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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75화 (75/248)

75. 잠입

밖에서 돌아다니는 붉은 점 역시 진회색의 로브를 입은 괴인들이었다.

펑퍼짐한 옷에 후드까지 달려 있으니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감추는데 꽤나 유용하기는 하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유니폼처럼 다들 똑같은 로브를 걸치고 돌아다니는 것은 좀 지나쳤다.

죽여야 할 자를 구분하기가 너무 쉽지 않은가 말이다.

달 없는 어두운 밤이다.

나는 더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며 진회색의 로브를 입는 괴인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을 숨기고 조심스럽게 접근했지만, 경계를 보고 있던 괴인은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내가 다가가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보름달이 뜨는 밤은 밤이 아니라고 한다.

일반인도 어두움에 눈이 익숙해지면 주변을 보는 것에 크게 문제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이 뜨지 않는 밤은 다르다.

인간은 장님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린다.

인간의 눈이 별빛 하나에만 의존해서 밤을 활보할 수 있을 정도로 성능이 좋은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나는 별빛 만으로도 보름달이 뜬 것처럼 밤의 풍경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내 앞의 괴인도 나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나를 발견한 괴인의 눈이 커졌다.

괴인과 나의 사이는 세 걸음도 되지 않을 정도로 바로 지척이었다.

나는 괴인이 나를 보았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날듯이 앞으로 달리며 손끝을 펴서 괴인의 목을 찔렀다.

과연 괴인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마치 단단한 나무를 찌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타격은 제대로 들어갔는지 괴인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내 손에 쥔 칼이 부드럽게 호를 그리며 괴인의 목을 쳐 버렸다.

괴인은 그대로 뒤로 주저앉듯 넘어져 버렸다.

목에서 흘러나오는 끈적한 피가 웅덩이처럼 바닥에 모였다.

괴인의 목이 정원의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괴인이 몸이 넘어지는 소리가 정원의 고요함을 깼다.

나는 누군가가 괴인이 죽어가는 동안 낸 소음이라기에는 애매한 소리를 듣고 올까 싶어서 잠시 귀를 기울였다.

내 귀에 아주 멀리서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괴인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는 그대로였다..

나는 안심을 하고 죽은 괴인을 살펴 보았다.

괴인의 손에는 호루라기가 잡혀 있었다.

나를 본 순간 호루라기를 불려고 하다가 제대로 방어도, 반격도 하지 못하고 내게 당한 것이다.

죽은 괴인의 몸은 통나무처럼 단단했다.

내가 제대로 힘을 실어서 단숨에 목을 잘라서 그렇지 어설프게 창질이나 칼질을 하는 사람은 제대로 타격도 주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낯선 종류의 적은 아니었다.

글렌 공작도 비슷한 자들을 부리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일그러진 얼굴에 혹 같은 것이 자잘하게 튀어 나온 것이 겉모습은 상당히 닮은 꼴이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 구별되는 점도 여럿이다.

특히 칼로 공격했을 때의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글렌 공작 쪽은 철판을 두드리는 느낌이라면 이 자들은 통나무를 가르는 느낌이었다.

이런 종류의 인간들을 상대로는 아무래도 칼이 버티지를 못할 것 같아서 여러 개를 가져왔는데 잘한 선택같았다.

나는 저택의 주위를 돌면서 경계를 서고 있던 3명의 괴인 모두를 조용히 처리했다.

이제 저택에 불을 지를 차례였다.

먼저 천과 나무를 이용해서 횃불로 쓸 것을 여러 개 만들었다.

그리고 언제나 갖고 다니던 부싯돌과 부시를 이용해 작은 불씨를 만들어 냈다.

돌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멀리서도 들릴 정도였지만 그 소리를 듣고 다가올 만한 자들은 모두 땅에 눕힌 후니까 마음놓고 불씨를 만들었다.

횃불은 예상대로 활활 잘 타올랐다.

