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글렌 공작이 저지른 일
원래 도시 안에서 사는 유력자들의 저택은 규모를 크게 만들 수는 있어도 요새처럼 만들 수는 없다.
도시의 주인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영주만이 성이라고 불릴만한 저택을 건설할 수 있다.
도시의 규모가 커지고 영주의 재력이 늘어나면 저택은 영주성이나 내성으로 덩치를 불리고 만약을 대비한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역사가 오래된 자유도시의 유력자에게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고만고만한 권력을 가진 유력자들끼리 서로 견제하고 협조하면서 운영하는 자유도시에서는 자신의 저택을 요새화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한결 덜하다.
돈이 없어서 못 만들지 권력에 눌려서 못 만들지는 않는 상황인 것이다.
마치 영주처럼 자신의 저택을 요새화한 사람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누트의 저택이 그랬다.
작은 성처럼 지어진 아누트의 저택은 성벽을 건물의 벽으로 대신했을 뿐 해자와 이중으로 된 정문까지 있는 훌륭한 요새였다.
밤에는 정문 뿐 아니라 외부에 면한 모든 창과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에 몰래 들어갈 수도 없다.
그러니 이런 종류의 저택을 공격하는 것은 공성전을 벌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수 미터 높이의 창문에 사다리를 대고 올라가서 도끼질을 하거나 충차라도 끌고 가서 정문으로 돌격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공격은 마그누손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공성전은 빠른 해결책이 아니다.
며칠이고 포위하며 상대를 소모전으로 말려죽이는 것이 공성전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뭔가 다른 수단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마그누손은 내전이라면 사용이 가능한 매우 전통적이고도 효과적인 방법에 기대기로 했다.
아누트 저택의 문지기들을 매수한 것이다.
매수는 성공적으로 보였다.
마그누손의 병사들이 아누트의 저택에 접근했을 때 이중으로 된 정문은 모두 열려 있었고,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만약 마그누손이 좀 더 신중한 사람이었다면 정문을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에 주목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란의 성공이 바로 눈앞까지 임박한 것에 흥분한 마그누손은 자신의 사병들을 거느리고 그대로 저택 내부를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활짝 열린 두 개의 문을 지나 중앙 정원에 다다랐을 때 마그누손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과연 그의 직감은 잘못되지 않았다.
중앙 정원을 둘러싼 사방의 발코니에서 활을 든 병사들이 몸을 드러냈다.
중앙 정원으로 통하는 주변 건물의 입구에서도 병사들이 연이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그누손의 병사들은 3면으로 포위당한 것이다.
"마그누손! 이 밤중에 내 집에는 무슨 일이냐?"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하늘을 찢었다.
마그누손은 고함소리의 주인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아누트가 정면의 2층의 발코니에 서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이 틀어진 것인가?
마그누손의 신경세포가 곤두섰다.
날카로운 창을 바로 코 앞에 들이댄 느낌이었다.
판단할 시간이, 적어도 뭔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누트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맞서서 고함을 질렀다.
"조상들의 피와 땀을 팔아넘기려는 놈이 있다고 해서 얼굴이나 한 번 볼까하고 왔다."
"어떻게 내게 그런 모함을 하나? 내가 비스뷔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따위 헛소리를 해!"
"개소리를 하는 것은 네 놈이지! 글렌 공작의 발가락이나 핥고 있는 놈이 무슨 노력을 한다는 거냐!"
"너희들은 선제후인 글렌 공작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 비루한 목숨이나마 붙여 두고 싶다면 말을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게다."
"기껏해야 8명의 선제후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자를 우리가 왜 두려워해야 하지? 그는 선제후들 중에서도 세력이 작은 축에 들지 않나? 글렌 공작이 지랄하면 다른 선제후와 손을 잡으면 그만이야."
"마그누손. 너와 똑같은 말을 했던 아글라가 어디서 죽었는지 기억이 안 나나? 그 멍청이는 개처럼 길에서 죽었지. 너 역시 침대에서 죽지 못할 거다."
"네 놈처럼 글렌 공작에게 엉덩이나 대주는 것보다는 그게 더 비스뷔의 사내답겠군."
"너, 너!"
아누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펄펄 뛰었다.
당장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누트가 마그누손에게 삿대질을 하며 욕이라도 다시 한바탕 퍼부으려는 순간 그의 옆에 있던 사람이 손짓으로 막으며 아누트를 뒤로 보내고 자신이 앞으로 나섰다.
