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89화 (89/248)

89. 암살 시도는 세금 같은 것

선제후 지슬리 공작은 나와의 만남을 끝으로 세라빅을 떠났다.

게스티 백작의 숙청이 마무리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컷허드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뜻이다.

컷허드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라도 높으신 분은 얼른 사라져주는 것이 맞기는 하다.

그러나 나는 한 번쯤 더 지슬리 공작과 대화를 나눴으면 했다.

그의 마지막 말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슬리 공작의 말대로라면 3백 년 전의 내전 당시 8명의 선제후 못지않은 세력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서로 황제가 되겠다고 내전까지 벌이던 8명의 대귀족을 설득과 압박을 통해 낯선 제도를 받아 들이게 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이 말이다.

내 상식으로는 말이 안 된다.

최근 1년간 칼마르의 군사 행동에 모조리 관여하다 보니까 군사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 비슷한 포지션이 되어버렸는데, 그 짧은 경험만으로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군대란 돈과 인재를 잡아먹는 괴물이라는 점이다.

칼마르 같이 손에 꼽아 주는 상업 도시조차 그동안 쌓아온 부를 퍼붓고 나서야 간신히 만 단위의 병력을 뽑아냈다.

그것도 오랜 세월동안 신뢰할 만한 명성을 쌓아왔기에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것이지 근본없는 자가 돈으로 군대를 만들겠다고 했으면 절반의 절반도 못 모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것을 군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싶은 오합지졸이나 모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전으로 박살 난 제국에서 최후까지 살아남은 대귀족 8명을 강제로 합의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세력이라고?

믿기 어렵다.

그리고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다.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문서를 보고 당시의 상황을 파악했다는 지슬리 공작의 언급대로라면 그렇게 널리 알려진 사실도 아닌 모양이다.

실제로 헬문트는 3백년 전 8대 귀족을 넘어서는 또 다른 세력의 존재여부에 대한 내 질문에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반응이었다.

훈련받은 기사이자 경험많은 행정가인 사람도 모르는 이야기라니.

적어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아니라는 말이다.

역사학자라도 수배해야 하나?

헬문트는 순스발에 은거하고 있는 황궁 출신의 역사 학자가 있다고 알려줬지만 방문할 시간이 날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칼마르로 돌아가게 되면 리네아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낫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지금 당장 우리에게 닥친 문제는 지슬리 공작이 남기고 간 의문 따위가 아니었다.

섬그늘에 매복했던 게스티 백작의 함선 4척이 사라졌다.

바람의 방향이 바뀐 후 일방적으로 몰리던 게스티 백작군의 마지막 희망일 수도 있었던 그들이 조용히 사라진 것이다.

우리쪽 척후선이 섬그늘을 떠나 세라빅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그들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누가 지휘자였습니까?”

“스콜비 남작이라고 합니다. 게스티 백작의 조카되는 사람으로 전형적인 문관 귀족입니다.”

헬문트 역시 해적으로 흑화할 수 있는 자들의 탈출에 신경이 곤두선 모양인지 이미 그들에 대한 조사를 해 놓은 후였다.

스콜비라면 나 역시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자다.

다리클리프에서 한 차례 충돌이 있었던 귀족이다.

그 때 바람을 다루는 여인도 같이 있었다.

“혹시 게스티 백작쪽에 이번에 죽은 바람의 신비를 다루던 여자말고 바람의 신비를 다루는 여자가 또 있습니까?”

“따로 들은 것은 없습니다만 다시 확인해보라고 하겠습니다.”

만약 이번에 죽었던 여자의 능력이 더 강했다면 우리는 각개격파 당했을지도 모른다.

6척의 전투함이 수적인 우위에 눌려서 전멸했다면 나머지 함선은 도주를 선택했을 거다.

도주하던 함선은 매복에서 튀어나온 적에게 가로막혔을 테고 결국은 포위되어 두 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바람의 방향을 조정하다니!

그 여자를 죽인 것이 천운이었다.

도망친 스콜비의 함대에 바람의 신비를 접한 여인이 있다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바다에서 바람을 다루는 존재는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따로 현상금이라도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

전쟁 후의 처리는 컷허드쪽도, 우리 쪽도 바쁘게 돌아갔다.

연합군을 이루는 도시들이 다들 교역으로 먹고 살아서 그런지 전투가 끝나자마자 도시로 귀환해서 교역에 나서야 한다고 난리였기 때문이다.