저택 외곽 곳곳에 횃불을 놓아두자 얼마지나지 않아 저택에 불이 옮겨 붙어서 화재로 발전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은 본격적으로 덩치를 불리며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난다면 저택 지하에 있는 자들도 무엇인가 이상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미니맵의 붉은 점과 흰 점은 아직 달라진 것이 없었다.

붉은 점은 아까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고, 흰 점은 몇 개를 제외하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내가 미니맵을 점검하는 동안 저택이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화재는 우리가 생각보다 시끄럽다.

나무가 불에 타면서 내는 소리, 불 때문에 약해진 건물의 일부가 무너지는 소리, 불 자체가 타오를 때 공기를 빨아들이며 내는 웅웅하는 소리까지 귀가 먹지 않은 사람이라면 먼 거리에서도 누구나 들을 수 있을 정도다.

과연 붉은 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재의 소음 때문인지 아니면 냄새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택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나는 움직이는 붉은 점 3개를 잡고 건물 지하로 가기로 했다.

저택 외부처럼 내부 역시 관리가 안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사람들이 주로 다닌 길은 티가 날 수 밖에 없다.

나는 사람들이 다닌 흔적을 따라 저택 내부 깊숙이 움직였다.

저택에 문제가 생겼음을 인지한 붉은 점 역시 빠르게 움직였다.

사람들이 다니던 길이라는 것은 이 저택에 있는 괴인들이 다니던 길이라는 뜻이다.

지하로 들어가려는 나와 지하에서 밖으로 나와서 문제를 파악하려는 괴인들은 서로 마주칠 수밖에 없다.

내 앞에 복도가 꺾어진 저 부분.

바로 그곳에서 붉은 점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

움직이는 붉은 점 3개가 바로 코 앞이었다.

나는 앞에 나타나는 적을 한 번에 꿰어버리기 위해 칼을 역수로 잡고 어깨 위에서 앞을 겨눴다.

지금이다!

다급하게 뛰어온 괴인이 복도의 모퉁이를 돌았다.

괴인은  바로 눈 앞에서 칼이 자신을 노리고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칼을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칼날에 손을 다치더라도 칼몸을 잡고 버티려는 속셈이다.

판단도 빠르고 실력도 좋은 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평범한 보통 사람으로 생각한 대가를 치뤄야 했다.

과연 괴인은 자신을 향해 찔러오는 칼을 두 손으로 잡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걸로 그의 성공은 끝이었다.

강하게 칼을 움켜쥐며 칼을 옆으로 움직이려고 했지만 찔러오는 칼은 그럴만한 찰나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칼몸을 움켜잡은 손아귀 안에서 칼날이 미끄러졌다.

손아귀를 가르고 지나가는 칼날.

그러나 찔러오는 힘이 너무 강해서 칼몸을 잡고 버티는 것은 불가능하다.

쇠의 맛이 손아귀를 지나 괴인의 머리를 강타했다.

일그러지는 괴인의 얼굴을 바로 코앞에서 마주보니 나까지 머리가 쭈뼛해지는 느낌이었다.

괴인의 눈을 뚫고 들어간 칼은 머리 뒤까지 관통해버렸다.

칼은 괴인의 몸무게를 감당해 낼 정도로 튼튼했다.

나는 전진하며 괴인을 밀었다.

쓰러지는 괴인에게서 칼이 뽑혀 나왔다.

걸리는 것 없이 부드럽게 빠지는 것을 보니 단단한 뼈를 찍었음에도 칼에는 별 문제가 없는 듯 했다.

운이 좋았다.

복도의 모퉁이를 꺾자 바로 내 앞에 2명의 괴인이 남아 있었다.

괴인의 눈에 칼을 박고, 칼을 뽑고 몸을 틀어서 두 걸음을 걷고 다시 칼을 휘두르기까지 불과 한 호흡이었다.

괴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도 하지 못한 채 당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적에게 반응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사정을 보아줄 생각이 없었다.

아직 칼은 멀쩡했고, 복도는 넓었다.

칼을 크게 휘둘러도 괜찮을 정도였다.

나는 앞으로 두 걸음 전진하며 칼을 부드럽게 밖으로 휘둘렀다.

