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해적 마을 토벌 이후
“이 무례는 잊지 않겠네. 윌리엄 경. 다음에 두고 보지.”
게스티 백작은 나를 노려보며 분노를 뱉어냈다.
이를 너무 악물고 말해서 발음이 뭉개지기까지 했지만 뭐라고 하는지 알아 들을 수는 있었다.
결국 게스티 백작은 물러나는 것으로 결정한 것이다.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사실상 주어지지 않았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기는 했을 거다.
정치적으로는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것을 스스로 허무는 결정이다.
하지만 당장의 충돌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머리가 있으니 부들거리면서도 강제로 정해진 답변을 한 것이다.
그가 데리고 온 전투함은 2척, 나는 4척이다.
지금 전투가 벌어진다면 2배의 병력 차이를 무릅써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명장이라도 2배나 많은 적을 상대로 싸우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전 경험이 많은 지휘관이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상황으로 몰릴 때, 한 가닥의 가능성을 보고 운에 기대는 것이 그런 종류의 싸움이다.
이런 전투를 결정하는 것, 보통 강단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게스티 백작은 그럴 정도로 신경줄이 굵은 자가 아니다.
더구나 방금 그의 눈앞에서 그의 호위기사 2명이 순식간에 무력화되었다.
언제든지 내가 그를 죽일 수 있다는 협박도 바로 코 앞에서 들었다.
반면에 그가 나를 죽이기에는 적잖이 껄끄럽다.
내가 협박한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명령을 내리기 전에 자기 목을 한 번 만져볼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인데 전투 시작을 명령한다고?
게스티 백작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의 경험으로 본다면 저 자는 정치질에는 능할지 몰라도 대놓고 가해지는 폭력에는 약한 타입이다.
이 자리에 있는 병력의 숫자도 압도적으로 밀리고, 정치적인 입장도 불리하다.
결국 그는 합리적인 정치꾼다운 결정을 내린 것이다.
게스티 백작은 다음에 두고 보자는 전형적인 패자의 한 마디를 남긴 채 자신의 전투함으로 돌아갔다.
마을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게스티 백작의 병사들까지 모두 전투함으로 돌아가자 폭죽 신호가 연달아 올라갔다.
산으로 가 있는 게스티 백작측 병사들에게 돌아오라는 신호일 것이다.
육지에서 전투를 할 때는 나팔과 깃발로 부대를 움직이지만, 바다위 에서는 거리 때문에 그게 쉽지가 않다.
그래서 깃발과 폭죽을 주로 쓰는데, 이 자들은 폭죽을 육상에 올라서 멀리 가 있는 동료들에게까지 신호로 쓰고 있는 것이다.
붉은색과 노란색의 연기가 하늘에 폭음과 함께 하늘에 흩어졌다.
색 있는 연기가 바람에 날려 사라지기 무섭게 폭죽을 하늘로 쏘아서 똑같은 연기를 하늘에 표시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했다.
돈은 확실히 많은 모양이다.
폭죽을 저렇게 많이 쏘아대다니.
저게 다 돈인데.
아니, 잠깐?
폭죽?
폭죽이 있으면 화약도 있는 것 아닌가?
화약이 있으면 화약무기가 가능하다.
총, 대포, 수류탄, 지뢰.
공격에도 방어에도 엄청난 이점이 생긴다.
그 뿐인가.
진짜는 폭력의 평등이다.
상점의 사환을 끌어다가 전장에 세워도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다.
전장을 수십년간 전전해온 베테랑 용병이나 한달짜리 훈련을 받고 전장에 끌려나온 미성년자나 차이가 없게 되는 것이다.
기사는 끝장이고,
더불어 귀족도 끝장이다.
제대로된 화약무기만 있다면 이루어질 역사다.
지구의 역사가 그랬듯이.
갑자기 지금까지 눈 앞을 가리고 있던 어두움이 걷히면서 새로운 세계와 광명을 보는 느낌이었다.
나는 화약무기가 모든 무기의 근본, 그 자체였던 세상에서 왔다.
어떻게 만드는지는······ 당연히 모른다!
영업이나 뛰던 문과 출신이 그런 것을 어떻게 아나.
그러나 총력전의 나라에서 온 나는 군사훈련을 받고 2년을 넘게 굴렀다.