순스발에서 공식적으로 연합군을 해산하고 전리품도 배분할 예정이었지만 일부는 뒤처리를 맡을 사관 선원을 몇 명 내려놓고 자신들의 도시로 돌아갔다.

도망친 게스티 백작의 함선을 신경쓰는 자는 우리 뿐이었다.

따로 들어오는 정보도 없어서 결국 수배령을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우리도 돌아가기로 했다.

컷허드 쪽에서 받아야 할 것을 모두 받은 후 우리 역시 순스발로 돌아갔다.

우리의 귀환은 엄청난 환영을 받았다.

몇 년에 걸쳐 위협받았던 해상 교역로의 위협이 해결된 것이다.

우리의 승리는 앞으로도 해적이 다시 발호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보장으로 받아들여졌다.

사람들은 이제 도시의 경기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기대대로 경기가 살아날지는 모르겠다.

순스발의 경기는 전적으로 조선소에 달려있고, 배를 만드는 일에 앞으로 어떤 수요가 있을지 아직은 모른다.

그것은 지금의 혼란 상황이 본격적인 내전으로 발전하느냐 아니면 대충이라도 봉합할 수 있느냐에 따라 달렸다.

그런데 아무래도 봉합은 힘들 것 같단 말이지.

몇 명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본 선제후들은 하나같이 야심만만한 자들이고 동시에 매우 이기적이었다.

강력한 힘으로 누르지 않으면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할 것이 뻔했다.

나도, 칼마르도 그럴 만한 힘은 없다.

*

“전에 말씀드렸던 역사학자가 있는 곳을 알아냈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더군요. 순스발 외곽의 농장에서 10년째 은퇴 생활을 즐기는 중이랍니다. 에할름이라는 자인데 기사 작위를 받았고, 황실 도서관에서 근무했다고 합니다.”

헬문트는 내가 역사 학자에 대해 물어본 것을 기억하고 그에 대해 알아봐 주었다.

나는 연합군의 해산이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어 며칠 간의 여유가 생긴 김에 역사학자를 방문하기로 했다.

도시 외곽으로 나오자 온통 밀과 호밀을 기르는 밭이었다.

순스발의 시민 상당수가 조선소에 기대어 먹고 산다고 하지만, 시대의 한계상 농업을 무시할 수 없다.

농업은 기본 중의 기본인 것이다.

역사학자 에할름이 은거했다는 농장도 밀과 호밀로 둘러싸인 농가였다.

전날 미리 방문하겠다는 서신을 보냈던 나는 안내인과 함께 농장 입구에서 우리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우리를 맞이한 남자는 은거했다기에는 너무도 튼튼하게 생긴 노인이었다.

머리카락도, 수염도 흰색이었지만 피부는 젊은 사람처럼 탱탱한 것이 세월을 비껴간 모양새였다.

그의 농장집은 아담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곳곳에 세심한 손길이 간 것을 보면 은퇴한 남자가 홀로 산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식당 겸 응접실로 사용하는 곳에서 직접 가꾼 허브로 만들었다는 차와 다과를 대접받으니 마음이 절로 평온해지는 느낌이었다.

차에 독이 들어 있지만 않았다면 정말 좋았을텐데.

차에 살짝 혀를 대는 순간 상태창이 저절로 뜨더니 이것을 주목하라는 듯 [스킬 : 독저항, LOCKED] 이 깜박거렸다.

미니맵에는 내 바로 앞에 있는 놈 말고도 농장집 주변에서 접근해 오는 여러 개의 붉은 점이 나타났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안내인으로 같이 온 자도 나를 따라 일어섰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나는 몸이 살짝 후끈하기만 할 뿐 의식은 멀쩡했다.

움직이는 것도 이상이 없었다.

아무런 스킬이 없었을 때도 독을 견디고 살아났다.

그런데 지금은 스킬이라는 개념으로 내 몸의 저항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상태다.

게다가 혹시나 싶어서 혀만 살짝 댔다.

이 정도면 내가 만독불침은 아니지만 웬만한 독은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인간의 저항력이라는 것이 그렇게 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노인은 차를 마시는 듯 하다가 벌떡 일어난 나를 보고 당황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왜?”

“에할름. 아니, 에할름이 맞는지도 모르겠군. 독이 든 차는 암살자가 쓰기에 너무 안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내 말에 노인은 손에 쥐고 있던 포크로 나를 찔러왔다.

포크는 다과를 찍어 먹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지만 제대로 급소를 찌른다면 위험할 수도 있다.

