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80화 (80/248)

80. 다리클리프에서 생긴 일

다리클리프는 한 개의 길고 커다란 섬과 두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작은 나라다.

구태여 ‘작은’ 나라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이 섬나라의 국력이라는 것이 평범한 백작령에도 못 미칠 정도로 약소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나라가 아닌 것이다.

대신 위치는 괜찮아서 배로 교역하는 상단이 중간에 들러서 물과 식량을 보충하기도 하고 폭풍우가 칠 때에는 대피하기도 하는 등 해상교역로의 유지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섬 자체의 경제력은 검소하게 살면 그럭저럭 자급자족이 가능한 정도다. 대신 그 이상을 원한다면 외부에서 가져와야 한다.

그래서 섬의 남자들은 선원이나 용병으로 외부의 상단에 고용되어 젊은 시절을 보내고 돌아오는 것이 흔한 일이라고 한다.

지금 내 앞에서 다리클래프에서의 용병 계약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사람 역시 한창 때는 칼마르와 다른 자유 도시를 잇는 해상교역로에서 선장으로 종사했다고 한다.

그 때에 맺어진 인연으로 현재는 다리클래프에서 칼마르의 현지 협력자 즉 지부장 정도의 위치에서 일하는 중이다.

“연락을 받고 일단 연통부터 돌렸습니다. 다행히 최근에 귀향한 사람들이 많아서 용병의 고용에 대한 건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이번 전투는 많이 위험할 겁니다. 대신 계약은 1년으로 잡았습니다.”

“계약 기간이 1년인 것은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고 해적 토벌은 어차피 다들 예상하던 일이었습니다. 아마 조만간 시작되지 않겠느냐는 예측들을 하고 있었지요.”

칼마르가 해상교역로에서 차지하는 지분을 알게 된 뒤로는 바다에서 상선을 몰던 사람들이 꽤나 곤란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마르는 전대 백작이 사고로 죽고 내부적으로 수습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움직였다.

그 결과 해적은 점점 대놓고 날뛰기 시작했고, 그만큼 해상교역로가 위험해졌다.

이제는 동맹도시에서 강하게 지원을 요구하는 상황까지 되어버렸다.

칼마르의 행보가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던 것이 이해 안가는 것은 아니다.

칼마르의 기본 정책이 황제가 다시 옹립될 때까지 최대한 현상유지를 하면서 버틴다였으니까.

그리고 사실 해상교역로의 문제는 황제가 해결할 문제이기도 했다.

새로운 황제만 옹립되면 해상교역로에서 약탈을 일삼는 해적 따위는 더 이상 날뛰기 어렵게 된다.

해적의 배경이 되어주던 귀족이 손절을 하든 직접 해적을 담그든지 해서 더는 큰 해적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욕심을 못 참고 계속 해적을 부린다면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목을 매달러 온 황제의 군대를 보게 될 것이다.

증인과 증거를 손에 쥔 황제가 자신의 권위와 금고를 채울 기회를 마다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황제가 없다는 것.

가까운 시일 내에도 황제는 없을 것 같다는 점이다.

일을 해야 할 귀족들이 손을 놓아버린 동안 해적이 너무 날뛰며 세를 불렸다.

이제는 자유 도시 몇 개가 연합해서 상대해야 할 정도다.

칼마르가 아주 늦지는 않게 달려온 것이다.

“우리는 사실상 이미 몇 년전부터 해적과 다투고 있었습니다. 섬사람들이 고용된 상선들이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공격받고 있었으니까요. 최근 1년 사이에는 상선을 타는 것이 너무 위험해졌다고 상단과의 재계약을 거부하고 섬으로 돌아온 녀석들도 제법 됩니다. 제가 연통을 돌리니까 하는 말들이 이제서야 해적 토벌에 나선다고 조금 늦은 감이 있다고들 합니다.”

“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백작령 주변을 정리하다 보니까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부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칼마르 백작령의 귀족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제가 볼 때 백작령의 귀족들은 너무 몸을 사립니다. 태생이 장사꾼들이라서 다들 너무 조심스럽습니다. 치고 나가야 할 때는 과감하게 치고 나가야 하는 법인데 말입니다. 그나마 남작님이 백작가의 일원이 된 후로는 조금 상황이 나아진 것 같더군요.”

“?”

“바닷길도 길이고 어떤 때는 육지보다 더 빠르게 사람과 소식이 오고 갑니다. 저도 듣는 귀가 있으니 백작가의 사정이 어떻다는 것은 압니다. 선대 백작님을 황망하게 잃어서인지 백작가의 가신들은 리네아 백작님을 너무 감싸고 도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해는 갑니다. 숙청을 끝내기 전까지는 그곳의 유력자들도 믿기 어려웠을 테니까요. 그래도 진작에 누군가가 칼마르 백작가의 권위를 어깨에 짊어지고 앞에 나서야 했습니다. 남작님은 지금 잘 하고 계십니다.”

