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86화 (86/248)

86. 세라빅 해전

그래서 전투함은 돛뿐 아니라 노를 저어서 움직일 수 있도록 구조가 복잡한 편이다. 노꾼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그리고 이 곳에서 노꾼은 노예가 아니다. 엄연히 돈을 주고 고용해야 하는 전문직이고, 선원과 함께 배를 지키는 역할을 맡는다.

그래서 나는 게스티 백작군과 벌일 해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우리 쪽의 우세가 명백했기 때문이다.

걱정이 있다면 게스티 백작의 배후에 있는 선제후 지슬리 공작이 튀어나오는 경우다.

그러나 이번 전투에 큰 영향을 끼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리저리 알아보니 선제후 지슬리 공작이 가진 해양 세력이라는 것이 정말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이다.

산에서야 공작이라지만 바다로 나오면 일개 남작만도 못하다고 한다.

그러니 게스티 백작에게 전권을 맡겼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게스티 백작은 빨리 정리하기로 했다.

*

바람이 좋았다.

연합군의 배들은 예상보다 빠르게 게스티 백작의 거점 도시인 세라빅이 보이는 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게스티 백작의 전투함이 매복한 섬은 모른 척 지나쳤다.

매복해 있는 전투함은 우리가 그들의 존재를 파악한 후부터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기습의 효과가 사라진 소수의 공격은 각개격파의 다른 말이니까.

멀리 세라빅의 항구가 보일 때 비로소 우리의 공격을 눈치챈 듯 움직이기 시작하는 게스티 백작의 배들이 보였다.

6척의 전투함과 14척의 일반선은 곧 벌어질 전투를 앞두고 마지막 점검에 들어갔다.

나는 가장 앞에서 달리는 전투함의 뱃머리에 서 있었다.

바람이 내 얼굴을 가르고 지나간다.

내 호위를 맡은 용병들은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면 뱃머리는 너무 위험하다며 배의 중앙으로 이동할 것을 요청했지만 나는 거부할 수 밖에 없었다.

연합군으로 뭉쳐서 여기까지 왔지만 아직도 눈치를 보면서 뒷자리로 물러서려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앞에 가려는 자들이 없으니 결국 내가 솔선수범하는 수밖에.

물론 내가 쓸데없이 위험만 무릅쓰는 것은 아니다.

살아서 이긴다면 얻는 것은 많다.

제국 동남부의 해상 교역로는 확실하게 칼마르의 손에 들어오는 것이니까.

게스티 백작의 배들이 하나하나 항구를 나서기 시작했다.

돛을 활짝 펴고 바람을 받으며 물 위를 달린다.

젠장!

바람의 방향이 너무 안 좋았다.

이상했다.

아직 공기가 본격적으로 데워지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쌀쌀한 날씨는 아니었다.

경험상 이 정도면 바다에서 육지 방향으로 바람이 불어야 한다.

그런데 바람의 방향이 아직 바뀌지 않은 것이다.

6척의 전투함은 돛과 노를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바람의 방향과는 상관없이 세라빅을 향해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배들은 돛으로만 이동하기 때문에 바람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만약 해류의 방향까지 반대로 흘렀다면 정말 곤란했을지도 모르겠다.

20척의 연합군은 크게 둘로 나누어져서 점점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전체적인 모양새가 안 예쁘다.

거리가 더 벌어지면 각개격파 당하기 딱 좋은 포진이 되어 버린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숨기고 뒤에 따라오는 기함의 신호기를 바라보았다.

헬문트의 명령은 여전히 공격이었다.

아무래도 좀 불리한 상태에서 싸워야 할 듯 했다.

게스티 백작의 함대는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우리 쪽 전투함도 길게 늘어서서 전진 중이었다.

두 마리의 뱀이 서로를 향해 다가가듯 양 쪽의 배들은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서로를 향해 돌격 중이었다.

나는 가장 앞 뱀머리에 서 있었다.

“발리스타의 사정거리에 들어왔습니다!”

“발사!”

채찍소리같은 파열음과 함께 뱃머리에 설치된 발리스타에서 대형 화살이 적을 향해 날아갔다.

첫 발을 날린 후 자유사격을 하라는 명령에 따라 발리스타를 조작하는 용병들은 계속 대형 화살을 쏘아댔다.

출렁이는 파도 때문에 겨냥은 엉망이지만 충분히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서너 발이 날아가면 한 발 정도는 반드시 적을 날려버렸다.

사람이 당겨서 쏘는 화살과는 다르게 발리스타는 도르래를 이용해서 당기는 장력이 보통이 아니라서 대형 화살에 맞은 적은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뒤로 나뒹굴었다.

이것은 적에게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사기가 죽은 것이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뱃머리 쪽으로 나와서 기세를 올리던 병사들이 몇 명 뒤로 나가떨어지자 앞으로 나오는 자를 보기 힘들 정도였다.

게스티 백작군 쪽에서도 발리스타는 있다.

우리쪽보다 좀 더 대형인 것이 원래 배에 있던 것은 아니고 어딘가의 성에서 떼어온 것 같은데 간판에 설치해 놓았다.

그리고 발리스타 사수의 실력이 우리만 훨씬 못했다.

겨냥이 터무니없이 빗나가서 우리쪽 배에 도달하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쏘다보면 얻어걸리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나를 향해 똑바로 날아오는 발리스타의 대형 화살을 볼 수 있었다.

그대로 두면 내 가슴을 뚫고 지나갈 화살이었다.

만약 피한다면 내 뒤의 병사들을 잡아먹을 공격이기도 했다.

피할 수도, 피할 생각도 없었다.