"마그누손. 항복한다면 목숨과 지위를 보장하겠다. 재산은 어느 정도 헌납해야 겠지만 그 정도로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글렌 공작의 사냥개였다.
시 외곽의 주둔지에 있어야 할 자인데 이곳에 있다?
야습을 미리 알고 함정을 준비한 것일까?
마그누손은 아누트측의 병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곧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야습을 미리 알고 대기했다기에는 병력의 숫자가 생각보다 너무 적었다.
언뜻 보기에도 백 명이 좀 넘는 수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자들까지 합한다고 해도 3백여 명을 끌고 온 자신과 비교해서 최대로 보아도 2/3나 될까?
이 정도라면 아누트가 평소 저택에 두던 사병보다 약간 늘어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놈들. 허세를 부리고 있다!
야습을 미리 안 것이 불과 얼마 전이라서 미처 대비가 안 된거야!
마그누손은 손을 옆으로 내밀어, 그의 부하들 중 하나가 들고 있던 쇠뇌를 집었다.
쇠뇌살이 재어져 있어서 방아쇠만 당기면 되는 쇠뇌였다.
가져오자마자 그대로 쇠뇌를 들고 정면 2층의 베란다에 있는 사냥개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한 호흡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쇠뇌살은 제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글렌 공작의 사냥개가 가슴에 쇠뇌살을 박고 천천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발코니에서 떨어져서 1층 중앙 정원의 바닥에 처박혔다.
헉! 하고 장내의 모든 사람이 동시에 숨을 들이키는 순간 마그누손이 외쳤다.
"쓸어버려!"
그 말을 신호로 마그누손의 부하들이 일제히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발코니 위에서 노리고 있는 화살이 있는 한 적과 붙어 있는 것이 더 안전했다.
덕분에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마그누손의 병력을 둘러싸고 있던 얇은 포위망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 버렸다.
다 같이 뒤섞여서 개인기와 운에 의존해서 싸우는 난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병사의 수가 더 많은 마그누손에게 유리한 싸움이었다.
발코니에 있던 사수들은 몇 발의 화살을 쏘아보았지만 적아할 것 없이 뒤엉킨 채 정신없이 돌아가는 상황에서 사람을 구분해가며 쏜다는 것은 곡예에 가까운 일이었다.
결국 그들은 본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낭비된 병력이 되고 말았다.
마그누손은 자신에게 달려든 병사 몇 명을 부하들과 함께 쓰러뜨린 후 아누트를 찾아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누트는 최우선으로 반드시 잡아야 할 자였다.
그에게서 비스뷔 시의 열쇠와 도장을 빼앗고, 오늘 밤의 혼란을 수습해야 했다.
글렌 공작의 사냥개들을 제외한다면 지금 싸우고 있는 자들은 모두 비스뷔의 자산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용병조차도 고용주가 비스뷔로 되어 있고, 지불도 비스뷔에서 한다.
죽이든 살리든 일단 아누트를 잡아야 내부정리를 시작할 수 있다.
마그누손는 그의 정예병과 함께 급하게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서 아누트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곳을 향해 달렸다.
복도는 길고 어두웠다.
복도벽에 설치된 등불 만으로 복도 전체를 밝히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했다.
마그누손은 자신이 올바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불쑥 아누트가 나타났다.
등불의 빛 아래에서 아누트는 마치 어둠에서 빛으로 점프를 하듯 모습을 드러냈다.
"아누트!"
마그누손은 아누트의 출현에 차라리 마음이 놓였다.
이곳에서 승부를 보는 것이 놓치는 것보다 백배는 낫다.
"어리석은 놈. 너는 오늘 죽을 거다."
아누트의 비웃음이 명령이라도 된 듯 괴인들이 차례로 모습을 나타냈다.
흉갑과 누비갑옷 만으로는 그들의 흉한 모습이 가려지지 않는 자들이었다.
"쳐!"
마그누손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쇠뇌의 화살이 날아갔다.
그 뒤를 따라 기사라고 칭해도 손색이 없는 마그누손의 정예병이 돌격했다.
당장이라도 눈 앞에 보이는 적을 다 휩쓸어 버릴 것 같은 기세였지만 마그누손은 오히려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쇠뇌살이 튕겨져 나갔어!
마그누손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괴인들을 향해 날아간 두 대의 쇠뇌살 중 하나는 빗나갔지만 다른 하나는 제대로 괴인에게 맞았는데 그냥 튕겨져 나간 것이다.
