인간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고 해도 이렇게 개판 된 세상을 그냥 내버려 두었을 리가 없으니까요.”

에할름은 분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다 타버려서 재만 남은 곳에서 갑자기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무엇인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다 잊기로 하고 세상을 살다가 상처가 아문 흔적을 건드릴 때 반응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에할름도 자신의 그런 모습을 깨달았는지 크게 한숨을 쉬더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는 다시 은거한 역사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설사 죽지 않았더라도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일 겁니다. 그처럼 인간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던 존재가 아무 소식 없이 20년을 넘겼습니다.”

“20년. 인간에게는 긴 시간이군요.”

“그렇습니다. 교훈을 망각하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충분하지 않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에게 심하게 당한 경험이 있는 선제후 가문에게 20년은 너무 짧은 기간일 터였다.

어쩌면 가주가 죽고 그 과정에서 가문의 구성원들도 많이 상하는 일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함부로 나대기에는 뼈아프게 당한 기억이 머뭇거리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제후들이라고 다 같은 경험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을 억제하는 족쇄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움직인 자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20년이 지난 지금 신중한 자도 그렇지 않은 자도 모두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진짜 그가 죽은 것 같은데?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3백년간 이어온 전통의 힘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가진다.

족쇄가 풀렸다고 해서 무턱대고 날뛸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납득을 하지 않을 테니까.

진실을 아는 사람의 숫자는 한 줌이지만, 전통에서 나오는 권위에 고개를 숙이는 자는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다.

그래서 다들 황제를 뽑는 선제후들의 선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심지어 사정을 모르던 칼마르 백작가 같은 경우는 그 현명했던 선대 백작조차 5년 정도면 혼란이 수습될 것이라고 예측했을 정도다.

그런 사람이 하나 가득이다.

다들 설마설마하면서 황제의 선출을 기다리는 것이다.

배후에서 돌아가는 사정을 알게 된 나는 칼마르가 정말 곤란해졌음을 깨달았다.

만약 황제 선출을 위해 모인다는 이번 집회에서 결론이 나지 않으면 칼마르의 독립을 위해서 어떤 준비를 해야할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판이다.

그렇지 않으면 살진 돼지를 보는 시선으로 칼마르를 노려보는 선제후들의 마수에 언제 칼마르가 갈기갈기 찢겨져 나갈지 모른다.

지금까지 잘 헤쳐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튜토리얼이었던 것이다.

“앞으로 선제후들 간의 관계가 복잡해지겠군요. 적과 아군의 구별이 불가능한 시대가 오겠습니다.”

“윌리엄 경의 말이 맞습니다. 난세가 시작될 겁니다. 3백년 전의 난세와 비슷한 시대가 올 겁니다.”

“칼마르가 살아 남을 수 있을까요? 저는 그 시대가 어땠는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올보르그 지역에서의 경험으로 미루어 생각한다면 생존이 곧 미덕이고 유일한 기준이 되는 시절이 될 모양인데.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답답해하는 나를 보던 에할름은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풀었다.

그리고 목걸이의 펜던트를 분리한 후 내게 내밀었다.

나뭇잎 모양의 금속 펜던트였다.

“받으십시오.”

거부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에 나는 일단 목걸이의 펜던트를 받았다.

속이 빈 것처럼 가벼운 금속재질의 팬던트였다.

“황궁 도서관에 가서 그곳의 사서에게 그 것을 내주면 됩니다. 그러면 황궁 도서관의 사서가 알아서 할 겁니다.”

“알아서 한다는 것이······”

“가서 내주면 알게 될 겁니다. 너무 늦지는 않게 가도록 하십시오. 황궁 도서관이 불에 타버린 후라면 의미가 없게 될 테니까.”

무서운 이야기다.

아무리 내전 중이라도 황궁 도서관이 불에 탈 정도면 갈 데까지 가버렸다는 뜻이다.

황궁의 정보 기관에서는 내전의 결과가 아주 참혹하리라고 예상하는 모양이다.