칼의 궤적에 걸린 괴인의 머리가 반쯤 베어졌다.

괴인은 자신의 머리가 반으로 잘렸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듯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가 전원이 나간 것처럼 무너졌다.

그 뒤에는 마지막 괴인이 두 눈을 부릅뜨고 서 있었다.

마지막 괴인은 셋 중 가장 실력이 좋았다.

지금까지 부딪혔던 괴인들이 제대로 반응도 하지 못하고 죽어간 것에 비해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적어도 내가 휘두른 칼을 막으려고 손을 내밀기는 했으니까.

덕분에 괴인의 팔뚝 두 개가 동시에 떨어졌다.

팔에서 피가 묽게 쑨 죽처럼 꾸물꾸물 흘러내렸다.

괴인은 팔이 잘렸음에도 아무런 고통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바로 뒤로 돌아서 도망치려고 했다.

숙련된 병사라면 적 앞에서 절대로 하지 않았을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아무래도 이 자들은 원래 평범한 일반인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도망치는 괴인의 등을 노리고 다시 칼로 찔러댔다.

폐, 간, 콩팥.

내장을 들어낸 것이 아닌 바에야 인간의 몸 속에 있는 저 장기들의 위치는 뻔하다.

연달아 쑤셔댄 내 칼 때문에 괴인은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호흡이 완전히 사라졌다.

단숨에 셋을 해치웠지만 나도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 내 칼이 괴인의 뼈에 부딪혀서 앞쪽의 1/3 정도가 부러져 버렸다.

아쉽기는 하지만 예상할 수 있는 범주의 일이었다.

칼은 원래 소모품이다.

전투를 한 번만 거쳐도 날이 나가고 칼몸이 부러진다.

통나무 같았던 괴인의 몸뚱이를 몇 개씩이나 찌르고 썰어댄 것 치고는 이 정도면 양호한 수준이다.

나는 새로운 칼을 뽑아 들고 이자들이 온 방향을 되짚어 달렸다.

저택의 화재가 감당할 정도로 커지기 전에 이 곳을 처리해야 한다.

의외로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는 숨겨져 있지 않았다.

숨기려면 숨길 수 있지만 평상시에는 열어놓고 지낸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입구에도 역시 괴인 하나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지키고 있었다.

다른 자들에게 경고할 틈을 주기 않기 위해 비도를 던지며 괴인을 덮쳤다.

이번에는 아슬아슬했다.

괴인들에게 비도는 위협적이지 않은 공격이었다.

연달아 비도를 던지며 복도를 달렸지만 이번 괴인은 팔을 들어서 비도를 막아냈다.

팔에 비도가 주르륵 꽂힌 꼴을 보니 방패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호르라기를 꺼내는 것을 보면서 마지막으로 던진 비도가 괴인의 손가락을 날려보내지 않았다면 몰려온 괴인들 때문에 지하는 구경도 하지 못했을지 모르겠다.

손가락을 날리고 호루라기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내 새로운 칼이 괴인의 목을 갈랐다.

곧장 지하로 뛰어들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자 길게 이어진 복도와 복도의 좌우에 붙어 있는 방들이 나타났다.

지하 역시 상당한 크기였지만 실제로 사용하는 공간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곧장 복도를 따라 가면 좌우의 방을 살펴보았다.

몇 군데에서는 사람들이 갇혀 있었던 흔적이 보였다.

낙서가 써진 벽과 말라붙은 피.

버려져 있는 의복.

낙서는 납치된 사람들의 기록이었다.

몇 줄을 읽다가 그만 뒀다.

구역질이 났다.

그런 곳 몇 군데를 제외하면 다 창고였다.

식량 창고로 쓰고 있는 방도 있었고, 잡화를 쌓아놓은 방도 있었다.

알 수 없는 액체와 약재를 보관하는 방도 있었다.

그리고 복도의 끝에는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붉은 점이 모여 있는 곳.

나는 몸을 숨기고 내부를 살펴보았다.

강당을 방불케 할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수인족과 거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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