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74화 (74/248)

74. 애쉬 남작령

황제로 입후보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4명의 선제후들 중 하나가 왕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물론 나의 이 주장이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이런저런 증거들을 얼기설기 엮어서 엉성하게 만들어 낸 추론에 불과하다.

그러나 리네아 여백작은 이런 추론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선제후 아르보그가 제국이 해체되는 것을 기정 사실로, 적어도 매우 가능성이 높은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이니 충격을 받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보니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인다.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았다.

과연 선제후 아르보그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이 그 혼자뿐일까?

다른 선제후들은 어떨까?

나는 지금까지 선대 막시밀리안 공작이나 글렌 공작이 황제가 될 가능성도 없는데 왜 이렇게까지 지랄을 하고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칼마르에 대해 가지는 집착이 도를 넘겨도 한참 넘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대 막시밀리안 공작이나 글렌 공작이 바라보고 있는 지향점이 선제후 아르보그와 같은 지점에 있다면 그들의 기묘한 집착이 이해가 간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덩치를 키워야만 했던 것이다.

8명의 선제후는 동등하지 않다.

그들이 가진 표는 동일하지만 세력과 힘의 차이는 격이 다르고 할 정도로 차이가 난다.

이것은 나같은 전직 산적조차 들어봤을 정도로 상식이다.

4강 2중 2약.

황제가 되어본 적이 있는 가문은 4강에 속한 선제후 가문들뿐이다.

2중 2약에 속한 선제후 가문이 피선거인이었던 적은 삼백년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들 2중 2약은 언제나 한 표를 행사했을 뿐이다.

만약 8명의 선제후가 제국을 나누어 가지겠다고 한다면 몇 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과연 2중 2약에 해당하는 선제후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2약에 속하는 막시밀리안 공작가는 외부의 지원을 받은 궁정쿠데타 때문에 엉망이 되어 버렸다.

덕분에 막시밀리안 공작이 가지는 권위의 상당부분이 무너졌다.

2중에 속하는 글렌 공작은 한 때 장악했던 자유도시가 이탈하는데도 불구하고 외부의 견제 때문에 병력을 보내지도 못했다.

그 점이 다시 약점이 되어서 불리한 협상을 해야 할 판이다.

아직 본격적인 내전이 벌어지기도 전인데도 이 모양이다.

나로서는 2중 2약에 속하는 선제후가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고 버티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시간이 지나고 제국 해체가 가시권에 들어오면 2중 2약의 선제후 파벌에 속한 귀족들에게 선택의 순간이 오게 될 것이다.

싸우다 죽을 것인가 아니면 깃발을 바꿔 달고 고개를 숙일 것인가?

2중 2약에 속하는 선제후가 어떻게 처신을 하느냐에 따라 그 휘하의 귀족들에게는 아주 쉽거나 아니면 아주 어려운 선택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된다면 우리 칼마르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선택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과연 우리의 고슴도치 전략은 언제까지 통할 수 있을까?

리네아 여백작은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나 역시 그녀 옆에서 찻잔만 노려보았다.

거의 한시간은 침묵으로 보낸 것 같았다.

리네아 여백작이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 손을 잡았다.

가볍게 떨리던 그녀의 손이 천천히 안정을 찾아갔다.

"윌리엄. 나는 조언이 필요하다."

"징세관인 린드스톰과 시의회 의장인 옌센에게 비밀리에 조언을 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시의회나 자문위원회를 소집했다가 괜히 말이 새어나가서 헛소문이라도 돌면 골치 아파지니까요. 그리고 리네아. 내가 조언할 만한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단지 느낌상 선제후들이 서두른다는 인상을 받는다는 정도? 아마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있겠지요."

"그래. 그대의 말이 맞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글렌 공작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좀 들여다봐야겠다. 어서 칼마르로 귀환하도록 하자."

"그런데 리네아. 칼마르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다. 나는 따로 다른 곳에 들렀다가 가겠습니다."

칼마르에 돌아가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무척 바빠지리라는 것은 확정이다.

칼마르는 지금까지 새로운 황제가 투표로 뽑힐 때까지 버틴다는 대전략 하에서 움직여 왔다.

그런데 이제 제국이 해체되는 수준의 대격변이 닥친다는 것을 전제로 움직여야 한다.

안 바빠지면 이상한 상황이다.

그러니 막시밀리안 공작령까지 온 내가 그냥 돌아가는 것은 애쉬 남작을 아주 오랫동안 방치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내키지 않는 일이다.

애쉬 남작은 선제후 오르보그의 하청을 받아서 무엇인가 하고 있다.

그의 약점을 잡아도 좋고 방해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르보그가 하는 일이 늦어지면 그만큼 우리에게 시간이 생기는 것이니까.

그리고 애쉬 남작이 처리했다는 기사 버로스.

기억에는 없지만 그래도 물리적인 육체를 준 선친인데 복수는 해야 하지 않을까?

회귀 전에도 애쉬 남작은 내 손에 죽었다.

이번에도 내 손으로 처리해야겠다.

리네아 여백작은 내 속내를 단숨에 꿰뚫어 보았다.

"애쉬 남작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원한도 있고, 애쉬 남작이 가진 비밀도 알아봐야 겠습니다."

"그대는 내가 반대해도 가겠지?"

"되도록 빨리 돌아가겠습니다."

리네아 여백작은 다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나란히 앉아 있었다.

손을 잡은 채.

*

애쉬 남작가는 막시밀리안 공작가와 수 대에 걸쳐 봉신 계약을 맺어온 가문이다.

평판은 나쁘지 않다.

그냥 평균적인 영지 귀족이다.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도 딱 남작령에 어울리는 수준.

특별하지 않다.

