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게스티 백작만 남았다.
땅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이 실제 정치 언어로 작동하던 사회에서 살아봤으니까.
이곳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땅에 기대어 살아간다.
부모가 농사를 지으면 그 땅에서 자식도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그렇게 대를 이어 같은 곳에서 같은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상단과 운명을 같이 한다니?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역시 부친의 직업과 인맥을 이어받아서 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비로소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직업 선택의 자유를 누렸던 경험 때문에 오히려 선입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상업에 뛰어든 것으로 말이다.
나 자신도 기사라는 선친의 직업을 대를 이어 종사하고 있으면서 그런 착각을 하다니.
상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상단은 커다란 가족이나 땅 같은 것이다 .
상단이 망한다는 것은 농민이 땅을 잃고 가족을 잃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가족이 잘못했다고 포기할까?
땅에 가뭄이 들었다고 땅을 버릴까?
움켜쥔 쇠막대기가 대기를 찢었다.
일이 고약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부여잡고 버티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인 경우가 있다.
지금 랑세트 상단의 본부에 모여서 무기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렇다.
해적과 결탁한 것을 아는 자도 있고 모르는 자도 있겠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랑세트 상단을 위해 죽을 테니까.
나는 그들을 죽일 것이고.
움켜쥔 쇠막대기가 대기를 찢었다.
천을 찢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갑옷의 어깨받이가 박살난 적이 패대기쳐진 개구리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먼저 부러져나간 칼조각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칼손잡이만이 그의 손에 남아 있었다.
거인족이 사용하던 쇠몽둥이에는 못 미치겠지만 새로 장만한 쇠막대기는 꽤나 쓸만했다.
웬만한 무기는 물론 방패조차 쇠막대기의 일격을 받아내지 못했다.
무기는 부러지고 방패는 박살났다.
쇠막대기의 일격 아래에 놓였던 사람들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기사급의 실력을 갖췄던 상단 간부 몇 명이 한순간에 쓸려나가자 저항하던 자들의 기세가 확 죽는 것이 느껴졌다.
전투를 길게 끌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 일에 책임이 있는 자는 죽어야 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잔인하게 적을 몰아붙였다.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화살이 날아오고 사람이 부딪쳐 왔다.
그러나 내게 위협이 되는 것은 없었다.
쉬운 일이었다.
내 주변에 무엇이 있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는 것은.
지금은 나를 중심으로 대충 4미터 정도?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연으로라도 나를 상처입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화살을 쳐내고, 사람은 후려친다.
원을 그리며 내 주변을 쓸어가는 쇠막대기의 반경에 걸린 모든 것이 박살이 났다.
나를 자극하지 못하는 저항은 지루하기까지 했다.
나는 순식간에 상단본부의 입구까지 밀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 곳에서 멈춰서서 나를 노려보는 중년의 상인에게 살기를 뿜었다.
내 목표가 저기에 있다.
자신의 죽음을 확신한 중년인은 반쯤 체념한 얼굴이었다.
내가 끌고 온 병사들과 랑세트 상단의 전력차가 너무 압도적이라서 다른 방향 역시 일방적인 전투로 적을 몰아붙였다.
내가 상단본부의 입구 앞에 도착했을 때 전투의 중심은 순식간에 상단 본부로 이동했다.
사방이 내 부하로 깔린 지금,
이 곳에서 누군가가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해적과 결탁한 자들이다. 자비는 없다.”
“저항하는 자는 모두 죽여라!”
“살고 싶은 자는 무기를 버리고 엎드려라!”
목소리 큰 용병이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외쳐 댔다.
그 옆에는 콘베른 남작이 항복을 권유하며 남작가의 깃발을 흔들었다.
그러나 위협과 항복권유에도 불구하고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자는 많지 않았다.
돌아가는 상황도 모른채 갑자기 휩쓸린 용병들이나 허둥지둥 무기를 버리고 항복할 뿐이었다.
나는 손을 들었다.
전투의 소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나는 내 앞의 장년인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너, 길게 수염이 난 놈. 네가 랑세트 상단의 상단주인가?”
“그렇소. 윌리엄 남작.”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라. 다는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목숨은 보장하겠다.”
“남작.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겠소? 해적과 손을 잡은 자는 재산몰수에 사형이라는 것, 당신도 잘 알 텐데?”
