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세력이 아니라 개인
“죽어라. 더러운 귀족 놈.”
내 웃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지팡이총을 든 암살자는 증오를 드러내며 지껄였다.
여전히 지팡이의 끝은 나를 겨눈 채였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장병기를 들고 나를 견제하는 모양새겠지만 저게 뭔지 아는 나로서는 가증스럽기만 했다.
모르면 그냥 당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바로 눈앞에서 총알이 튀어나오면 아무리 기사라고 해도 피할 수 없다.
이 세상에는 총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 같다.
화약은 있는 모양이지만 총 비슷한 것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암살단이 지팡이총을 쓴다니!
물론 제대로 된 물건은 아니다.
총의 기본도 못 갖춘 물건이니까.
모르면 위협적이겠지만,
알면 별것 아니다.
짧은 심지에 붙은 불은 순식간에 지팡이총 안으로 사라졌다.
탕!
익숙한 소리와 함께 연기가 확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총소리가 나기 전, 이미 나는 지팡이총의 끝이 가리키는 사선을 피해 지그재그로 뛰면서 암살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단 두 번 상체를 흔들며 뛰었음에도 지팡이총은 내 움직임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했다.
지팡이총에서 나온 탄환이 어이없게 바닥을 쳤고 나는 암살자의 턱을 올려 쳤다.
깔끔하게 들어간 어퍼컷에 암살자는 단숨에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오줌 냄새를 닮은 화약 냄새가 뒤늦게 방안을 채웠다.
내가 지팡이총을 든 암살자를 쓰러뜨릴 때 내 호위 역시 가장 처음에 들어왔던 암살자의 팔을 날려버리면서 아크후의 암살 시도를 끝냈다.
둘을 죽이고 둘은 중상, 하나는 기절이었다.
여기까지 나를 노리고 아크후의 암살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아크후에서 내 일거수일투족을 따라 다니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배에서는 별 일이 없었으니 내 일정을 관리했던 순스발의 시청 어딘가에 구멍이 뚫려 있다고 봐야 했다.
암살 시도는 실력으로 막아냈지만 너무 안일했다.
바위도 빗방울에 구멍이 뚫리는 법인데, 계속 공격을 당하다가 뭐든 한가지라도 치명적인 실수를 하면 끝장이다.
*
역사학자인 에할름은 순스발의 시청에 가 있었다.
남작이신 윌리엄 경께서 보내주신 초대장을 가지고 말이다.
맙소사.
그 초대장을 본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헬문트가 기사들을 데리고 뛰어나가려고 할 때 내가 보낸 전령이 도착했다고 한다.
당연히 대혼란이 벌어졌다.
기사들은 미친 듯이 에할름의 농장집으로 달려갔고, 아직 대기 중이던 용병도 전투 대기 태세로 바뀌어서 당장이라도 전투를 벌일 것 같은 분위기였다고 한다.
칼마르 백작님의 부군 되실 분이 습격을 받으셨다니 헬문트의 눈 앞이 노래진 것은 당연지사 일지도 모르겠다.
대충 상황이 파악된 후에 몇 사람의 목이 달아나고(진짜 목이 달아났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 몇 사람은 징계를 받았다.
암살자들은 해적을 다루던 선원들이 달라붙어서 탈탈 털어댔지만 따로 건진 것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역사 학자인 에할름과 면담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만났던 가짜 에할름과 달리 진짜 나이많은 노인이었다.
“내 집이 엉망이 되었더군.”
“시청에서 보상이 있을 예정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선생님.”
“그렇다면 다행이고.”
에할름의 툴툴거리는 말에 헬문트가 슬쩍 끼어들었다.
헬문트는 내가 에할름을 방문하는 일정이 시청에서 새어 나갔다는 것을 알게 된후 마치 입 안의 혀처럼 구는 중이었다.
칼마르에서 책임을 묻는 편지라도 오면 당장 실각이니까 내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지금도 자신의 집이 망가졌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에할름의 기분을 달래주면서 나와의 대화가 무난하게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중이었다.
나는 헬문트에 대해 딱히 불만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헬문트는 연합 함대를 잘 통솔했고, 다른 도시와의 조율도 무난하게 해냈다.
