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61화 (61/248)

61. 매우 다른 것

라그닐드의 긴 손톱에 허벅지가 찔린 여자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대신 몸을 웅크리며 벌벌 떨었다.

귀족 여성스럽게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던 라그닐드는 어느새 잔인하면서도 나른한 분위기로 그 느낌이 변했다.

반 뼘 가깝게 튀어나온 그녀의 손톱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피가 흙바닥에 점점이 그 흔적을 남길 때 사절단의 기사들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움직임으로 습격해 온 자들과 맞섰다.

마치 야생동물이 움직이는 듯한 탄력으로 적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강하게 움직였다.

움직임 뿐 아니라 그들의 모습도 달라졌다.

보기 흉할 정도로 근육이 도드라진 팔과 다리,

손 발은 물론 얼굴까지 뒤덮은 잔털,

손끝에 손가락 마디 한두개 정도의 크기로 튀어나온 손톱은 단검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엇! 수인족이다!"

"북부도 아니고 무슨 수인족이야!"

"안 돼!"

습격해온 자들은 기사들의 변화를 바로 눈 앞에서 보는 순간 당혹스러운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절망감은 비명소리 안에서 느껴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기사라는 존재는 평범한 인간쯤은 간단히 압살한다.

그런데 거기에 인간보다 몇 배는 뛰어난 수인 특유의 신체 능력이 더해진다면?

오크처럼 사람의 팔을 잡고 찢어내는 것도 가능해진다.

압도적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눈으로 보여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잘 싸워왔던 적들은 일방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힘도 속도도 수인족 기사들을 따라가지 못하게 되자 뛰어난 검술 실력, 약점을 찌르는 날카로운 눈썰미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부상을 입고 바닥을 뒹굴었다.

잘 훈련된 암살자들조차 인간과 수인 간의 타고난 기본 역량 차이를 극복해내지 못한 것이다.

멀리서 화살을 쏘던 자들은 어느새 모습을 감췄고, 사로잡힌 여자를 구하기 위해 사절단을 습격해 왔던 3명의 남자는 모두 부상을 입은 채 사로잡혔다.

잠깐 사이의 전투였지만 기사들 역시 피해가 작지는 않았다.

첫 기습 공격에 화살을 맞은 2명의 기사는 모두 사망했고, 다른 기사들 역시 자잘한 부상을 입지 않은 자가 없었다.

기사 중 하나는 창에 스쳐서 내장을 드러낼 정도로 깊은 부상을 입었다.

뒤늦게 달려온 칼마르 백작가의 기사들은 난장판이 되어버린 영주성의 입구를 보고 난리가 났다.

사절로 온 사람들이 영주성을 나가는 순간에 외부로부터 기습을 당해 죽고 다쳤으니 어떤 식으로 봐도 이것은 칼마르 백작가에서 책임을 져야 할 문제였다.

그러나 라그닐드는 칼마르 백작가에 책임을 추궁할 생각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우호의 사절로 온 셈이다.

지금 당장 책임을 추궁해서 뭔가 받아내려고 하는 것보다 이렇게 빚을 지워 놓는 것이 훨씬 낫다고 그녀는 판단했다.

칼마르 백작가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경?"

"헤드버그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경비대의 기사이고 이 곳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헤드버그 경. 우리는 지금 우리가 묵던 별채로 갈 겁니다. 시종장에게 연락해서 고기를 보내달라고 하세요. 어떤 종류든지 상관이 없지만 이왕이면 신선한 것이 좋겠군요."

"예? 고기라고요?"

"그래요. 고기. 신선한 고기.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어느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사절단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핼쑥한 얼굴이었다. 얼굴살이 다 빠지고 핏기가 하나도 없는 것이 얼굴만 본다면 뼈에 가죽만 씌어놓았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제서야 이유를 이해한 헤드버그는 곧장 병사를 불러서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라그닐드는 현장을 떠나기 전에 사절단이 사로잡은 포로를 경비대에게 넘겼다.