“책임을 져야 할 자들 몇은 죽어야 하겠지. 그러나 명령에 따른 대부분의 범죄자는 그에 걸맞은 처벌을 받는 것으로 끝내겠다.”
내 말에 중년인은 고개를 떨궜다.
결국 마음이 무너진 것이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고 주변의 상단 관계자들에게 명령했다.
“항복하겠다. 무기를 버려라.”
무기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내 부하 용병들이 상단의 고용인들을 일일이 묶어서 끌어내고, 헬문트 시장이 데리고 온 서기들은 랑세트 상단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랑세트 상단의 재산을 몰수하면 지금까지 들어간 전쟁 비용은 충당이 가능할 것 같았다.
바다 위에 있을 상선을 생각하면 흑자가 날 지도?
이것으로 가지치기는 끝냈다.
게스티 백작의 편을 들어서 내게 적대할 만한 세력을 모두 정리해 버렸다.
해적 마을 셋,
관련된 대형 상단 하나.
해적 마을 둘은 아예 직접 토벌을 해서 전멸을 시켜 버렸고, 남은 하나도 다르지 않은 운명에 처했을 것이다.
해적 마을을 배신한 게스티 백작이 그들을 그냥 내버려 뒀을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랑세트 상단의 경우는 운이 좋았다.
만약 도착하는 것이 하루만 더 늦었어도 그들은 물자와 인원을 챙겨서 게스티 백작에게 도망쳐 버렸을 것이다.
다행히 제 때 도착해서 제압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다면 게스티 백작과 칼마르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시간만 질질 끄는 도시가 여럿 나왔을 것이다.
골치 아픈 상황은 속전속결로 끝내 버렸으니 이제 남은 것은 게스티 백작 뿐이다.
게스티 백작이 지배하는 2개의 항구도시만 제압하면 해상 교역로에 영향을 끼치려던 선제후 지슬리 공작의 시도는 좌절되는 것이다.
물론 게스티 백작을 제압해 버리면 선제후 지슬리 공작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
그러나 선제후 지슬리의 영역이 산이니만큼 무리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는 기대는 있다.
배와 능숙한 선원, 바다에서 싸울 수 있는 용병은 쉽게 재건할 수 있는 종류의 무력이 아니다. 한 세대는 족히 걸리는 시간과 막대한 돈을 필요로 한다.
그 정도 시간이 흐른 뒤라면 제국의 혼란은 어떤 식으로든지 해결되고 난 뒤일 테니 신경 쓸 것 없다.
미래의 문제는 미래의 누군가가 해결하겠지.
이제 진짜 전투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지금까지처럼 일방적으로 때려 부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대방의 체급도 만만하지 않으니까.
이럴 때는 친구가 필요하다.
같이 맞아주고 같이 때려줄 동맹 도시 말이다.
해적 마을에서 발견한 서류는 우리의 개전 명분에 엄청난 힘을 실어주었다.
게스티 백작이 제국 동부의 소수민족을 끌어들여서 해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뒷받침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나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랑세트 상단과 긴밀하게 연락하며 약탈품을 처리한 증거도 나왔고, 랑세트 상단에서 나온 문서도 그것을 뒷받침했다.
그동안 해적에게 공격당해서 배와 사람, 상품을 잃었던 도시들은 엄청난 분노를 표시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중 일부는 한 때 게스티 백작에게 해상 교역로의 안전을 맡기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 손은 해적을 쥐고 약탈을 하고 다른 손은 도와주겠다고 내밀었던 꼴이니 게스티 백작에 대한 분노가 실제 행동으로 변하는 데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내가 돌린 격문에 호응하며 병사와 배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연합군을 결성하는데 성공했다.
해상 교역로 상의 상업 도시에서 갹출한 병력과 배로 연합군을 만들고 내가 총지휘를 맡기로 했다.
물론 해전이나 대규모 군대의 통솔에 대해 나는 아무 것도 모르니까 그것은 헬문트가 맡아줄 예정이다.
나는 이를테면 명목상의 총사령관인 셈이다.
다리클리프에서 데려온 용병의 수는 대략 1천 정도.
칼마르와 함께 보조를 맞추기로 한 해상 교역로 상의 도시들에서 보내온 병력 역시 비슷한 규모였다.