무엇보다 우리는 승리를 했다.
헬문트는 승리한 장군인 것이다.
그런 사람을 사소한 잘못으로 날릴 수는 없지 않을까?
아무리 내가 순스발에서 암살단의 습격을 받았더라도 그게 헬문트의 책임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헬문트를 순스발의 시장으로 대접해 줌으로서 그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적어도 당분간 헬문트의 반대파가 나를 명분으로 고개를 들 일은 없을 것이다.
에할름은 한 도시의 시장이 바싹 엎드린 채 저자세로 기는 것을 보면서도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명목상의 기사 작위를 받았다지만 딱히 이름이 있는 자도 아니고, 중앙에 인맥이 있다는 소리도 못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기는 분위기는 고위 귀족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중앙 관료 조직에서도 변방인 황궁 도서관에 있었다지만 그래도 황궁 출신은 황궁 출신이라고 해야 할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할름은 적당히 헬문트를 괴롭힌 후에야 비로소 내게 시선을 돌렸다.
“윌리엄 남작께서 암살자들을 모두 제압했다니 듣던대로 무용이 대단하신 모양입니다. 칼마르에게 큰 행운입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암살자들의 실력이 별로 였습니다. 한 명이 이상한 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놀라기는 했지만 정면 대결을 하는 암살자란 일개 병사만도 못한 법이지요.”
“이상한 무기라고요?”
나는 그의 의문에 지팡이총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에할름은 황궁 도서관에서 근무했던 사람답게 지팡이총의 정체를 금방 알아 보았다.
“그것은 화창이라는 것입니다. 화약이라고 놀이에 쓰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이용해서 쇳조각이나 돌조각을 날리는 무기입니다.”
“제가 본 것만 놓고 평가한다면 활이나 쇠뇌와 비교해서 더 낫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오히려 불편하고 문제가 많아 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맞게 보셨습니다. 날아가는 힘은 강해서 갑옷도 뚫을 정도라고 하는데 그것도 일률적이지가 않습니다. 게다가 열걸음만 떨어져도 조준한 것을 맞추기가 불가능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어떤 이는 아예 갑옷에 갖다대고 쏘는 것이 더 나은 쓰레기라고 욕을 했답니다.”
근래에, 적어도 에할름이 황궁에 있을 때 누군가가 화약의 무기화를 놓고 연구한 적이 있다.
에할름이 저렇게 편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실험은 결국 실패로 돌아간 모양이지만 그래도 화약의 무기화를 시도한 자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런 무기를 일개 암살단이 사용했다는 것도 놀랍고.
혹시 아크후가 생각보다 더 규모가 있는 조직이었나?
그럼 곤란한데.
“어느 분이 하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쓰레기라는 평가가 맞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쉽게 암살자를 쓰러뜨릴 수 있었습니다만 암살단이 왜 저런 이상한 무기를 들고 나왔는지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뭔가 근사한 계획이 있었겠지요. 그런데 막상 현장에 가서 보면 근사한 계획은 똥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황궁에 있을 때 그런 꼴을 너무 자주 봐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저는 알 것 같습니다.”
껄껄 대며 웃는 에할름은 나에게 황궁에서 있었던 ‘그런 꼴’을 예로 들어주며 그 때를 회상했다.
분위기가 좋을 때 슬쩍 질문을 던졌다.
“에할름 경이 역사학자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언어와 역사, 지리, 신학이 제 전공입니다.”
“사실 역사에 밝은 분께 물어볼 것이 있어서 에할름 경을 찾아갔던 겁니다.”
“물어보십시오. 내게 용무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역사 쪽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역사같이 케케묵은 학문에 관심이 있다니 윌리엄 경은 듣던 것과 많이 다르군요.”
“다른 분들은 역사에 대해 흥미가 없나 보지요?”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대개는 지리에 관해 물어보지요. 각 지역의 물산, 기후, 인구, 지형. 그런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좀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알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3백 년 전에 말입니다.”
3백 년 전이라는 말을 듣자 에할름의 눈빛이 달라졌다.
