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71화 (71/248)
  • 71. 파티의 끝

    고디는 날카롭게 변한 자신의 눈동자보다 더 날카로운 어조로 내게 확인을 요구해 왔다.

    "이웃의 선의? 축하? 윌리엄 경. 제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고디 경. 경의 귀는 정상이야. 칼마르는 언제나 좋은 이웃이 되어 줄 수 있네. 하지만 그것이 칼마르의 한계이기도 하지. 분명히 말하지만 칼마르가 선제후 아르보그 공작을 지지하는 일은 없을 걸세. 칼마르는 지금까지 중립이었고, 앞으로도 중립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두고 싶군."

    나는 주변 사람들도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했다.

    심상치 않은 내용에 주변 사람들의 대화가 한순간에 멎었다.

    흥겨운 음악만이 어울리지 않은 배경처럼 흘렀다.

    "감히 아르보그 공작님께 반기를 들겠다는 겁니까? 윌리엄 경."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나?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 어떻게 반기를 든다는 말이 되지? 아무래도 경의 귀가 정상이라는 내 말은 취소해야 할 것 같군. 아니면 귀는 정상인데 다른 곳이 좀 부족한가?"

    "바르거 경이 아르보그 공작님의 보호 아래에서 작위계승식을 올린다는 것을 잊었습니까? 막시밀리안 공작 하나를 감당하지 못해서 쩔쩔 매던 칼마르가 바르거 경의 작위계승식에 와서 중립 운운 하다니!  윌리엄 경. 경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아무리 바르거가 선제후 아르보그 공작의 도움 덕분에 궁정 쿠데타를 성공했다고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허수아비 취급을 하는 것은 모욕이나 다름없다.

    당장 하킨스 남작의 얼굴색이 벌게졌다.

    막시밀리안 파벌에 속하는 귀족들 역시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나는 한 번 더 도발을 했다.

    "말이 이상하군. 언제부터 막시밀리안 공작이 아르보그 공작의 보호 아래에 있는 사람이었지? 설마 봉신 계약이라도 했다고 할 건가? 고디 경 이야말로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걸세."

    봉신 계약이라는 말까지 나오자 분위기는 아예 얼어 붙었다.

    우리 둘 사이의 말다툼이 예민한 정치적 문제를 건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화약통을 쌓아놓은 곳에서 담배를 피는 것과 다르지 않는 짓이다.

    사고가 안 일어날 수도 있지만 일단 사고가 일어나면 대형 사고다.

    그리고 아무래도 지금은 사고가 일어날 분위기였다.

    고디와 함께 온 기사들이 고디 근처로 슬며시 모여들었다.

    모두 셋이었다.

    수인족 둘, 인간 하나.

    인간 쪽은 연배가 좀 있어 보였지만 수인족 기사 둘은 고디와 마찬가지로 아직 젊은 기사들이었다.

    리네아 여백작과 칼마르의 기사들 역시 내게 다가오려고 했지만 나는

    대기하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혹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리네아 여백작이 뒤처리를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외인 것은 하킨스 남작이 양측의 중재를 위해 끼어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고디의 말에 기분이 상했다고 해도 하킨스 남작은 이 모임의 주최자로서 손님간의 다툼을 중재해야 할 책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당연하겠지만 막시밀리안 공작가의 사람들 역시 나름의 꿍꿍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당장이야 아르보그 공작의 도움이 절실하겠지만 바르거가 일단 공작으로서의 입지를 세우게 되면 아르보그 공작 같이 동등한 지위에 있는 선제후의 도움은 오히려 족쇄가 된다.

    그러니 칼마르 같은 외부 세력이 아르보그 공작을 들이받는 것은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고디는 이런 미묘한 분위기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거침없이 내게 떠들었다.

    자신의 군주에게 깊은 충성심을 가지고 있지만 경험이 부족하고 성급하기까지 한 젊은 기사는 의도와는 달리 자신의 주군에게 점점 해가 되기 시작했다.

    "막시밀리안 공작과 우리 아르보그 공작님간의 동맹에 대해 음해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소. 발언을 취소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당신 뿐 아니라 칼마르에게도 돌아갈 거요."

