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해적 토벌
해적은 인류가 배를 이용하여 교역을 하는 순간부터 발생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배로 나를 수 있는 막대한 물품의 양은 다른 이송 수단과는 궤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교역을 위해 물품을 싣고 가는 상선 한 척만 털어 먹어도 마을 하나가 몇 년을 풍족하게 지낼 수 있다.
만약 개인이 그 재물을 독차지한다면 몇 대를 내려오는 부잣집 재산을 통째로 챙긴 것이나 다름없다.
앞으로 손자에 증손자까지도 돈 걱정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능력만 된다면 보복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해적질에 나설 사람을 어디서나 찾을 수 있다.
멀쩡한 상선이 해적질을 하고 입을 싹 닦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상선이 곧 해적선이고, 선원이나 해적이나 다를 것 없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만약 해적이 생각을 바꿔먹게 되면 어떻게 될까?
어떤 세력의 합법적인 함대가 된다면?
갑자기 해전에 능숙한 함대가 짠 하고 나타나는 것이다.
순스발의 시장인 헬문트 역시 이런 사정을 강조했다.
그는 현재의 해상 교역로가 약해진 것도, 해적이 날뛰는 것도 사실이지만 진짜 문제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고 했다.
“상선은 많은 물품을 싣고 다니기 때문에 상선에 타고 있는 사람은 선원이든 용병이든 상인이든 할 것 없이 모두 싸울 줄 압니다. 싸울 줄 모르는 자는 아예 태우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상선을 약탈한다는 것은 절대 만만하지 않지요. 게다가 산적은 맨몸에 몽둥이 하나 들고 나서면 그만입니다만 해적이 되고 싶다면 배부터 먼저 구해야 합니다. 그것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고깃배가 아니라 상선에 비빌 정도로 큰 배를 말입니다.”
전직 산적으로 단언하건대 산적이 맨몸에 몽둥이를 들고 영업한다는 폄하는 사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다.
산적도 나름 준비할 것도 많고 위험한 일도 많이 겪는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해적이 산적보다 진입장벽이 높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배를 구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순스발의 시장 헬문트는 기사였다는 전직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다.
나와 만나서 인사를 나눈 후부터 순스발의 역사에서부터 산업 전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 시장은 해적 토벌에 대한 이야기까지 쉬지 않았다.
마치 신입에게 급하게 인수인계를 해야하는 이직자의 느낌이랄까.
아무리 순스발과 칼마르가 남이 아니라지만 속에 있는 이야기를 서슴치 않고 꺼냈다.
“그래서 해적 뒤에 후원자가 붙어 있는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해적선으로 쓸만한 큰 배는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심지어 어떤 후원자가 붙어 있느냐에 따라 토벌 순서가 정해져 있다는 말도 있을 정도지요. 해상교역로를 이용하는 상업도시들 역시 어느 마을이 해적 마을이고 어디에 해적선이 있는지 대충은 짐작합니다. 단지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토벌 시기와 규모를 결정하는 것뿐입니다. 해적 토벌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니까요. 얼마 전까지는 별문제 없이 잘 돌아가던 합의였습니다만, 지금은 해적과 우리 사이의 균형이 비틀리고 있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해적의 규모가 커진 겁니까?”
내 질문에 순스발의 시장 헬문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책을 가져 왔다.
지도책의 몇 군데에는 미리 표시해둔 색종이가 붙어 있었다.
그는 내 앞에 지도책을 펼치며 미리 표시해둔 몇 군데를 짚었다.
“해적의 규모는 변함없습니다. 여기 표시해 둔 지역이 현재 해적 마을로 활동하는 곳 전부입니다. 이들 3곳 외에는 해적 마을이라고 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이들을 다 합치면 상업도시 하나는 충분히 약탈할 정도의 세력이지만 자기들끼리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별 문제는 없습니다.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곳은 토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규모가 작은 곳이겠지요.”
“그렇다면 균형이 넘어가려 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내 질문에 헬문트는 간신히 평정을 유지했다.
그는 분노를 억누르고 지도에 있는 게스티 백작령을 손가락으로 내리 찍으며 내게 으르렁댔다.
“게스티 백작이 해적들을 자신의 해군에 끌어들이려는 수작을 벌이고 있습니다. 선제후 지슬리 공작이 발행한 사면장을 들고 협상을 벌인다는 소문입니다.”
