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84화 (84/248)

84. 배신과 토벌

비명.

욕설.

무기 부딪치는 소리.

고함소리.

그리고 항의를 하는 것인지 자비를 원하는 것인지 구별할 수 없는 절규.

게스티 백작의 전투함에서 학살이 벌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뒤늦게 눈치챈 해적들이 저항하며 울부짖었지만, 그들을 향한 칼날은 조금의 자비도 없었다.

게스티 백작의 군대는 경험 많은 용병이고, 잔인한 뱃사람이다.

방금까지 같이 농담하며 떠들던 해적 몇십 명을 쓸어버리는 일은 그들에게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개새끼들아! 이거 봐라! 계약서다! 너희 백작이 직접 서명한 계약서란 말이다!”

뱃머리까지 몰린 젊은 해적 하나가 문서 하나를 흔들며 절규했다.

두 명의 해적이 젊은 해적을 보호하며 앞에 서 있었지만 그들의 눈은 이미 희망을 버린 후였다.

갑작스러운 배신과 학살을 피해 뱃머리까지 도망쳤지만 여기가 한계인 모양이었다.

부족장의 아들은 이 현실이 믿기지 않는 듯 계약서를 손에 쥐고 항의하고 있었지만, 글자 몇 개 적어놓은 종이 따위는 그들에게도 아무 의미 없었다.

아직도 마지막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부족장의 아들이 불쌍해 보일 뿐이었다.

“에어베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부족장의 아들은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둘러싼 병사들 사이, 뱃머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게스티 백작이 서 있었다.

그는 아직도 해적 정리를 미처 못 끝낸 부하들의 무능함에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갑판에 미끌거리는 피 역시 짜증을 더하는 존재였다.

그는 어서 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돌아가고 싶었다.

눈 앞에서 떠드는 애송이만 처리하면 정리는 끝이었다.

“게스티 백작! 무슨 짓이냐! 신성한 바위 앞에서의 맹세, 당신이 서명한 계약서의 약속은 어디로 간 거냐! 네가 말하는 명예가 이딴 것인가?”

“젊은 에어베드. 계약은 지킬 힘이 있는 자에게만 의미있는 걸세. 그리고 글도 몰라서 손바닥을 계약서에 찍은 야만족 따위가 명예를 운운하다니 웃기지도 않는군.”

에어베드는 게스티 백작의 비아냥에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말을 잃었다.

자신의 부족을 찾아와서 장물을 거래하고 부족장과 함께 술을 먹으며 부족의 이주를 제안하던 사람과 지금 저기서 경멸어린 표정으로 자신이 서명한 계약서조차 무시하는 사람이 같은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저렇게 표리부동한 자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생각했다니!

저런 자를 부족장에게 소개했다니!

에어베드는 자신의 목을 조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자신들을 공격하는지 이유는 짐작이 된다.

갑자기 나타나서 해적 마을을 토벌하며 기세를 올리고 있는 칼마르 백작가의 군대가 두려워서 저러는 거겠지.

바다의 주인이 될 것처럼 큰소리를 치던 자들의 실체는 겁쟁이였다.

그제서야 에어베드는 명백한 사실을 직시했다.

자신과 자신의 부족이 배반당했음을.

그리고 어쩌면, 이주한 부족원들 중 살아남은 자는 여기에 있는 자들이 전부이고, 잠시 후면 그마저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에어베는 맹세를 어긴 자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으로 자신의 원한을 바다에게 알렸다.

“신성한 맹세를 어긴 너, 게스티 백작이여! 너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네 머리는 장대에 매달릴 것이고 네 몸은 바다가 먹을 것이다. 너는 배 위에서 죽을 것이고, 너의 자손은 대가 끊어질 것이다. 이 모든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뭐하나! 당장 죽여버려!”

에어베드의 저주가 낭랑하게 퍼지는 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게스티 백작의 고함이 그 이상한 고요를 깨고서야 모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분을 떨쳐버리듯 달려든 병사들은 에어베드를 지키던 두 명의 해적을 순식간에 난도질하고 에어베드 역시 가슴을 찔렀다.