    "고디 경. 제정신인가?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더구나 일개 기사가?"

    "아르보그 공작님의 권유를 거절한 이곳 귀족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못 들었소? 이곳에서는 건방지게 고개를 쳐들은 자들을 마대에 넣어서 강물에 던지던데, 우리는 그런 식으로 무르게 대하지 않아. 토막치고 불을 지르지. 그리고 머리는 입구에 걸어 놓는다. 책보다 무거운 것을 들어본 적이 없는 바르거 같은 자는 하지 못하는 일이지. 우리가 칼마르를 상대로는 못할 것 같은가?"

    수인족이 적을 토벌할 때 어떤 식으로 적을 대하는지 알게 되었다.

    부족 단위로 생활한다고 하더니 예상대로 풍습이 야만적이다.

    내가 보기에 아르보그 공작이 수인족을 끌어들인 것은 별로 좋은 선택같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충성심을 끌어낸 것인지는 몰라도 문화적 이질감이 너무 심해서 인간들과 융화가 힘들어 보이기 때문이다.

    세련된 계급제 사회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뭐, 그런 문제는 아르보그 공작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고.

    이 정도의 막말을 들었으면 내가 격노 해도 될 것 같다.

    "뭐? 누린내 나는 짐승 새끼가 어디서 이빨을 드러내나! 애송이 기사에 지나지 않는 자가 감히 계승 남작에게 대거리를 한다고? 짐승이라서 위아래도 못 알아보나?"

    젠장. 흑인에게 니거라고 불러도 이거보다는 나은 반응이 나올 것 같다.

    매우 오만하고 재수없게 들린다.

    과연 내 말을 들은 고디는 발작하듯 튀어나왔다.

    그는 평상시에 호신용으로 차고 다니는 짧은 검을 꺼내서 직선으로 나를 찔러왔다.

    빠르기는 했지만 날아오는 화살도 잡아내는 내게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은 공격이다.

    검이 내 가슴에 닿는 순간 몸을 반회전하며 고디의 어깨를 손날로 내리쳤다.

    쇄골이 부러지는 느낌이었다.

    내 일격에 앞으로 쓰러지는 고디를 제자리에서 위로 올려 찼다.

    고디는 허공에 떠올랐다가 한바퀴 돈 후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에 쓰러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죽지는 않았지만 신음을 내뱉을 틈도 없이 한순간에 정신이 날아간 것이다.

    너무 한순간이라서 수인족으로 변신도 하지 못했다.

    고디는 자신의 성급함에 대해 걸맞는 대가를 치렀다.

    어떻게 손을 쓸 틈도 없이 단번에 박살이 나버린 고디를 본 수인족 기사들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다음."

    나는 고디와 함께 있던 기사들을 바라보며 건조하게 말했다.

    내 말에 스위치가 켜 진 듯 굳어 있던 수인족 기사 2명이 동시에 덤벼들었다.

    검을 버린 그들의 손이 뼈만 남을 정도로 마른다.

    그리고 한뼘에 달하는 손톱이 솟아났다.

    날카롭게 빛을 반사하는 그들의 손톱은 단검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얼굴도 마치 개처럼 입부분이 튀어나오면서 길어지기 시작했다.

    몸과 팔다리도 지금까지와는 수준이 다른 근육이 도드라졌다.

    인간에서 수인으로의 변신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수인으로 변신한 후에는 전반적인 육체적 능력이 인간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다고 한다.

    평범한 기사에서 몇 배나 위험도가 증가한 탈인간급 기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별 차이가 없게 느껴진다.

    빨라도 내가 더 빠르고 힘이 세도 내가 더 세다.

    전투에 관한 기술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하게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손톱 정도다.

    웬만한 단검보다 더 단단하고 날카로운 수인족의 손톱은 손에 닿는 육체를 찢어 발길 수 있는 무기다.

    과연 내게 달려든 두 명의 기사는 나를 찢어 버리기 위해 가까이 붙으려고 했다.