나는 철막대기를 앞으로 겨누었다가 어깨 뒤로 돌렸다.

그리고 대형 화살의 촉이 내 범위에 들어온 순간 철막대기를 야구배트처럼 휘둘렀다.

깡!

쇠막대기에 맞은 대형 화살은 쇳덩이 부딪치는 소리만 남기고 바닷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광경을 지켜본 용병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기세를 올리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다음에 날아온 대형 화살에 옆에 같이 달리던 전투함의 방패가 깨어지고 용병이 화살째 꿰어서 날아가 버렸음에도 기세가 죽지 않고 오히려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며 사기를 끌어올렸다.

양쪽에서 동시에 전력으로 다가가니 수백 미터의 거리는 금방이었다.

발리스타로나 공격할 수 있었던 거리가 금방 서로의 눈동자와 눈자위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가 되어 버렸다.

“노 넣어! 노 넣어! 부딪친다!”

선두에 선 양쪽의 배가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 쪽의 노는 늦지 않게 안으로 수납해서 피해가 없었지만 게스티 백작 쪽의 배는 노를 미처 수납하지 못하고 우리쪽 배에 긁혀서 배 왼쪽 편의 노가 모조리 부러졌다.

한 줄로 달려온 게스티 백작군의 두 번째 배도 그냥 지나쳤다.

지나갈 때 서로 마주보고 화살을 쏘아 대기는 했지만 피해는 거의 없었다.

우리가 제대로 공격한 것은 세 번째 배부터였다.

“충돌한다! 꽉 잡아!”

갑판장의 명령이 있기가 무섭게 전투함은 뱃머리를 틀어서 게스티 백작군의 세 번째 배 옆구리를 들이 박았다.

“노를 내려라!”

“뒤로 뒤로!”

노가 다시 일제히 바다로 내밀어졌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반대 방향으로 노를 저었다.

배가 후진 하는 것이다.

옆구리를 뚫린 게스티 백작군의 전투함이 살짝 기울어져 버렸다.

가라앉지는 않겠지만 제대로 움직이지는 불가능해졌다.

이 세상에서 전투함으로만 쓰는 배와 전투함으로도 쓰는 배와의 차이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돛과 노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가?

두 번째는 충각을 사용할 수 있는가?

돛과 노를 동시에 사용하면 정교한 움직임이 가능하다.

심지어 뒤로 갈 수도 있다!

노꾼이 필요하고 보급품을 쌓아둘 공간이 마땅치 않기는 하지만 전투를 위해서라면 유용함이 차고도 넘친다.

그리고 충각은 적의 배에 박치기를 하는 것이다.

물론 아무 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충각을 하려면 배의 뼈대가 되는 용골을 튼튼하게 만들고 충각용 구조를 배의 앞부분에 설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배가 충각을 시도한다면 용골이 뒤틀리기 때문에 오히려 들이박은 배가 더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충각이 성공한다면 적의 배 하나를 공격대열에서 탈락시키는 것이 된다.

뒤로 빠지는 우리쪽 배를 향해 다른 배가 달려들었다.

서로의 뱃전을 긁을 정도로 가까이 지나가다가 고리달린 쇠사슬과 그물을 던지며 양쪽의 배를 얽어 버렸다.

이제부터는 백병전의 시간이다.

내가 적의 배로 뛰어들기도 전에 양쪽의 병사들이 서로 상대방의 배를 향해 뛰어들었다.

바로 코앞에서 화살을 쏘고 칼을 휘두른다.

흔들거리는 갑판의 불안정함 때문에 균형을 잃은 병사들이 제대로 무기를 휘두르지도 못하고 나동그라지기도 한다.

작살과 창으로 상대편의 배에 있는 적을 향해 찔러댄다.

배가 서로 얽히자마자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규칙적으로 날아가는 발리스타의 대형 화살만이 확실하게 생명을 잡아 먹고 있을 뿐 양쪽 배의 갑판은 온통 혼란의 도가니였다.

나는 게스티 백작군의 함선으로 넘어갔다.

쇠막대기를 휘두를 때마다 적의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터져 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게스티 백작군의 병사들이 입은 갑옷은 얇은 가죽갑옷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편으로 내부를 보강한 면갑옷을 입고 있어도 방어 효과가 없다고 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 내 쇠막대기 공격인데 얇은 가죽갑옷을 걸쳐서야 맨 몸으로 내 앞에 나선 것이나 다름없다.

반면 내 부하들은 다리클리프산 나무 갑옷을 입고 있다.

일반적인 것은 가죽 갑옷 정도, 오랫동안 잘 말린 특별한 것은 철로 된 갑옷 못지 않는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는 다리클리프 특산품이다.

일반적인 병사의 수준에서 갑옷의 차이는 곧 실력의 차이가 된다.

우리쪽 배로 뛰어들었던 적은 순식간에 난도질당한 채 갑판위에 쓰러지거나 공격에 밀려서 다시 자신의 배로 도망가 버렸다.

그러나 그들의 배는 곧 사라질 운명이었다.

적의 배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작은 기름단지를 가지고 온 부하들이 불을 붙여서 던진 것이다.

불을 끌 여유가 없던 적은 불이 번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보아야만 했다.

불붙인 기름 단지 몇 개를 선창에 집어 던진 것으로 공격을 끝냈다.

적의 배에 뛰어들었던 부하들이 복귀하고 나 역시 마지막으로 귀환했다.

부하들이 다급하게 양쪽의 배를 연결하고 있던 그물과 쇠사슬을 끊어내는 동안 적은 불타는 배를 버리고 바다로 몸을 던졌다.

우리는 다음 목표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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