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82화 (82/248)
  • 82. 게스티 백작의 실수

    선제후 지슬리 공작은 4강 2중 2약의 선제후 중 2중에 해당하는 자다.

    글렌 공작과 같은 급이라고 보면 된다.

    황제가 되어본 적은 없지만 제국의 일각을 차지해온 강력한 귀족 가문의 대표다.

    게다가 지슬리 공작가는 돈도 많다.

    제국 서북부의 산악지대에 광대한 공작령을 가지고 있는데, 그곳에는 철과 구리를 캐낼 수 있는 거대한 노천광이 있다고 한다.

    따로 갱도를 팔 필요도 없고, 지하 깊숙한 곳에서 광석을 밖으로 나를 일도 없이 그냥 땅위에서 삽으로 푸면 그만이다.

    그곳에는 심지어 금광도 있다고 한다.

    칼마르 백작가는 자신의 영역에서 암염을 캘 수 있는 거대한 암염광산 지대가 있다는 것만으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권을 만들어냈다. 암염이 현금 취급을 받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슬리 공작가는 현금 그 자체인 금을 캘 수 있는 광산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금을 캘 때는 은도 같이 나온다.

    그 가능성을 생각해 보면 아직 황제를 배출하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다.

    물론 공작령의 대부분이 산지라서 인구수가 적고, 광산 이외에는 봐 줄만한 산업이 없어서 전체적으로 따지면 글렌 공작가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있다.

    그래도 같은 급으로 취급되는 글렌 공작가와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의 부를 쌓아 놓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 자들이 제국 남부와 동부를 아우르는 해상 교역망에 관심을 가지고 끼어들려는 참이다.

    게스티 백작은 전권을 갖고 대표로 나선 것일테고.

    물론 지슬리 공작이 직접 나선 것은 아니니 게스티 백작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에는 한계가 그어져 있을 것이다.

    해적을 갖고 장난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고.

    그래서 내게 아직 기회가 남아 있는 것이다.

    한 손으로는 돈으로 상업도시들을 어르고, 다른 손으로는 해적으로 상업도시들을 협박했으면 내가 손을 쓸 여지가 없었을 거다.

    원래 해상 교역로의 터줏대감은 칼마르를 필두로 하는 상업 도시들의 느슨한 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혼자 앞에 나섰다가 손해를 뒤집어쓰기 싫어서 몸을 사렸고, 한편으로는 다른 도시들의 눈치를 봐서 비슷하게 보조를 맞추기 위해 튀지 않았던 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렇게 대놓고 해상 교역망에 수저를 올리려들면 내 것에 손대지 말라며 튀어 나올 도시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당장 칼마르부터가 튀어나왔지 않은가 말이다.

    튀어나왔으니 총대를 메야지.

    그럴 생각으로 나서기도 했고.

    해상 교역로의 정상화가 목표다.

    해상 교역로를 정상화시키는 순서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제일 먼저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해적들을 쓸어버린 후 게스티 백작에게 도움이 될 만한 세력을 주저앉혀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게스티 백작의 세력을 꺾어 버리면 된다.

    배와 선원을 상실하면 다시 복구하는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산에서 놀던 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첫 단계의 해적들을 쓸어버리는 것이 두 번째 단계의 게스티 백작에게 도움이 될 만한 세력을 없애는 것과 같은 일이 되어 버린 모양이다.

    “헬문트 경.”

    “예. 남작님.”

    “난 게스티 백작이 사면장을 들고 해적들과 협상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저 해적들과 게스티 백작이 실은 처음부터 한 통속이 아니었을까? 해적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게스티 백작이 후원자가 되어 준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해적 마을 두 개를 토벌하는 동안 후원자의 이름으로 게스티 백작이 언급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심하는 마음도 한 켠에는 있었습니다. 게스티 백작이 이상한 짓을 하기는 해도 아직 선을 넘지는 않았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 눈 앞의 해적 마을을 보니 내 의심이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눈은 해적 마을의 앞바다에서 선제후 지슬리 공작의 깃발을 날리며 정박해 있는 두 척의 전투함에 박혀 있었다.

    전투함 사이에는 해적선으로 쓰였음이 분명한 상선 하나가 파도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해적마을 가까이 접근한 후 작은 배를 내려서 선착장에 접안했다.

    선착장에는 한 무리의 병사들이 우리를 향해 긴장된 표정으로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들 뒤쪽으로 귀족으로 보이는 자가 옆에 있는 기사와 이야기를 하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디에도 전투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 꼴을 보니 내 의심에 확신을 더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선착장에 오르자마자 내 신분을 밝히고 이곳의 책임자에게 나를 안내하라고 명령했다.

    병사들은 생각보다 고위인사가 나타나서 당황했는지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나를 그들 뒤에 있던 귀족에게 데려갔다.

    그 귀족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나를 안내한 병사의 보고가 끝나자마자 내게 인사를 건넸다.

    “윌리엄 경! 반갑소. 소문처럼 엄청난 괴물로 보이지는 않는데? 나는 선제후 지슬리 공작께 봉사하는 백작 게스티라고 하네. 해적을 토벌하는 중이었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군 그래.”

    나는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했다.

    “토벌한 해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해적들이 마을을 옮긴 모양일세. 돼지우리같은 움집이지만 깔끔하게 비워버렸더군. 몇 명 남은 자들은 있었는데 우리 전투함이 포구로 들어오니까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가 버렸어. 사람을 보내서 추적 중이지만 원체 짐승같은 놈들이라서 별로 기대는 하지 않고 있다네.”

    게스티 백작은 무례하게 보였을 내 태도에도 불구하고 별로 기분이 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대답을 들으며 해적 마을을 시선에 담았다.