내 옆의 안내인은 내가 암살자를 언급하는 순간 상황을 파악하고 칼을 뽑은 참이었다.

그는 나를 향해 찔러오는 노인의 팔을 칼로 내리쳤다.

잘라진 팔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날아오는 피를 피해 살짝 옆으로 이동하면서 아직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노인에게 집어던졌다.

머리를 정통으로 맞은 노인은 뒤로 나가떨어지며 의식을 잃었다.

“이런. 이자는 다시 정신을 차리기 힘들겠는데.”

“남작님. 피하셔야 합니다. 공범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머리뼈가 완전히 으깨진 노인의 상태를 살피고 있자 마음이 급해진 안내인이 어서 피해야 한다고 권했다.

공범이 있는 것은 나도 알지.

미니맵에 보이는 붉은 점이 4개나 되는데.

그러나 피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피하면 금방 또 따라와서 귀찮게 굴 것이 뻔했다.

다른 사람들의 피해가 없는 이곳에서 싹 정리하고 가는 것이 차라리 더 나았다.

암살자를 보낸 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암살자를 재배하듯 키우는 것도 아닐테니 아예 한 팀을 다 날려버려서 나에 대한 암살의뢰를 다시 생각하도록 해 줘야겠다.

“당연히 공범이 있겠지. 자네도 조심하게. 암살자는 최후의 한 수가 있는 법이니까 죽었다고 생각해도 함부로 접근하면 안 되네.”

내 충고가 끝나기도 전에 농장집의 문이 열렸다.

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암살자라고 하기도 뭐했다.

그는 내게 검을 겨누며 외쳤다.

“아크후는 잊지 않는다!”

글렌 공작이네.

의뢰자가 너무 투명하다.

속임수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래도 아크후 소속의 암살자가 여러 명 내게 당했으니 나름 원한이 생겼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암살자 주제에 내게 그러면 되나.

피해자는 난데.

정면으로 들어온 자는 미끼였다.

당당하게 들어와서 헛소리로 내 시선을 끈 후 진짜 공격은 창문을 통해서 가해 졌다.

이미 열려 있던 농장집의 창문 2개에 각각 1개의 쇠뇌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2대의 쇠뇌살이 동시에 실내를 갈랐다.

모든 사람에게 가까운 거리, 그것도 뒤에서 쏘아대는 쇠뇌살은 치명적인 위협이 된다.

예외는 거의 없다.

그러나 나는 내 등 뒤에서 날아오는 2개의 쇠뇌살을 동시에 잡아챘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두 눈이 절로 커지는 암살자의 모습이 보이는듯 했다.

이것은 차를 마실 때부터 미니맵을 통해 4명의 암살자가 어디로 움직이는지 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정문으로 들어온 암살자에게 시선을 뺏기지 않은 것도 그 덕분이었다.

내 뒤통수를 쳐보겠다고 몰래 뒤로 와서 창문을 통해 쇠뇌를 쏘는 것도 이미 내 시선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멀리 있는 적이라면 모를까 바로 눈 앞의 적을 상대로 한다면 쇠뇌는 일회용 무기가 되어버린다.

내가 그들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쇠뇌를 사용한 암살자들은 다른 무기를 꺼내야 했다.

그러나 암살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내 검이 한 명의 목을 찌르고 다시 크게 한 발 뛰어서 반대편에 있는 암살자의 목을 찔렀다.

하나는 자신의 무기를 꺼내지도 못했고, 다른 하나는 뒤로 한 발 움직인 것이 다였다.

그 사이에 안내인은 정문으로 들어온 암살자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따로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제서야 마지막 암살자가 나타났다.

너무 늦은 등장이었을까?

아니다.

이것은 쇠뇌를 든 암살자들이 너무 빨리 쓰러졌기에 느끼는 착각이었다.

하지만 그를 도와줄 동료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이제 2명의 적을 상대해야할 판이다.

그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실력이 아주 뛰어나서 나를 쓰러뜨릴 수 있거나 아니면,

이건 뭐지?

나는 그가 들고 있는 무기에 시선이 갔다.

그는 내가 해적과 싸울 때 사용하던 철막대기와 비슷하게 생긴 철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는 철지팡이의 손잡이 부분에 불을 붙인 후 내게 철지팡이를 겨눴다.

철지팡이의 끝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 새끼가!

역시 사람의 생각은 다 거기서 거기다.

내가 한 생각을 다른 사람이 안 했을 리가 없지.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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