그리고 이번 궁정쿠데타 때는 비교적 일찍 바르거의 편을 들었다

그 때문인지 작위계승식 후에 열린 축하 파티에서 바르거와 친분을 나누는 모습을 여러 번 과시하듯 보이기도 했다.

바르거 막시밀리안이 애쉬 남작을 진심으로 신뢰하는지의 여부는 모르겠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신뢰로 맺어진 좋은 주종간이다.

그러나 속사정을 아는 나로서는 선제후 아르보그가 언제든지 써먹을 수 있는 단검을 바르거 막시밀리안의 목 바로 곁에서 겨누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날카로운 단검일지는 모르겠지만, 불의의 일격은 누구에게나 뼈아픈 것이다.

바르거 막시밀리안의 작위계승식을 마친 후 축하를 위해 모였던 귀족들은 각자의 본거지로 돌아갔다.

나 역시 일단은 칼마르로 귀환하는 백작의 일행에 섞여 있다가 나와 같은 옷을 입은 기사를 하나 교란용을 세워두고 적당한 때에 떨어져 나왔다.

애쉬 남작이 비밀리에 운영하던 암염 광산은 폐쇄되었고, 광산에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보고가 있었기에 내 첫번째 목적지는 남작령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물론 바보가 아닌 바에야 남작령의 중심 도시나 그 곳에 있는 영주성에 그 이상한 자들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어딘지 이상한 사람들이 진회색의 로브를 뒤집어 쓰고 몰려다니면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연락이나 지시를 주고받기 위해 영주성과 은신처를 몰래 왕래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내 목표는 바로 그 연락책이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연락책이 언제 오는지 정도는 알아야 구분을 하고 추적을 할 수 있겠지만 내게는 치트키가 있다.

상태창의 미니맵.

감사한 마음으로 이번에도 미니맵을 쓸 생각이다.

진회색의 로브를 입은 그 이상한 놈들은 미니맵에 명확하게 나타나니까 놓칠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직접 보지 못하는 먼 위치에서는 그냥 흰 점으로 나타나서 일반 사람들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단 내 시선 범위 내에 들어오면 확실히 붉은 점으로 바뀐다.

이미 나와 진회색의 로브를 입은 자들간에 몇 차례 충돌이 있은 후라서 미니맵도 그 자들을 인식하면 곧장 내 적으로 간주하는 모양이다.

덕분에 비교적 평안한 마음으로 애쉬 남작의 영주성이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연락책을 기다릴 수 있었다.

과연 애쉬 남작이 영주성으로 귀환한 다음 날 밤에 붉은 점이 몰래 애쉬 남작의 집무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단 미니맵으로 연락책을 발견한 이상 놓치는 일은 없다.

나는 그를 멀리서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달이 없는 밤길인데도 불구하고 잘만 걸어가는 연락책이었다.

걸어 간다고?

진회색의 로브를 입고 돌아다니던 자들이 은신해 있는 곳이 멀지 않다는 의미다.

과연 그들의 은신처는 도시 외곽의 저택이었다.

한 때 잘 나갔던 귀족이나 거상의 저택인 듯 규모는 상당했다.

그러나 지금은 제대로 관리가 안 된 티가 역력하다..

정원은 잡초가 무성하고 건물 곳곳에는 수리해야 할 부분, 도색해야 할 부분이 금방 눈에 띈다.

저택 주변도 황량한 것이 조금만 조심하면 모여서 작당을 해도 별 문제가 없을 만한 곳이다.

그런데 여러 개의 붉은 점이 저택 내부에서 움직이는 데도 불구하고 불빛이 새어 나오지는 않는다.

낡고 부서진 창문을 보니 불빛을 막은 것은 아니고 아마도 사람들이 사용하는 부분이 저택 지하가 아닐까 싶다.

붉은 점의 숫자는 10개가 넘었다.

3개는 저택 외부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경계를 서는 모양이고 나머지는 한 곳에 몰려 있었다.

흰 점도 20개가 넘는 것을 보면 내가 제대로 짚긴 한 모양이다.

흰 점은 아마 일반인 실험체가 아닐까 한다.

이들은 저택 외곽의 한 쪽에 몰려 있었다.

갇혀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흰 점 몇 개는 붉은 점이 모여 있는 곳에 있다.

그런데 10명 정도면 혼자서 상대가 가능하려나?

경계 서는 자들을 조용하게 처리한 후

지하로 들어가서 탈출로를 막고 밀어붙이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아니, 잠깐. 내가 미쳤나?

내가 간이 꽤나 커진 모양이다.

상대방이 어떤 자들인지 확인도 안 하고 덮치겠다고?

10명을?

그러다가 지하에서 이상할 정도로 강한 놈을 만난다든가,

아니면 함정 같은 것이라도 있어서 갇히는 사태가 벌어지면 어쩌려고?

그 동안의 성공 때문에 내 머리가 잠시 어떻게 된 모양이다.

나는 인간이고 내 힘에는 한계가 있다.

나는 슈퍼맨이 아니다.

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나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거다.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은 몸을 사려야 한다.

이성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생각해 보면 소수가 다수를 상대하는 방법은 한가지 뿐이다.

혼란을 일으켜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내가 소수임을 모르게 하는 것.

나는 이미 밀염 광산에서 혼자서 다수를 상대로 날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경험을 한 바가 있다.

불놀이가 최고다.

여기서도 똑같이 하자.

저택은 뼈대를 이루는 기둥을 제외한다면 주로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불을 무기로 삼기 좋은 환경이다.

붉은 점과 흰 점을 모두 불에 태워 죽일 것은 아니니까 저택의 외곽에서부터 불을 놓기로 했다.

그 전에 저택의 밖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붉은 점들을 처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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