    이 해적 마을 역시 지금까지 우리가 토벌하고 불태워버린 마을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었다.

    겉으로 보면 평범한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에는 급하게 마을을 떠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가재도구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는지 살림살이의 대부분이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심지어 그물이나 괭이 같이 어촌 마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도구까지 마당에 널브러진 채였다.

    사람만 피한 거였다.

    금방 돌아올 생각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조금 챙겨서 급하게 마을을 떠난 것이 틀림없다.

    그들의 흔적은 마을 뒤의 산으로 향하는 길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역시 이 해적 마을은 게스티 백작과 한 배를 타고 있는 마을인 모양이다.

    처음부터 후원을 받고 있던 사이인지 아니면 중간에 사면령을 미끼로 끌어들인 것인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같은 편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게스티 백작은 이 모든 것을 숨길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싱글거리며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반응해 주었다.

    “추적을 도와드리지요.”

    “추적?”

    “해적들이 급하게 도망치느라고 온갖 흔적을 다 남기면서 갔군요. 추적해서 쓸어버려야겠습니다. 내 병사들은 숲에서 싸우는 것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습니다. 산으로 올라간 해적 따위는 별 것 아닙니다.”

    그러나 내 반응은 그가 원하던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게스티 백작은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내며 제안을 거부했다.

    “아니, 그럴 필요없네. 우리 병사들도 믿을 만해. 게다가 나는 공적이 필요하다네. 지슬리 공작 각하께 보고드릴만한 실적이 필요해서 말이지. 윌리엄 경의 호의는 기억만 해 두겠네.”

    “아니요. 나는 추적을 해야겠습니다. 마을 꼴을 보니 해적과 한패인 자가 미리 경고를 한 것으로 보여서 말입니다. 멀리 가지 못한 것 같으니 해적을 잡아다가 누가 위험을 알려줬는지 신문을 해야 겠습니다.”

    나는 게스티 백작의 눈을 노려보았다.

    해적에게 경고한 것이 당신 아니냐는 내 태도를 본 게스티 백작은 그제서야 내 반응에 만족한듯 했다.

    “그래? 용감하군. 소문대로 미친 것 같은 면도 있고. 내 앞에서 대놓고 그렇게 말하다니 죽여달라는 요구인가? 이 봐. 착각하지 마. 자네는 칼마르의 백작이 아니야. 나 같은 고위 귀족의 눈에는 벼락 출세한 애송이에 지나지 않지. 언제든지 눌러 죽일 수 있는. 그래도 고개를 쳐 들었다고 죽이는 것은 지나친 것 같으니 무장을 해제해서 보내주는 것으로 하지.”

    그리고 게스티 백작은 자신의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저 자의 칼을 빼앗고 돌려 보내”

    게스티 백작의 의도는 명백했다.

    내 기세를 꺾고 모욕을 가해서 내 지휘권을, 그리고 칼마르의 주도권을 약화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간단히 될까?

    게스티 백작의 주위에는 4명의 기사가 있었다.

    그들 중 2명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내 허리의 칼을 압수하겠다고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나를 향해 손을 뻗은 게스티 백작의 기사의 팔뚝을 잡았다.

    그리고 확 당기며 무릎으로 옆구리를 가격했다.

    갈빗대가 부러지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두 개쯤.

    내게 팔을 뻗었던 기사는 무릎을 꿇었다가 옆으로 넘어가며 의식을 잃었다.

    쓰러진 기사의 옆에 있던 다른 기사는 다급하게 자신의 칼을 뽑으려고 했지만 너무 늦은 반응이었다.

    나는 이미 그의 옆에 있었다.

    목 뒤와 허리를 잡고 위로 들어올렸다가 바닥에 집어던졌다.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지만 잠시 동안 일어나지 못할 정도는 되었다.

    무기도 뽑지 않고 맨 손으로 두 명의 기사를 처리하는 모습을 본 게스티 백작은 창백해진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남은 두 명의 기사는 다급하게 게스티 백작의 앞을 가로막으며 자신들의 칼을 뽑아 들었다.

    한 사람 앞에 세 사람.

    그러나 겁을 집어먹은 것은 세 사람이었다.

    게스티 백작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감히 죽고 싶은 것이냐?”

    나는 당장이라도 격전에 돌입할 것 같은 내 부하들에게 진정하라는 손짓을 하며 게스티 백작에게 경고했다.

    “게스티 백작 각하. 누구라도 무기만 있다면 평범한 병사 정도는 죽일 수 있습니다. 실력이 뛰어나다면 기사도 죽일 수 있지요. 그러나 귀족을 죽이는 것은 실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실력과 동시에 나를 도구로 쓰는 사람이 귀족 살해라는 정치적인 반동까지도 무마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점에서 나는 게스티 백작 각하를 죽이는 데에 있어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죽여야 한다면 망설임없이 죽일 겁니다. 그런데 게스티 백작 각하는 나를 죽일 수 있습니까? 칼마르 백작의 약혼자를? 나를 죽이면 게스티 백작 각하의 목도 위험해지는 것 아닙니까? 과연 지슬리 공작 각하가 귀하의 목을 지키기 위해 칼마르 백작 각하와 각을 세울 수 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게스티 백작 각하.”

    마지막에는 비웃는 티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나 게스티 백작은 이빨을 갈면서도 내 도발을 참아냈다.

    그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기분 같아서는 다 때려치고 배와 함께 귀환하고 싶겠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나.

    그는 마을 뒷산에 숨어있는 해적 마을의 주민들을 챙겨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확보한 해적들이 그의 명령을 들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게스티 백작은 결정해야 했다.

    싸울 것인지 물러날 것인지.

    나는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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