말을 잇지 못하는 내게 에할름은 한 가지 충고를 남겼다.

“선제후들의 세력은 강대합니다. 그러나 제국에서 힘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선제후만이 아닙니다. 선제후와 손을 잡기도 하고 적대하기도 하는 여러 단체와 비밀 결사가 있습니다.”

에할름은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윌리엄 경은 암살 시도를 겪었지요?”

“예.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크후라는 단체라고 파악은 했습니다.”

“아크후 같은 비밀 결사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큰 세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힘을 가지거나 특정 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가진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아크후는 대의명분과 암살을 동시에 내건 단체입니다. 그들의 욕망은 이해하기 쉽지요.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상식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비밀 결사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기 위해 위험한 실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상한 종교를 섬기며 민폐를 끼치는 자들도 있습니다.”

에할름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더 이상 은거한 역사학자의 것이 아니었다.

정보 기관의 관리가 보일 법한 눈빛이었다.

“평상시라면 그런 비밀 결사는 모기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웽웽거리며 신경 쓰이게 하고 가끔 상처도 내지만 생명에 위협을 끼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적당히 관리하고 도를 넘는 자들은 쳐내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난세가 되면 위험한 존재가 됩니다. 난세의 귀족들은 이용할 수 있다면 뭐든지 이용하려고 하고 비밀 결사는 괜찮은 팻감으로 쓸 수 있으니까요. 윌리엄 경. 경은 양지에서는 선제후와 다투겠지만 음지에서는 비밀 결사와 다투게 될 겁니다. 어느 쪽이든지 경시하지 마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에할름은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칼마르로 돌아갔다.

*

단지 몇 달 떠나있었을 뿐인데도 칼마르 시의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시의 경계도 늘어났고, 사람도 늘어난 것이 확실했다.

심지어 항구의 배조차 숫자가 늘었다.

난민을 정착시키기 위한 건설 사업이 계속 진행되었고, 상업 도시끼리의 해상 교역망이 완전히 복구되면서 호황이 닥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시적인 호황일 것이라고 예상되지만 그래도 호황은 호황이다.

돈이 여유있게 풀리고 사람들의 표정도 밝았다.

그러나 리네아 백작을 비롯한 백작가의 가신들은 호황을 즐길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황도에서 전령이 왔기 때문이다.

황제 선출을 위한 투표가 조만간 있을 예정이고, 8명의 선제후가 모두 황도에 집결한다는 소식이었다.

칼마르 백작가도 자유 도시의 대표들 중 하나로 참가하라는 전언이었다.

누가 갈 것인지는 정해져 있다.

도시의 대표자가 가야 한다.

칼마르 시의 경우는 리네아 백작이다.

돌아가는 상황이 불안하다고 다른 사람, 이를테면 시장이나 시의회의 의장 또는 다른 귀족이 대리로 참석하는 것은 안된다.

오직 도시의 진정한 대표자 또는 지배자만이 참가할 수 있다.

선제후가 총출동하는 상황이니까 이해는 가는데 문제는 리네아 백작이 아직 정식으로 칼마르의 백작으로 인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리네아 백작은 아직 미혼이고, 귀족법에 따르면 결혼을 해야 정식 백작으로 인정된다.

유예기간도 이미 지났기 때문에 다른 방법은 없다.

물론 칼마르의 백작이 리네아 말고 누가 있겠느냐만 이번에 진행되는 황제 투표 의식은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 부분이 너무 많다.

누군가가 트집을 잡는 상황은 피하고 싶다는 것이 가신들의 결정이었다.

“그러니까 먼저 혼인 신고부터 하시지요.”

“사라! 결혼식은?”

“결혼식을 준비하려면 몇 개월은 필요합니다. 시간이 없어요. 백작님.”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알리러 리네아 백작을 방문했을 때 리네아는 결혼식보다 혼인 신고를 먼저해야 한다는 말을 사라 남작 부인으로부터 듣는 중이었다.

리네아는 결혼식보다 혼인 신고를 먼저 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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