화약무기라는 것이 어떤 모양으로 생겼고, 어떤 식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그 때 경험했다.
화약무기의 올바른 개념을 알고 어떤 식으로 전쟁터에서 사용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몇 백년의 시행착오를 건너뛰어서 정답을 알고 시작할 수 있단 말이다.
제3세계에서는 총기를 대장간에서도 만들지 않았던가?
이 곳의 대장간도 실력이 괜찮다.
잘 모르겠지만 판금갑옷을 만들 정도라면 총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열심히 행복회로를 돌리던 나는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했다.
화약무기에 대한 것은 잠시 넣어두고 해적 마을에 대한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
게스티 백작의 병사들이 자신들의 배로 돌아가는 동안 내 휘하의 병력은 그들과 엇갈려서 연달아 포구에 내렸다.
나는 용병으로만 꽉 채운 백인대 하나를 해적 마을 입구에 배치한 후 게스티 백작군의 완전한 철수를 기다렸다.
그 동안 전투함 3척은 포구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목에 자리잡고 언제라도 게스티 백작의 전투함을 공격할 준비를 해 두었다.
만약 우발적으로 전투가 벌어져도 우리가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도록 미리 위치를 잡고 발리스타와 용병도 대기시켜 두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준비가 무색하게 게스티 백작은 해적 마을에 있던 병사들이 모두 배에 귀환하자, 해적을 추적하러 갔다던 병사들을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출발해 버렸다.
기사와 선원 몇 명을 해적 소유였던 상선으로 옮겨 태운 후 게스티 백작의 전투함 두 척이 나란히 꼬리를 물며 포구를 떠나 밖으로 향한 것이다.
게스티 백작의 전투함이 모두 떠나자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는 눈이 없으니 일 하기에도 편하다.
나는 용병들과 함께 해적마을을 뒤졌다.
이미 두 군데의 해적마을을 토벌하면서 해적마을의 생리에 대해 어느 정도는 파악한 후였다.
나와 함께 움직였던 용병들 역시 무엇을 해야 할지 경험을 통해 배운 병사들이었다.
우리는 집의 뒤편이나 마당 한 쪽 구석에 파놓은 지하실을 먼저 찾았다.
조심스럽게 숨겨져 있기는 하지만 위치가 빤한 데다가 어떤 식으로든지 티가 나기 때문에 금방 입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입구 위를 막고 있던 뚜껑을 열면 사람 몇 명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구덩이가 나온다.
비밀 창고 역할을 하는 곳이다.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식량이고, 무기와 금전 역시 한 쪽에 고이 모셔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밖에도 포목이나 금속괴, 장신구 같은 가치있는 물건들이 있기도 했다.
용병들은 집집마다 지하창고에 있는 모든 것들을 끄집어 내서 전투함으로 옮겼다.
이렇게 찾아낸 전리품의 절반은 용병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다들 사기가 엄청나게 올랐다.
생각보다 물량도 많고 게스티 백작의 전투함도 떠났기에 백인대 하나를 더 전리품 운반에 투입했다.
그리고 나는 십인대 두 개를 데리고 해적들의 집을 차근차근 뒤지기 시작했다.
해적 마을의 우두머리가 기거했을 법한 가장 크고 그럴 듯한 곳이 시작이었다.
마루 밑, 벽, 가구 내부 등 문서나 귀중품을 숨길 만한 곳을 위주로 아예 집을 부숴버리면서까지 뒤진 결과 보석과 금화, 반지, 목걸이 같은 귀중품은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내가 원한 편지나 계약서 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중요한 문서는 도망칠 때 챙겨서 간 모양이다.
이러면 도망친 해적들을 쫓아서 산까지 가야 하는데······
별로 내키는 일은 아니다.
미니맵이 있다고는 하지만 산을 뒤지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
게스티 백작이 돌아갔으니 나도 어서 돌아가서 상대할 준비를 해야 하는데 여기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곤란하다.
게스티 백작이 해적 마을과 손잡았다는 증거를 찾을 수만 있다면 시간을 좀 쓰는 것도 나쁘지는 않는데, 이 해적놈들이 한없이 도망치기 시작하면 시간 낭비가 되어 버리니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내가 결정을 못 내리고 망설이는 동안 시간이 꽤 흘렀다.