"헤드버그 경. 이들은 우리가 사로잡은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권리가 있지요. 그리고 우리는 이들이 이번 사건의 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상황이 상황이라서 우리가 잡아두고 있을 수는 없으니 일단 감옥에 가둬둘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 자들에 대한 신문은 그대들이 알아서 하세요. 죽이지만 않으면 됩니다. 우리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한 가지 강조하지요. 이 자들 중 부상을 입은 이 세 남자는 별 것 아니에요. 흔해빠진 암살자에 지나지 않지요. 그러나 이 여자는 잘 감시해야 할 거에요. 암살자로는 아주 위험한 존재니까. 절대로 눈을 떼면 안됩니다."

충고까지 마친 라그닐드와 사절단의 기사들은 사망자와 부상자까지 챙겨서 별채로 사라졌다.

그렇게 사절단의 활약으로 사건이 일단락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칼마르 시에 남아 있던 경비대는 비번까지 모조리 튀어나와서 탈출한 포로 수색 작업에 투입되었다.

포로들을 영주성 지하의 감옥으로 이송하는 그 짧은 순간에 다리에 부상을 입고 잘 걷지도 못하던 여자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경비대원과 기사들이 잔뜩 깔린 영주성에서 독살 사건의 가장 유력한 범인이 사라진 것이다.

윌리엄 경이 깨어났을 때까지도 사라진 여자는 찾지 못한 상태였다.

*

이곳은 지구도 아니고 중세도 아니다.

그러나 의외로 비슷한 부분이 많다.

특히 사회시스템에서 그렇다.

봉건제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체제라든가 계급제와 계약에 의해 돌아가는 사회구조라든가 하는 부분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닮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중세 사회와 닮은 부분이 많았다.

특히, 경제 시스템은 닮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같았다.

그래도 지도를 보면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현대인 기준으로는 상상으로 그려놓은 예술 작품이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가장 정확하다는 지도를 보면 지구를 떠올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오대양, 육대주, 남극과 북극을 닮은 어떤 것도 지도에 없는 것이다.

대신 판게아를 연상시키는 거대하고 복잡한 대륙과 몇 개의 섬이 있다.

대륙을 둘러싼 바다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른다.

지도에는 세상의 끝이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지형 말고도 다른 부분이 적지 않았다.

일단 신비는 지구에 없는 것이다.

초능력 사냥꾼 제임스 랜디가 막대한 현상금을 걸고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으니까 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있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미약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초자연적인 어떤 것, 신비가 존재했다.

그것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마법이나 정령을 연상시킨다.

어쩌면 진짜 신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개인 간의 능력 차이도 지구와 비교하면 매우 심하게 차이가 난다.

평범한 사람의 2배, 3배에 달하는 힘과 스태미나를 가진 자들이 흔했고, 훈련에 의해서도 강화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곳에서 계급제가 없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수틀리면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이렇게 공평하게 죽창질이 가능해야 계급제가 박살이 나는 것인데 사람 간의 능력차이가 너무 심하면 그게 불가능하다.

공평하게 총질이 가능해지면 어떨까 싶지만 총은 아직 먼 미래의 일이다.

나와는 관련이 없는 시대란 말이다.

나는 지금 냉병기의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무엇보다 지구와의 가장 큰 차이는 아인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오크와 오우거, 드워프, 거인족이 존재한다.

심지어 전설 속의 존재지만 용족도 있다.

신성 마르스홀롬 제국에서 선제후에 의해 황제가 선출되기 전, 세습제 황제 시절에는 황제가 용족 혼혈임을 주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존재들을 일반인이 볼 일은 거의 없다.

신성 마르스 홀롬 제국은 인간의 제국이니까.

제국 영역에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산다.

일반적으로.

그렇다.

일반적이지 않는 경우도 존재하는 것이다.