외부에서의 평가를 이렇게 들으니 신선하기는 하다.

생각해보면 이전 생에서의 칼마르는 수적과 산적에게 시달리며 몇 년을 수세 일변도로 보냈다.

결국 리네아 여백작이 직접 갑옷을 걸치고 병력을 이끈 후에야 제대로 토벌이 이루어졌었다.

그렇다면 당시에 이 해상교역로는 아주 박살이 났었겠다.

육상 교역로에는 도적들이 날뛰고 해상교역로에는 해적들이 날뛰는 상황인 것이다.

어쩌면 이대로 계속 웅크리고 있다가는 칼마르가 말라죽겠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리네아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젊은 시의회의 의원이 활약할 공간이 생긴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너무 늦지 않았다니 다행입니다. 지부장.”

“정말 다행이지요. 사실 걱정을 좀 하고 있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끼리라도 해적 토벌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논이 돌고 있었으니까요. 아! 참. 남작님은 갑옷 어떻게 하실 겁니까?”

“가죽 갑옷을 가져왔습니다. 철로 된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갑옷을 입고 바다에 빠지면 무조건 죽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철이든 가죽이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부장은 자신이 걸치고 있는 갑옷을 톡톡 두드렸다.

나무 소리가 났다.

“이거 나무로 만든 것입니까?”

“다리클리프가 만드는 몇 안 되는 상품 중 하나지요. 방어력은 가죽 갑옷보다 훨씬 낫습니다. 보시다시피 만듦새도 괜찮아서 입고 벗기도 편합니다. 무엇보다 바다에 빠졌을 때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도 바다에 떠 있을 수가 있습니다. 유일한 단점이 있다면 불에 약하다는 것인데 사방이 물인 곳에서 입는 것이니 그 정도는 봐줄 만하지 않습니까?”

“괜찮군요.”

“같이 가시지요. 다리클리프산 갑옷 공방에 가서 남작님의 갑옷도 하나 맞추도록 하시지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현재 갑옷 재고는 저희가 모두 확보한 상태입니다. 장사해야지요.”

“그렇지요. 장사해야지요.”

나는 웃으면서 지부장과 함께 갑옷 공방으로 향했다.

이 사람은 칼마르 백작가 사람들이 장사꾼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눈치나 본다고 투덜대면서 자신도 장사꾼임을 숨기지 않는다.

어쩌면 익숙해지지 않는 이 중세 감성의 세상에서 그나마 자본주의자의 마인드가 장착된 소수의 사람들이 사는 곳이 칼마르라서 내가 이곳에 점점 애착을 느끼게 되는지 모르겠다.

갑옷 공방은 항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 구역에는 갑옷 공방뿐 아니라 대장간과 가죽 공방, 대목 공방, 소목 공방까지 각종 공방이 모여 있는 일종의 공장지역이었다.

그리고 나는 갑옷 공방 앞에서 시비를 걸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많은 갑옷이 있는데 팔 수가 없다고? 장난하나? 왜 팔 수가 없는데?”

“말 했잖아. 이미 다 계약이 되어 있는 물건이라고! 임자가 있는 물건을 어떻게 너희에게 파나?”

“감히 게스티 백작님의 주문을 거부한다고? 너희들 죽을래?”

“씨발. 니가 뭔데 나를 죽인다고 을러. 너야말로 물고기밥이라고 되고 싶은 거냐?”

협박을 하고 있는 선원들은 갖춰 입은 옷이나 무기가 평범한 선원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몇 명은 기사였고, 나머지 선원도 잘 훈련된 티가 났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에서 귀족으로 보이는 자와 여자도 한 명씩 있었다.

갑옷 공방 사람들은 상대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냥 보고도 알 수 있었지만 조금도 기세가 죽지 않았다.

오히려 장인 특유의 고집에 자극을 받은 듯 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칼을 뽑아들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고함을 치며 갑옷 장인들에게 다가갔다.

“내가 주문한 갑옷은 준비가 다 되었나?”

“내가 모시는 분일세.”

처음에는 이건 또 무슨 또라이가 나타난 것일까 싶었던 갑옷 장인들은 지부장이 나를 소개하자 금방 태도를 바꿨다.

그들은 이미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셨습니까! 남작님. 주문하신 갑옷은 완벽하게 준비해 놓았습니다.”

“곧 사람들을 보내서 인수해 가겠네. 그리고 추가로 좀 더 주문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가능한가?”

“인도할 때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지금 말리고 있는 갑옷들을 마무리 지으려면 아직 한달은 더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내가 인수하지.”