게스티 백작이 폭죽 신호를 올리고 떠나간 지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해적 마을을 뒤지고 가치있는 것을 배로 나르던 용병들의 작업도 끝나갈 무렵 게스티 백작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해적 마을에서 도망친 자들을 쫓아 산으로 갔다던 병사들이었다.
그 모습을 본 내 휘하의 용병들이 모여들어서 일단 전투 대기를 하는 동안 게스티 백작의 병사들이 해적 마을로 다가왔다.
한바탕 격전을 치른 모양새였다.
지운다고 지웠을 텐데도 갑옷이나 무기에 피가 잔뜩 묻어 있는 것을 숨기지 못하고 우리에게 다 보여주고 있었다.
부상자도 드물지 않게 보이고, 갑옷과 무기까지 따로 들고 오는 것을 보면 사망자도 꽤나 난 모양이었다.
그들은 게스티 백작이 이미 떠나서 없고, 해적 마을에는 낯선 병력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자 더 이상 접근하지 못했다.
보아하니 사정은 뻔했다.
죽여서 입을 막은 것이다.
원래는 해적마을의 사람들을 감시할 겸 산에 만들어놓은 피난처로 함께 이동했지만 폭죽 신호를 보고 해적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음이 틀림없다.
해적들도 일부는 같이 있었을 테니 저항은 격렬했을 것이고 병사들 역시 만만치 않게 피해를 입은 결과가 저 꼴이다.
서로 대치하는 동안 게스티 백작이 상선에 남겨놓은 기사와 선원이 도착했다.
항해사와 함께 온 게스티 백작의 기사는 내게 뒤늦게 귀환한 게스티 백작의 병사들을 데리고 떠날 수 있기를 원했다.
해적들의 기습으로 피해가 컸다면서 후퇴하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
눈가리고 아웅하는 짓이지만 일단 그의 요청에 따라 주기로 했다.
그들이 떠난 후 나는 몇 명의 병사와 함께 산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이동한 흔적을 따라 한참을 이동하니 산의 그늘로 교묘하게 가려져서 아래에서는 잘 안보이지만 해적마을과 그 앞의 포구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도착했다.
버스도 3대는 나란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동굴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동굴에서 피가 개울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굴 내부가 어떤 꼴일지는 보지 않아도 알겠다.
나는 인상을 쓰며 동굴 내부로 들어갔다.
따라온 용병들 역시 다급하게 횃불을 만들어서 들고 따라붙었다.
동굴은 그다지 깊지 않았다.
30미터가 조금 넘는 정도.
밖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크게 어둡지도 않았다.
동굴에 남은 흔적을 보니 원래 있던 동굴을 더 파서 규모를 키운 모양이다.
역시 이곳은 만약을 대비한 피난처였던 모양이다.
동굴 입구부터 드문드문 쓰러져 있던 시체는 동굴 가운데부터 확 늘어나다가 동굴 끝부분에서는 바닥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겹겹이 쌓여 있었다.
둥굴 중간까지는 젊은 남자들이 주로 죽어있었지만 동굴 끝에는 여자와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들을 더 불러와. 여기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남작님, 그런데······ 어······ 이 자들은 해적입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해적은 바다에 물고기밥으로 던져버리지 따로 무덤을 만들어주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내 지시를 받은 하사관 용병이 머뭇거리면서도 반대의사를 밝혀왔다.
바다의 암묵적인 관습에 대한 조언이었다.
아! 그렇지. 예전의 실수를 반복할 뻔했다.
귀족이니까 자비로운 것은 괜찮지만 물러터진 것으로 보이면 안 된다.
“산짐승들이 사람고기맛을 보면 다음부터는 사람만 노린다는 말이 있네. 그리고 여기를 정리하면서 찾아야 할 것이 있어.”
“과연. 듣던대로 현명하시군요.”
용병은 내게 경의를 표하고 곧장 움직였다.
수십 명이 한꺼번에 움직이자 정리도 수색도 금방이었다.
덕분에 나는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동굴 끝까지 밀렸던 장년의 남자가 배아래에 깔고 죽은 돌 밑에서 나온 문서였다.
해적선을 누가 주선해 주었는지
해적질을 할 때 누가 정보를 주었는지
장물은 누가 처분했는지
자필 서명과 함께 주고 받은 편지에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게스티 백작은 자신의 서명에 대한 값을 치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