근 2천에 달하는 전투 병력과 20척의 배가 우리가 가진 핵심 전력이었다.
경험많고 노련한 숙련병이 대부분으로 신병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우리가 동원한 20척의 대형선 중 6척은 노와 돛을 다 이용할 수 있고 심지어 충각까지 가능한 전투함이고, 나머지는 상선을 전용한 것이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상선보다는 구조가 단단한 배라고 한다.
그 이외에도 척후선으로 쓸 작은 배도 여럿 준비했다.
우리는 순스발에 모여서 마지막으로 정비를 한 후 게스티 백작의 도시를 향해 출발했다.
게스티 백작의 함대는 바다 속에 쳐 넣고 그의 도시는 불태우는 것이 목표였다.
게스티 백작은 2개의 도시를 가지고 있다.
둘 다 항구도시지만 중심이 되는 도시는 하나다.
세레빅.
각종 금속괴를 수출하는 항구로 유명한 곳이다.
다른 한 쪽은 입지가 안 좋아서 큰 배가 접안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의 주전장은 세레빅이 될 예정이다.
내가 해전에 대한 경험은 없지만 군대가 움직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척후라고 배웠다.
적에 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하지만 레이더도 없는 이 세상에서 적의 함대와 조우하는 것은 어쩌면 운의 영역에 속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척후선을 사방에 풀어서 적의 동태를 발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중간에 발견해도 좋고, 적의 함대가 항구에서 안 나와서 항구에서 결전을 벌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우리의 숫자가 더 많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결국 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척후선을 열심히 뿌린 덕분에 세레빅에서 나와서 항구 근처의 섬으로 이동하는 게스티 백작의 함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결전의 때가 다가왔다.
“척후선의 보고에 의하면 섬그늘에 숨은 게스티 백작의 함대는 4척에 불과합니다. 나머지는 항구에 있다고 합니다.”
“왜 함대를 나누었을까요? 전체적인 숫자가 우리보다 적은데 거기서 또 나누다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마도 매복일 겁니다. 만약 섬그늘에 숨는 것을 척후선이 제 때 발견하지 못했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참 해전을 벌이고 있을 때 뒤에서 기습을 걸어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지도를 보니까 생각보다 거리가 멀어서 기습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헬문트 경.”
“이 곳의 물길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섬그늘에 숨은 자들부터 처리하고 싶은데 섬근처의 물길은 익숙하지 않은 자들에게 위험할 수 있습니다. 별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세레빅부터?”
“예. 세레빅을 먼저 공격하고, 예비대로 5척을 따로 뒤에 빼놓도록 하시지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선봉은 내가 섭니다.”
“알겠습니다.”
전투는 바로 다음 날 시작되었다.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다수로 소수를 공격하는 것이 기본이다.
지휘자가 병신이거나, 병사가 오합지졸이거나, 무기체계가 너무 차이가 나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의 경우 숫자가 많은 쪽이 이긴다.
그런데 육지에서는 매복을 한다던가, 지형적인 함정에 빠뜨린다는가, 유인을 한다든가하는 식으로 숫자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여럿 있다.
아니면 아무 생각없이 그냥 성에 처박혀 있는 것만으로도 몇 배의 숫자를 몇 개월이고 버틸 수도 있다.
이런 것을 잘 구사하는 자를 명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바다에서는?
일단 바다는 숨을 곳이 없다.
멀리서부터 서로를 보면서 몇 시간에 걸쳐서 접근 후 싸우는 것이다.
그것도 배 하나하나를 점령하거나 불태워야 한다.
움직이는 작은 성채를 점령하는 과정이 곧 이 시대의 해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하겠지만 배가 많고, 싸울 수 있는 전투병이 많으면 이긴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전력이 떨어지는 쪽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없다는 것이다.
화공?
배는 물 위에서 떠다니는 것이고, 나무로 되어있다지만 그렇게 쉽게 불에 타지 않는다.
배 위에 있는 선원들이 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배가 불에 타는 경우는 배가 점령당했거나 전투가 한참 진행 중이라서 진화 작업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배를 모조리 불에 태워버렸다는 일화도 배를 연결해서 마치 육지처럼 만들어 버려서 그렇지 그냥 내버려 뒀으면 그렇게 큰 불로 안 번졌다.
단지 돛이 불에 타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경우는 제법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