“아니, 누구 멋대로 사면을 하겠다는 겁니까? 그리고 자기들끼리 사면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겠습니까? 당장 우리부터가 그따위 헛짓거리는 때려치우라고 할 텐데요?”
내가 같이 화를 내자 헬문트는 속이 좀 풀렸는지 전보다는 덜 으르렁거렸다.
그는 주변에서 누가 듣는 것을 걱정이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만약 게스티 백작이 바다에서 압도적인 힘을 가진다면 그 자가 어떤 헛짓거리를 해도 우리는 뭐라고 말하지 못할 겁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
“우리와 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는 사람의 말을 건너건너 듣기로는 해적을 명분 삼아서 안전 통행증을 발행하고 안전 통행증이 있는 상선만 보호한다는 말이 있답니다. 안전 통행증의 가격도 제법 비쌀 거라고 하더군요. 그 돈이 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해군은 오직 돈으로만 굴러간다고 들었습니다. 용병을 유지하는 것에도 많은 돈이 들지만 해군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이 든다고 들었어요. 만약 그들의 계획대로만 된다면 게스티 백작의 함대의 규모가 우리만으로는 도저히 감당 못할 정도로 늘어나겠군요. 그리고 안전 통행증이 없는 상선은 약탈 당할 것이고.”
“그렇습니다. 남작님. 안전 통행증이 없다면 약탈 당할 가능성이 많이 올라갈 겁니다. 어쩌면 바다에서 해적과 맞부딪히는 것보다 게스티 백작의 함대와 조우하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건 해적을 핑계로 새로운 세금을 걷는 것이다.
세금을 안 내면 약탈을 하고.
땅에서 소작인들에게 대놓고 하는 것을 바다에서는 조금 더 세련되게 그리고 잔혹하게 하는 것 뿐이다.
그렇게 세금을 걷어서 일부는 자신의 함대에 편입된 해적에게 주고 나머지로는 자신의 함대를 강화하겠다는 속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저런 제안에 응할 리가 있나?
우리는 무기를 들고 있다.
부당한 대우를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는 소작인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해상교역로의 상업도시들이 호구잡힐 일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정상적인 경우라면 그렇습니다만.”
“문제가 있는 겁니까?”
“다들 손해를 보기 싫어서 미적거립니다. 해적을 토벌해 놓아야 게스티 백작의 시도에 저항을 할 수 있는데 서로 눈치를 보면서 병사도 함선도 움켜쥐고 내놓지를 않습니다. 아무래도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니까요.”
아니, 이건 무슨 병신같은 상황이야.
모두가 공짜로 이용하고 있던 해상 교역로를 엉뚱한 놈이 와서 차지하고 앞으로는 사용료를 내고 이용하라고 할 판인데 지금 당장 나갈 돈이 무서워서 몸을 사린다고?
“손해를 보기 싫은 겁니까? 아니면 손해를 볼 여력이 없는 겁니까?”
“명색이 교역으로 먹고 산다는 도시들인데 그 정도 여력이 없겠습니까? 뭐, 영지전에 휘말린 몇몇 도시나 징발이 있었던 도시는 실제로 여력이 없는 모양입니다만, 그 외의 도시들은 충분히 병력을 내놓을만한 여유가 있음에도 그렇습니다.”
“아니, 왜 다들 그런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하는 겁니까?”
헬문트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문제가 생긴 곳에서 언제나 듣는 내용이 그의 입에서도 언급됐다.
“황제께서 궐위한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황제의 칙령에 따라 이루어져야 할 해적토벌이 없어진 지 10년이라는 소리입니다. 게다가 칼마르에서도 해상 교역로를 최근 2년 가까이 방치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 전에도 그리 적극적으로 관리한 것은 아니었지요.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계속되어온 해상교역로의 쇠퇴를 보고 있습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지요. 해상교역로를 관리하는 주체없이 이렇게 해적이 날뛰다가는 해상 교역로가 아예 붕괴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겁니다. 해상 교역로가 붕괴하면 교역으로 먹고사는 도시는 망합니다. 거기에 기대어 목에 힘주고 살던 자들도 다 파산이에요. 그래서 게스티 백작이 나서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축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슬리 공작 파벌에 속하는 몇몇 상업도시들이 그런 분위기로 몰아가는 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들에게 게스티 백작은 같은 파벌의 귀족이니까요.”