제국의 북부에는 인간과 수인족이 함께 산다.

제국 북부에 수인족이 산다고 해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말로만 들었지 수인족을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족단위로 사는 수인족은 자기 영역을 떠나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게다가 제국 북부에서 제국 남부까지는 엄청난 거리다.

육로로 움직인다면 대륙을 종단하다시피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사정에도 불구하고 수인족이 아르보그 선제후에게 봉사하고 있었고, 제국 남부 끝에 있는 칼마르 백작령까지 온 것이다.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수인족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아니지. 이미 봤지만 수인족이라는 것을 몰랐으니 알고 보는 것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인족이라는 것을 알고 보면 모를까 알지 못하고 보면 인간과 차이점을 찾기 힘들다고 하던데 정말 그랬다.

라그닐드의 눈동자가 세로로 긴 모양을 한 것을 제외하면 인간과의 차이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와 리네아 여백작의 회의실에서 만남을 가졌다.

"윌리엄 경께서 우리가 잡은 포로들에 대한 권리를 넘겨달라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라그닐드 경. 그들의 배후에 대해 좀 더 깊숙한 조사를 할 필요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암살자들은 고문에 대비하는 훈련을 받지요.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겁니다. 설사 고문에 의해 입을 열어도 그 말하는 것에 진실과 거짓을 섞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뢰주에 대해서는 저들도 모를 겁니다."

우아하고 품위있게 말하는 귀족 아가씨.

딱 그런 느낌이었다.

수인족이라고 하지만 평상시의 모습은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세로로 길쭉한 눈동자나 특유의 나른한 분위기가 유혹적일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가끔 손에 든 부채로 살살 바람을 보낼 때마다 좋은 냄새도 났다.

"그러리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시도해 볼만한 것이 있어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흥미롭군요. 윌리엄 경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여러 곳으로부터 들었습니다. 혹시 알게 되시는 것이 있다면 제게도 전언을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저들을 사로잡은 것이 라그닐드 경의 기사들이니 당연한 말씀입니다. 제가 알게 된 것들을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포로들에 대한 권리를 넘겨드리겠습니다. 그들의 생사는 이제 윌리엄 경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그리고 권리를 넘겨드리는 것에 대한 대가는 목걸이로 받지요. 다음에 만났을 때 직접 걸어주시면 됩니다."

미소를 지으며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귀족 아가씨의 태도에는 어떤 이상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거 꼬리치는 것 아닌가?

무슨 대가가 목걸이이고 심지어 직접 걸어 달래?

그러나 나는 둔한 척,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관대한 제안에 감사드립니다. 약혼자의 조언을 받아서 라그닐드 경의 아름다움에 어울리는 목걸이를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에 뵐 때는 막시밀리안 공작의 계승식 때겠군요.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라그닐드 경을 내보낸 후 내 손에 들어온 암살자들을 이용할 계획을 다시 검토했다.

점조직으로 보이는 암살자들을 하나하나 꼬리를 타고 몸통으로 추적해 볼 생각이었다.

3명이나 되니까 하나씩 방생을 하고 쫓아가다보면 하나 정도는 걸려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세운 계획이었다.

중간에 다시 모습을 감췄다는 그 여자가 아니라면 미니맵을 이용한 추적은 아직 쓸만하다.

나는 아직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

"라그닐드 경. 어땠습니까? 백작의 약혼자에게서 반응은 있었습니까?"

"수인족 혼혈은 아닌 듯 해. 반응이 없었어. 아쉽군. 수인족 혼혈이었다면 내 페르몬으로 단숨에 넘어뜨렸을텐데. 그랬다면 백작의 약혼자는 내게 코가 꿰었을 것을."

라그닐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시도해 본 유혹이 실패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녀의 페르몬이 발정기 때의 것이 아니라서 그런 것일까?

그녀는 역시 나중에 한 번 더 시도해 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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