    검은 기가 도는 그들의 손톱은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강철보다 더 단단하다는 그들의 손톱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이것은 양손에 단검을 든 기사와 상대하는 것과 비슷했다.

    난타하듯 연달아 울리는 철부딪치는 소리에 이게 정말 손톱인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게다가 이 놈의 손톱은 탄성까지 있어서 칼로 잘 잘라지지도 않았다.

    손톱이 아닌 다른 곳을 노려야 했다.

    그래서 손톱으로 내 몸통을 찌르기 위해 앞으로 내미는 순간 손톱을 중심으로 칼을 반시계 방향으로 돌리며 손목을 그었다.

    강력한 무기인 손톱과 달리 수인족의 손목은 인간의 손목과 다를 바가 없었다.

    칼에 휘말린 손목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잘렸다.

    그렇게 손목을 잃은 기사는 목으로 날아드는 칼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네 개의 손을 상대하다가 두 개의 손을 상대하니 한결 쉬워졌다.

    그래서 똑같은 방식으로 더 빠르게 한 번 더 두 개의 손목과 목을 날렸다.

    나는 남아 있는 중년의 인간 기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는 양손을 펴 보이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나는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윌리엄 경."

    "너희들 멋대로 결투를 시작하고 끝내는 것도 너희 멋대로 하겠다는 건가?"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고디 경은 수인족의 중요한 인물입니다. 고디 경이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면 아르보그 공작님께서도 이 일에 대해 크게 문제 삼지는 않을실 겁니다."

    "그래?"

    믿을 수 없는 주장이었지만 그래도 결국 중년의 인간 기사는 고디를 챙겨서 귀환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죽은 두 명의 수인족 기사는 하킨스 남작이 챙겨주기로 했다.

    하킨스 남작은 파티의 정리를 지시한 후 다시 내게 다가왔다.

    저기압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분이 좋은 쪽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윌리엄 경. 듣던 대로 놀라운 실력이었습니다."

    "저 자들이 제대로 준비된 상태였으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다못해 건틀릿이라도 차고 있었으면 그렇게 쉽게 손목이 날아가지는 않았겠지요."

    "어차피 모두가 동일한 조건 아니었습니까? 오히려 수인족 기사들이 무기를 더 가진 셈이었지요."

    확실하다.

    하킨스 남작은 자신과 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보그 공작측이 당한 것을 반기고 있다.

    이 사람이 감정적으로 행동할 사람은 아닌데.

    그래서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설마 벌써 갈라선 것은 아니겠지요? 바르거 막시밀리안 공께서는 자신의 표를 아르보그 공작에게 투표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킨스 남작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물론 나는 바르거 공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아르보그 공작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르보그 공작에게 힘이 쏠리는 것은 우리의 안위를 위해서도 좋지 않습니다. 최근 막시밀리안 공작과 글렌 공작에게 모두 문제가 생기면서 제국 남부 지방의 일부가 빈 집처럼 되었다는 것은 아실 겁니다. 당사자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사실 선입견과 달리 저는 칼마르 백작가에서 어느 정도 그 공백을 채우는 것에 대해 긍정적입니다. 그래서 좀 더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 쪽에 손을 들었지요. 아르보그 공작쪽에서는 칼마르를 매수하는 뇌물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저희 입장에서는 미래를 위한 투자였습니다."

    아하! 패트슨 남작과 올롭스 남작의 새로운 봉신 계약에 영향을 끼친 사람 중에는 하킨스 남작도 있었군.

    나는 예상치 않은 곳에서 의외의 우군을 발견했다.

    *

    아르보그의 기사들 넷이 와서 멀쩡하게 돌아간 것은 한 명뿐, 둘은 죽고 하나는 병신이 돼서 돌아갔다.

    당장이라도 아르보그 공작의 고위 귀족이나 선임 기사가 달려와서 책임을 추궁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막시밀리안 공작의 작위계승식이 바로 코 앞이라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일단 묵인하고 넘어가는 모양인데 이게 그렇게 오래 가지 않으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선제후 아르보그의 얼굴에 대놓고 뺨을 때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과연 아르보그 공작은 작위계승식을 마친 후 면담을 요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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