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78화 (78/248)

78. 해적 토벌의 요청

린드스톰과 옌센.

백작자문위원회의 대표와 시의회 의장이다.

그리고 둘 다 계승 남작 작위를 가지고 있는 귀족이기도 하다.

이들 둘은 가족과도 같은 가신들을 제외한다면 칼마르 백작령에서 리네아 여백작에게 가장 영향력이 강한 유력자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들은 리네아 여백작 뿐 아니라 칼마르 백작령의 다른 유력자들에게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도그럴것이 린드스톰은 수 대에 걸쳐 징세관으로 칼마르의 백작에게 봉사해온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의 가문은 시청과는 별개로 세리들을 고용하고 세금과 관련되는 업무라면 무엇이든지 다뤄왔다.

즉, 칼마르 백작의 금고를 채우고 지키는 일을 하는 가문의 대표가 린드스톰인 것이다.

그리고 옌센은 시의회 의장이면서 동시에 상단을 대표하고 있다.

배를 이용해 외국과도 거래를 할 정도로 규모가 큰 상단 뿐 아니라 마차 한두 대를 가지고 상단주가 직접 호위 용병 역할을 하며 상행을 하는 작은 상단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상업 도시 칼마르의 근본, 그 자체인 상단이 옌센의 권력 기반인 것이다.

이런 자들이니 귀가 어두울 수가 없다.

선제후의 측근에까지 협력자를 심어둔 칼마르 백작가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온갖 정보가 그들에게 모여든다.

과연 그들은 리네아 여백작으로부터 제국 해체라는 단어를 들었음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선제후 아르보그가 제국의 해체를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국이 분열하여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칼마르의 지원을 요구해 왔습니다.”

“거절하셨습니까?”

린드스톰은 태연한 얼굴로 오히려 리네아 여백작에게 질문을 했다.

제국 해체라는 말보다 칼마르의 대응이 더 중요하다는 태도였다.

옌센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린드스톰과 같은 의견인 모양이었다.

“당연히 거절했습니다. 중립으로 남아 있는 것은 칼마르의 생존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원칙입니다. 이런 중요한 문제를 내게 충성하는 귀족들과 의논하지도 않고 내 멋대로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무엇이든 결정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릅니다.”

옌센의 말은 그가 알고 있는 것이 더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좀 더 설명을 듣고 싶었다.

그것은 리네아 여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들은 제국 해체라는 말이 선제후의 입에서 나왔는데도 그다지 놀라지 않는군요. 혹시 내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옌센 경이 저보다 아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린드스톰의 양보로 옌센은 자신의 유능함을 어필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유능하다는 것을 주변이 알게 되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만약 통치자에게 유능한 관리로 인식된다면 야근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은 다 놀고 있는데 혼자 일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야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지옥과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통치자에게 유능한 정치인이나 귀족으로 인식되는 것은 통치의 동반자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서 가문의 존속이나 이익에 큰 도움이 된다.

옌센은 자신의 권력 기반이 상단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황제 궐위가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사실 제국이 분열되어 여러 개의 왕국으로 나누어지고 선제후는 왕이 된다는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심지어 황제 궐위 2년 차부터 떠돌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남의 일에 대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무책임하게 떠드는 수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같이 항로를 따라 제국 곳곳의 항구를 방문해야 하는 자들에게 제국 해체나 분열 같은 이야기는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항구의 술집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들고, 술이 들어간 입은 가볍게 열리니까요.”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그저 술자리의 안주 정도 되는 이야기였지요. 최근에 상황이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아직은 8개의 왕국보다는 하나의 제국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둘이 하는 말은 제국 분열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망상 같은 일이라서 지금까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제국이 망하고 왕국들이 제국의 시체에서 일어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칼마르는 왕국시대를 대비해야 합니다 라고 누군가가 말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반역이다! 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 돌았네 하고 의사에게 데려가는 상황이었던 거다.

그런데 선제후들 중의 하나, 그것도 강력한 4대 선제후 중의 하나가 제국 해체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망상 수준이 아닐 텐데?

나는 그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선제후 아르보그가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한 상업 도시의 지배자에게 제국 해체를 언급한 이상 제국의 분열을 농담으로 취급할 시기는 지난 것 아닙니까? 대비하지 않으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윌리엄 경. 최근 1,2년 사이에 선제후들간의 분위기가 전과 달라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황제 궐위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다 보니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생기는 것이지요. 선제후 아르보그 역시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우리 칼마르를 압박하는 것 같습니다. 일단 우리가 선제후 아르보그의 손을 들어주면 그가 황제가 되든지 안 되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그의 파벌에 속하게 됩니다. 그것이 그가 진짜 노리는 것이겠지요.”

“옌센의 말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래서 백작님께 선제후 아르보그의 제안을 거절했는지 물은 것입니다. 아직은 제국을 봉합할 기회가 남아있으니까요.”

“제국을 봉합할 기회?”

“예. 황제 선출을 위해 한 번 정도는 모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명분이 필요하니까요.”

“성공적으로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게 되면 제국의 수명이 연장되는 것이고, 실패하면 선제후들은 각자의 깃발을 치켜들 명분을 얻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 상황이 흘러가도 최소한 한 번 정도는 황제 선출을 위한 대타협이 있을 겁니다.”

웬만한 귀족은 우습게 볼 정도로 규모가 큰 상인들이 즐비한 칼마르에서 몇 대씩 대를 이어가며 유력자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재기와 통찰력이 보통을 넘는다는 뜻이다.