캉!
괴인을 향해 내리친 칼이 바위를 때리기라도 한 것같은 소리를 내며 튕겨져 나왔다.
당황한 부하를 향해 괴인의 주먹이 날아왔다.
부하는 얼굴을 정통으로 맞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즉사였다.
"내가 이야기했지? 너희들은 글렌 공작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멍청한 놈들! 다 죽어버려라!"
반쯤 미친 것처럼 외쳐대는 아누트의 고함을 배경으로 마그누손의 부하들은 일사불란하게 3명의 괴인들을 상대했다.
짧은 창을 가져온 부하가 호령에 맞추어 괴인에게 창을 찔러넣었다.
"찔러!"
"죽어라 괴물!"
"창이 안들어갑니다. 아악!"
그러나 돌덩이를 같이 단단한 몸을 한 괴인은 자신에게 찔러오는 창을 막을 생각도 하지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마그누손은 바위 주먹에 맞아 얼굴이 으깨진 채 즉사해버린 부하를 보며 치를 떨었다.
아무래도 쉽지 않은 밤이 될 것 같았다.
*
나는 정예로만 추린 50여 명의 병력과 함께 아누트의 요새 저택을 향해 달려갔다.
도시의 길목마다 비스뷔의 경비대가 목제 바리케이드를 치고 사람의 통행을 막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소속이 마그누손 의원이라고 밝히는 것으로 프리패스 였다. 마그누손 의원이 경비대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하다고 하더니 역시 이름값을 해주었다.
도시는 혼란했다.
도시에 흩어져서 자고 있던 글렌 공작군의 장교들이 허둥지둥 튀어나와서 무슨 일인지 묻다가 그냥 목이 잘리는 경우도 보았고,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눈치채고 멀리서 얼쩡대다가 그냥 어둠속으로 몸을 숨기는 것도 보았다.
생각보다 우왕좌왕하는 글렌 공작군 소속의 간부들이 많았다.
당혹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거 낚시가 아니라 단순히 군무이탈 아닌가?
조선시대에는 군대 간부 뿐 아니라 일반 사병도 영내 대기가 아니라 하숙을 했다고 하니까 비슷하게 생각하면 말이 안되는 것도 아닌데.
"남작님. 앞쪽에 전투입니다!"
"시간 없어. 그냥 한칼씩만 먹여주고 계속 뛴다."
8명 정도로 구성된 경비대가 비슷한 숫자의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사이를 지나가며 정말 한칼씩만 휘둘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적들은 모두 죽거나 한두군데씩 찔린채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곧 아누트의 요새도시에 도착했다.
전투는 한참 격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화재가 크게 번져서 저택의 한쪽은 아예 불기둥이 솟고 있었지만 다들 진화작업에는 신경도 쓰고 있지 않았다.
집주인도 신경을 안 쓴다는데.
나도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절반은 정문을 지킨다. 아누트 놈들의 탈주를 막아. 나머지는 나와 함께 간다."
우리는 마그누손의 부하들이 알려준대로 저택 내부로 진입하여 전투 흔적을 찾으며 빠르게 이동했다.
운이 좋았다.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마그누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저택 내부로 데려온 병사를 거의 다 잃고 위기에 처한 참이었다.
누비 갑옷에 흉갑을 입은 푸른 얼굴의 괴인들이 당장이라도 마그누손의 머리를 박살낼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 머리가 박살난 것은 아니니 너무 늦지는 않았다.
나는 괴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마그누손의 옆을 지나며 가장 가까이 있던 괴인의 팔을 잡았다.
그대로 안으로 파고들면서 양팔을 다 잡고 한바퀴 돌려서 바닥에 집어던졌다.
"뭐야! 이것들은 뭔데 이리 무겁고 딱딱해?"
무슨 바위라도 던지는 느낌이었다.
메어치기에 당한 괴인은 충격이 너무 큰지 금방 일어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두 명의 괴인이 천천히 내게 접근했다.
둘 다 정말 단단하고 무겁게 생긴 자들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글렌 공작 이 미친 새끼는 뭔 지랄을 하고 다니는 거야?
내가 잡은 괴인의 피부는 사람의 피부가 아니었다.
돌이나 철판같은 느낌이었다.
자연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셋이라니.
말도 안 된다.
나는 돌이든 철판이든 상관없이 깨부술 전투 망치를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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