“감사합니다. 남작님.”

우리의 대화가 순식간에 거래완료로 진행되는 것을 보고 공방 사람들을 협박하던 선원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아니. 잠깐만. 당신 뭐하는 거요? 누구 멋대로 갑옷을 가져간다는 거야?”

대화에 끼어든 선원은 조금 더 생각해야 했다.

공방 사람들이 나를 남작님이라고 불렀던 것을.

그는 내게 좋은 시빗거리를 선사해 주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의 무례에 대해 갑질을 좀 하기로 했다.

“이 자들은 뭔가?”

“예약도 없이 갑자기 와서 갑옷을 내어놓으라고 떼를 쓰던 자들입니다.”

“제 정신인가? 갑자기 그러면 갑옷이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나? 아니, 그리고 여기 있는 갑옷은 모두 내가 주문한 것인데 감히 내 것에 손을 대려고 했다고?”

내가 말에 점점 화를 싣자 시비를 걸던 선원은 멈칫하고 근처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귀족을 상대로 계속 시비를 거는 것은 그도 내키지 않는 일일 것이다.

재수 없으면 없는 죄도 만들어서 뒤집어 쓰게 된다.

결국 뒤에 있는 귀족이 나설 수 밖에 없다.

“나는 게스티 백작님을 모시는 스콜비라고 하는 자요. 그대는 누구요?”

“게스티 백작? 아! 소문이 안 좋다는 그 사람.”

“이게 무슨 무례한, 컥!”

내 말에 화를 내며 내게 다가선 기사의 목이 내 손에 들어왔다.

목을 잡고 그대로 위로 들어올리니 대롱대며 발버둥을 치려고 해서 조금 더 세게 잡았더니 몸이 축 늘어졌다.

기절한 것이다.

차차창!

그 순간 스콜비와 함께 온 자들이 칼을 뽑아 들었다.

동시에 지부장 역시 내 옆에서 칼을 뽑았다.

“무슨 짓인가? 그분의 기사를 죽이다니! 게스티 백작님의 분노가 두렵지 않나?”

“죽긴 누가 죽었다는 건가? 기사답지 못하게 심약한 자가 기절을 한 것이지.”

나는 내 손에 잡혀 있던 기사를 그들 사이로 툭 던져 주었다.

“스콜비 경. 경은 내가 저들과 맺은 계약을 무시하고 내 물건을 가져가려고 했던 것에 대해 해명해야 할 거야.”

“누구십니까?”

“남작 윌리엄이다. 칼마르 백작의 약혼자이기도 하지.”

“아!”

“해명 기대하겠네.”

귀족의 해명이라는 것은 말로 때울 수 없는 법.

스콜비는 사죄의 의미로 나에게 선물을 해야 한다.

이렇게 나는 게스티 백작에게 간단한 인사를 보냈다.

어떤 식으로 답례가 올지 모르겠다.

스콜비는 내가 그들을 떠날 때까지 어떻게 하지를 못하고 망설였다.

게스티 백작이 걸리니 함부로 사과를 하지도 못하는 모양이다.

내가 그들을 떠나 용병사무실로 가려는데 갑자기 돌풍이 몰아쳤다.

모자를 가볍게 날릴 정도의 바람이었다.

이것은 신비다.

오르벤 강체술을 익힌 내 감각이 속삭였다.

나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멀리서 스콜비의 일행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신비를 접한 여자가 있었다.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신비였다.

자연과 교감하는 힘.

바람에 관한 것일까?

그녀는 내 시선을 느끼자 곧 고개를 수그렸다.

나를 둘러쌌던 바람도 사그러들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기로 했다.

*

용병 사무실에서는 그동안 모집한 용병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과연 설명만으로도 만족할 만한 수준의 용병들이었다.

다들 최소한 몇 년의 경력을 가진 능숙한 용병이자 선원들이었다.

지금 당장 구할 수 있는 인력으로 이정도의 질과 양을 만족할 수 있는 곳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해전 경험이 있는 용병은 귀하다.

칼마르 백작령이 다리클리프와 거래를 해 온 것도 몇 백년이나 된다고 한다. 상인들끼리의 거래가 언제나 그렇듯이 긴 세월만큼이나 온갖 사고가 터졌지만 칼마르 백작가의 계약은 언제나 지켜진다는 믿음이 있어서 그 드물다는 신용거래가 가능할 정도다.

칼마르가 급하게 용병 고용 계약을 제안했음에도 다리클리프의 섬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용병 모집에 응해 온 것은 칼마르와 다리클리프 사이에서 수백년간 쌓인 신뢰가 있기에 가능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최대한 병력을 충원해야 한다.

나는 지속적인 병력의 충원을 부탁했다.

다음 날 나는 먼저 순스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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