그런 지혜로운 귀족 2명이 모두 본격적인 제국의 분열은 아직 이르다고 말하고 있다.

아직은 봉합이 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생각보다 분열이 더 빨리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제국 봉합의 근거로 삼고 있는 황제 선출 의식이 오히려 제국 분열의 마지막 일격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과한 우려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경들이 내게 건의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리네아 여백작의 말에 린드스톰은 새로운 문서를 하나 꺼냈다.

옌센 역시 자신이 가져온 문서를 올려 놓았다.

“우리에게 투표권이 있는 것도 아니니 황제 선출에 대한 것은 선제후들이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시죠. 우리는 주변의 변화를 주시하면서 우리의 할 일을 하면 됩니다. 지금은 내실을 다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 선제후들도 칼마르를 억누르거나 이용하려고 하기보다는 협조를 구하는 쪽으로 생각을 하겠지요.”

“그렇습니다. 영지전 같은 큰 일은 대충 마무리를 지었으니 내실을 다질 때입니다. 그래서 백작님께서 작위계승식에 다녀오시는 동안 시의회에서 영지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검토를 했습니다. 그 결과가 이것입니다.”

리네아 여백작은 자신의 앞에 놓인 문서를 집었다.

그리고 두 명의 귀족과 함께 하나하나 내용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난민의 대량 유입은 끝났지만 아직도 유랑민이 적지 않습니다. 막시밀리안 공작이 우리에게 넘긴 지역에 둔전을 확대하고 유랑민을 정착시켜는 일을 계속 진행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관리의 추가적인 임용이 필요합니다. 하급 관리 경력이 있는 자를 추천을 받아 고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숫자가 부족하다면 경력이나 보증이 없더라도 교육받은 평민이라면 고용할까 합니다.”

영지의 안정을 위해 유랑민은 용납할 수 없다.

유랑민의 정착과 지원을 위한 행정력 역시 필요하다.

기존의 관리들로는 일이 감당이 안 되니 읽고 쓸 수만 있어도 끌어다가 써야 할 판이다.

리네아 여백작은 자금 상황을 확인한 후 좀 더 빠르게 진행할 것을 요구했다.

“새로운 막시밀리안 공작의 권력이 안정되면 우리에게 넘겨준 영지에 대해 불만을 표시할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을 대비해서 완충지를 정하고 방어시설을 건설해야 합니다. 용병까지는 무리더라도 둔전병이라도 주둔시켜야 합니다.”

“급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돈을 써야 할 곳이 많은데 방어시설까지는 무리입니다. 둔전병 역시 치안 유지를 위해 필요합니다. 완충지를 설정하고 정찰병을 주기적으로 돌리는 것으로 하시죠?”

일의 순서상 급하게 할 일이 아니다.

나는 둘의 요구에 반대의견을 냈다.

아마 이것은 영지군쪽에서의 요구였던듯 둘 다 내 반대에 별 반발없이 물러섰다.

리네아 여백작 역시 벌써부터 주변 영지와 긴장을 높이는 것은 반대였다.

“식량 수입을 더 늘려야 합니다. 작황 문제로 주변 영지에서 식량을 구입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외국에서라도 대량으로 수입해야 합니다.”

“대금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영지전의 여파로 암염의 판로가 일부 막혔습니다. 남는 암염을 수출로 돌리고 그 대금으로 식량을 구입하면 될 것 같습니다.”

농토라는 것은 생각보다 손도 많이 가고 예민한 존재다.

사람의 손이 떠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황폐화된다.

전쟁통에 영지민이 자신의 농토를 떠났으니 우리가 넘겨 받은 지역에서의 작황은 아예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칼마르 지역의 특산물 중에 암염이 없었다면 허리띠를 좀 졸라맸어야 했을 거다.

“그리고 용병을 더 확보해야 합니다.”

“용병이라고요? 영지군은 정족수가 회복 되었고, 늘어난 둔전병의 숫자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도 용병을 더 확보해야 된다는 건가요?”

리네아 여백작의 의문에 옌센이 난처한 얼굴로 사정을 설명했다.

“칼마르의 동맹 도시들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와서 그렇습니다. 해적질이 너무 심해져서 해적 소굴을 토벌해야 한다고 합니다. 칼마르와 다른 항구도시, 그리고 동맹 도시까지 엮어서 만들어 놓은 해상 운송선에 계속 해적이 출몰하고 있습니다. 우리쪽 피해도 생기는 중입니다. 순스발과 트롤헤탄이 함께 토벌을 할 계획인데 병력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선박은 어떤가요?”

“전투함은 충분하다고 합니다. 선원도 부족하지 않은데 전투병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동맹 도시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보호자를 자처할 정도로 우위에 선 동맹이니 요청이 있으면 응해야 합니다. 그런데 해전에 능한 용병은 구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제국 내에서는 어렵습니다만 제국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질은 떨어져도 숫자는 충분히 채울 수 있습니다. 칼마르의 화물선이 정기적으로 기항하는 곳 중에 다리클리프라는 섬이 있는데 섬 자체가 하나의 국가입니다. 그곳에서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적당한 용병대장을 선출해서 지원을 맡기도록 하지요.”

그런데 리네아의 말에 옌센은 난처한 얼굴을 펴지 못했다.

그는 끙끙거리다가 결국 말하지 못한 마지막 상황까지 설명했다.

“동맹도시에서 격을 맞추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격이라니요?”

“예. 이를테면 지휘자가 유력한 귀족이라든가.”

그 말을 하면 옌센은 나를 바라보았다.

간절한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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