에어베드는 가슴에 칼을 박은 채로 뒤로 넘어가며 바다에 떨어졌다.

이것으로 게스티 백작의 전투함에 피신해 있던 해적들이 모두 정리되었다.

게스티 백작은 그제서야 한숨을 쉬었다.

해적과 손을 잡았다는 증거와 증인을 모두 말소해버린 것이다.

“갑판장. 청소를 깨끗하게 하게. 특히 핏자국은 보기 싫으니 유의하도록.”

“예. 백작님.”

칼마르 백작은 갑판장에게 명령한 후 선장실로 돌아갔다.

선장이 귀환을 지휘하는 동안 좀 쉴 생각이었다.

일이 엉망으로 돌아가는 중이라서 육체보다도 정신이 더 피곤했다.

선제후 지슬리 공작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항구 도시는 불과 3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 2개가 그의 백작령에 속한 도시였다.

그것이 그가 바다로 나와서 고생을 하는 이유였다.

광물의 수출과 각종 상품과 식량의 수입.

항구의 규모는 보잘 것 없다지만 그래도 선제후인 지슬리 공작령의 수출입을 담당하는 곳이다.

중간에 떨어지는 이문이 상당했다.

게스티 백작은 그 이문을 누리며 좋은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선제후 지슬리가 해상 교역로를 장악하겠다는 의중을 내 비춘 후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선제후 지슬리 가문의 깃발에는 원래 울부짖는 곰과 수레만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배가 추가된 것이다.

게스티 백작은 변경된 깃발을 보는 순간 언젠가는 지슬리 공작이 바다로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슬리 공작의 결정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다.

선제후들 간의 견제와 국지적인 전투로 인해 제대로 된 지원도 하지 못하는 이 때에?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자신이 해상 교역로를 장악하는 일을 맡겠다고 자원하지 않았다면 선제후 지슬리의 일족 중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했을 것이다.

그리고 배와 사람이 필요하다며 당연하다는 듯 자신이 공들여 키운 병사와 전투함을 가져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의 성패에 관련없이 자신은 몰락한다.

그래서 제대로 된 지원도 없이 해상 교역로의 장악에 뛰어든 것이다.

다행히 해상 교역로의 상업 도시들이 연합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군 덕분에 약간의 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이라면 해상 교역로를 장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해적을 이용해서 한 번 크게 뒤집어 업자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빌어먹을 칼마르 백작이 튀어 나온 것이다.

제국 남동부의 해상 교역로는 자기들 것이라 이거겠지.

몇 년 조용하게 있었다지만 물류 유통에 목숨을 걸고 있다는 칼마르 백작가의 힘은 무서웠다.

순식간에 병력을 끌어모으더니 백작의 약혼자라는 남작 하나가 설치고 다니면서 해적 마을을 모조리 토벌해 버린 것이다.

몇 년간의 노고가 불과 한 달 사이에 햇볕 아래의 이슬처럼 날아가 버렸다.

심지어 자신이 작업을 시작하기 전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

계약의 상대방인 해적을 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대가 해적이라지만 계약을 깨 버렸다.

말의 신뢰가 무너진 것이다.

그것을 많은 사람이 보았다.

자신이 해적과 계약했고 그 계약을 부당하게 깨버렸다는 것이 퍼지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자신이 해적과 손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부인해도 사람들은 계속 의심할 것이다.

증거가 없으니 대놓고 적대하지는 않겠지만 신뢰하는 거래 상대로 취급받기는 글렀다.

만약 압도적인 힘을 갖췄거나 해상 교역로의 상당 부분을 장악한 상태였다면 오히려 해적을 무기로 삼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실행도 하기 전에 어그러진 계획이었다.

해상 교역로를 이용하는 도시들은 해적을 증오한다.