여전히 웃는 얼굴에 밝은 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눈빛은 서늘해진 것이 그의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건드린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질문을 이어 나갔다.
“지금 선제후가 된 8명의 대귀족을 중재해서 선거 제도를 정착시킨 세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군요. 그런 세력이 있다면 지금도 8명의 선제후를 쥐고 흔들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직접 황제가 되거나 자기들도 선제후를 배출하겠다고 했을텐데 그런 일이 없지 않습니까?”
에할름은 웃긴 이야기를 듣는다는 식이었지만 그대로 믿어주기에는 그의 눈빛이 거슬렸다.
게다가 지슬리 공작이 헛소리를 할 사람도 아니고.
“그렇기는 합니다. 그러나 선제후로 있는 지슬리 공작이 한 말이니 무슨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에할름 경의 조언을 받고 싶었던 거지요.”
“선제후 지슬리 공작이라고요?”
“예.”
“그자가?”
에할름은 내 말을 듣고도 잠시 망설였다.
선제후 지슬리 공작의 이름이 언급된 후로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망설이는 것은 여전했다.
“칼마르는 공위 중인 황제가 어서 선출되어 현재의 혼란이 가라앉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제후들 중 몇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더군요. 제국에서 떨어져 나가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겠다는 계획이 아니라면 저렇게 움직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무리한 짓을 벌이고 있습니다. 에할름 경이 무엇인가 알고 있다면 칼마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충고 한 마디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에할름의 태도만 봐도 이 모든 사태의 배경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모양이다.
경험상 정보가 느리면 입찰은 반드시 실패한다.
실패로 끝나면 다행이지.
폭탄을 끌어안거나 쓰레기를 뒤집어 쓰는 경우도 생긴다.
살아남으려면 남보다 더 많이 알아야 한다.
결국 나는 칼마르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들이대며 감성팔이까지 했다.
에할름에게서 정치가나 관료 특유의 소시오패스적인 면모가 안 보여서 혹시나 하고 질러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통했다.
“그렇지. 알아야 대비를 하긴 하겠지. 윌리엄 남작. 나는 말입니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그래서 순스발에 은거한 것이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곳은 그나마 안전할 것 같으니까. 남작. 재미있는 사실 하나 알려드릴까요. 3백년 전의 그 지독한 내전에서도 순스발은 전화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이곳은 지형상 배를 통하지 않고는 외부에서 대규모 병력이 쳐 들어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난 이곳을 은거지로 선택한 겁니다.”
“그렇다면 에할름 경은 내전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겁니까? 새로운 황제가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모릅니다.”
아니, 이 사람 왜 이렇게 말을 왔다갔다하지?
늙어서 노망이 났나!
“그러나 한가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8명의 선제후가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황제를 선출하도록 압력을 가하던 자는 이제 없습니다. 선제후들이 황제를 선출하는 것도,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것도 이제는 자유입니다.”
“그러면 그런 말도 안되는 세력이 실제로 있었다는 겁니까? 8명의 선제후가 어쩔 수 없이 투표로 황제를 뽑도록 강요한 세력이?”
나는 상식을 벗어나는 에할름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선제후 하나하나의 세력은 정말 강력하다.
칼마르 백작이 1만의 병력을 모았다지만 그것은 우리의 세력권을 지키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진지하게 선제후의 세력과 붙는다면 1개도 감당하기 어렵다.
그런데 8명의 선제후에게 다 영향력을 끼친다고?
도대체 기사와 병사가 몇 명이나 있어야 가능한 일일까?
내 부정에 가까운 질문에 에할름은 내 오해를 바로잡아주었다.
“세력이 아닙니다. 개인입니다.”
잠깐 두뇌가 작동을 멈췄다.
나는 내가 들은 말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에할름은 단호하게 내 의심을 깨버렸다.
“나는 압력을 가하던 자라고 했습니다. 세력이 아니라. 그가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인 것은 분명합니다.”
뭐야?
세상의 균형조절자인 드래곤이라도 있는거야 뭐야?
내가 알고 있는 상식 하나가 무너졌다.
이 세상에는 1인 군단이라고 할 만한 존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