“게스티 백작을 믿는다고요? 해적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을? 다들 목줄이 잡혀서 질질 끌려다니면서 돈과 사람을 뜯겨봐야 정신을 차리겠군요. 칼마르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받아 들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분명히 단언합니다만 나는 게스티 백작이 칼마르의 해상 교역로를 틀어쥐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해상교역로가 쇠퇴하면 칼마르도 같이 쇠락합니다. 절대로 현재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말라 죽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나섭시다.”
내 말에 헬문트는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기대 이상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금방 미소가 떠올랐다.
“과연, 결정권을 가진 높으신 분이 오니까 단번에 정리가 되는군요. 남작님 같으신 분이 칼마르에 계신 것이 우리 모두에게 행운인듯싶습니다. 이제 남작님께서 게스티 백작만 잘 처리하신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자는 분명히 우리가 해적을 토벌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할 테니까요. 보나마나 또 끼어들어서 토벌 일정을 엉망으로 만들 겁니다. 함부로 우리에게 참견하지 못하도록 남작님이 적당히 눌러 놓으시면 됩니다.”
“그런데 토벌 말입니다. 게스티 백작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
“병력만 충분하다면 우리끼리 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내 말에 이번 해적 토벌의 대강이 정해졌다.
적의 소굴을 빠르게 치고 빠진다.
순스발에는 이미 여러 대의 전투함이 대기 중이었다.
전투함에 승선할 선원과 노잡이꾼까지 충분했다.
부족한 것은 전투원 뿐이었다.
그래서 4척으로 이루어진 해적토벌 함대의 첫 목적지는 다리클리프였다.
다리클리프에서 모병해 놓은 용병을 태우고 그대로 해적 마을로 직진해서 습격할 작정이었다.
나는 2백명의 용병을 배에 태우자마자 곧장 해적 마을로 향했다.
해적과 바다 위에서 싸울 생각은 지도를 본 순간 아예 계획 밖으로 밀어버렸다.
그런 효율성 떨어지는 일을 왜 하나?
본거지를 박살내면 되지.
따로 지도상에 표시놓았을 정도로 잘 나가는 해적마을을 차례로 불에 태워 버릴 생각이다.
해적 마을은 마을 전체가 해적질로 먹고 사는 마을을 의미한다.
몇 년 지나지 않아서 토벌되거나 마을을 옮기거나 둘 중의 하나로 귀결되기는 하지만 그 전까지는 토벌을 노리는 근처 귀족들이 지도에 따로 표시해 놓을 정도로 주변에 해악을 끼치며 살아가는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이들을 토벌하려는 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상인이나 귀족 중에는 이들에게서 상납을 받으며 토벌을 미리 알려주기도 하고 약탈품의 판매를 중개하는 자도 있다.
해적질이라는 것, 알고보면 상당한 규모의 산업이기도 하다.
우리가 전투함을 4척이나 끌고 순스발을 떠난 것은 금방 주변에 알려졌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관행상 설마 우리끼리만 해적 토벌을 갔겠느냐며 방심하는 자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내 의도를 눈치채고 해적 마을에 경고를 하러 사람을 보내는 자도 분명히 나온다.
그래서 속도가 중요했다.
토벌을 의심한 전령이 도착하기 전에 해적마을을 덮쳐야 했다.
다행히 바람이 우리편을 들어준 덕분에 기대보다 더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때 해적 마을은 평범한 어촌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크기가 제법 되어보이는 상선 하나가 가까운 바다에 정박하고 있다든가, 경계를 서는 보초가 몇 있다든가 하는 점이 평범한 어촌과는 다른 작은 차이점이었다.
그리고 그 정도 차이는 방어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다리클리프에서 모집한 용병이 얼마나 실력이 괜찮은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졸고 있던 보초는 금방 멱이 따였고, 마을에 불을 놓을 때까지도 눈치챈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뒤늦게 화광을 보고 튀어나왔던 해적들은 자신들의 등을 찌르는 칼에 전의를 잃고 순순히 밧줄에 묶였다.
해적 마을이다.
가족과 함께 있으니 해적들 입장에서도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싸울 수는 없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쪽 피해는 거의 없을 정도였다.
해적선으로 쓰던 상선은 덤이었다.
그렇게 2개의 마을을 정리하고 3번째 마을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낯선 깃발과 맞부딛쳤다.
배와 수레, 그리고 울부짖는 곰.
그림으로만 본 선제후 지슬리 공작의 깃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