내 도시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게스티 백작은 살아날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

해적 마을을 이룰 정도로 규모가 큰 해적 집단도 처음에는 해안선을 따라 흩어져 있는 어촌이나 작은 섬에 위치한 소규모 부족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난파한 상선을 약탈하는 것으로 해적질에 맛을 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선이 다양한 이유로 난파하게 되면 사람과 물품이 해안으로 떠밀려 온다.

대개의 경우 사람은 구조하고, 물품은 적당히 챙기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사람은 묻어버리고 물품은 모조리 챙긴다.

그리고 장물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꼬리를 잡혀서 토벌을 당하기도 하고, 아니면 후원자를 만나 본격적인 해적질로 나서기도 한다.

우리가 토벌한 2개의 해적 마을 역시 마찬가지였다.

양쪽 다 해적선으로 쓸 상선을 제공하고 대신 약탈한 물품을 저렴한 값으로 넘겨받는 자들이 있었다.

해적 마을에서 발견한 편지와 문서를 통해 누가 해적 마을의 후원자로 있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랑세트 상단.

제법 규모가 있는 상단이었다.

순스발의 시장인 헬문트조차 상단의 이름을 듣자 바로 누가 상단주인지까지 기억해낼 정도로 이것저것 손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잘 나가는 곳이라고 한다.

해적과 손잡고 헐값에 장물을 사들여서 팔아먹으려고 하니 이것저것 근본없이 온갖 상품을 다루는 것이 말이 되기는 한다.

나는 그 사실을 상단의 뒷배가 되는 귀족에게 통보했다.

상단의 지분을 40% 정도 가지고 있고, 정치적인 배경이 되어서 힘있는 사람들의 먹잇감이 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자였다.

남작인 그는 내가 보낸 전령을 만나자마자 다른 곳은 들리지도 않고 곧장 내게 달려왔다.

“윌리엄 경. 맹세코 나는 몰랐습니다.”

“물론 나는 콘베른 경의 말을 믿습니다. 오해의 여지가 없게 곧장 내게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상단을 조사한 후 확실히 하는 것으로 하시지요.”

“당연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교역으로 먹고 사는 도시의 귀족이 해적과 관련이 된다는 것은 불명예를 넘어서 생사가 걸린 문제가 된다.

해적에게 피해를 입은 다른 귀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꾸준히 해적과 붙어먹는 귀족이 나온다는 것이 신기하기는 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영지 귀족조차도 강도귀족으로 전업해서 알바로 산적 노릇을 하는 세상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 당장 손에 쥐어지는 현금이 소중할 때가 있으니 말이다.

목표가 되는 랑세트 상단은 콘베른 남작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인프린 항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항구에 대기하는 상선만 5척이 넘었다.

잘 나간다고 하더니 정말 만만하지 않은 규모였다 .

나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1천 명의 용병과 함께 랑세트 상단을 공격했다.

콘베르 남작가의 깃발과 칼마르 백작가의 깃발이 선두에 섰다.

깃발을 본 랑세트 상단의 용병들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재빠르게 무기를 버리고 넙죽 엎드렸다.

콘베르 남작가의 깃발만 있다면 랑세트 상단의 권리를 두고 높으신 분들끼리 싸움이 났나보다 하고 생각하면 되지만 칼마르 백작가의 깃발까지 같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지금 칼마르 백작가는 해적을 때려잡으로 돌아다는 중이다.

해적 마을 몇 개를 토벌했다는 소문도 바로 어제부터 들려온다.

그런데 그런 칼마르 백작가가 랑세트 상단을 공격하러 몰려온다고?

자칫 해적과 한 패로 몰리는 경우가 생긴다.

단순히 돈을 받고 용역을 제공하는 용병 입장에서는 랑세트 상단과 운명을 같이 할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튈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무장 해제를 하고 물러서는 용병들을 지나서 랑세트 상단의 본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과연 상단의 본부에는 랑세트 상단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다가오는 두 개의 깃발을 보고도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비릿하게 웃으며 내 쇠막대기를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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