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60화 (60/248)

60. 보이지 않은 자.

독을 먹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고?

그냥 알 수 있었다.

심하게 둔한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에게 진짜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경우 그냥 안다.

아! 좆됐구나.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술을 마시면서 술맛이 좀 이상한데 싶었는데 바로 혀가 마비됐다.

순간 이건 독이구나 하고 탁자에 술잔을 놓았다.

혀가 마비되고 입술의 감각이 사라졌다.

구토가 나오려고 하는데, 움직이지는 못하겠다.

놀라서 고함을 치는 사람들의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그리고 호흡이 가빠진다.

억지로 호흡을 하려고 하지만 할 때마다 더 힘들어진다.

이대로는 숨이 막힐지도 모르겠다.

독의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독의 위험도가 높을 수록 효과는 빠르게 나타난다고 한다.

거기다 이렇게 빠르게 중독이 되면 해독제가 있어도 손을 쓸 수 없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다.

내가 죽을 위험에 처해 있고, 피할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 졌다.

그러자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죽으면 이번에는 3회차를 다시 시작하는 걸까?

아니면 이것으로 끝인가?

내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상태창이 격렬하게 깜박였다.

눈이 아플 정도였다.

활성화된 버튼이 미니맵 하나밖에 없으면서 바쁜 척 하기는.

그러게 진작에 쓸만한 것을 더 줬으면 좋았잖아!

그래. 만독불침 같은 것. 그거 줬으면 좋았겠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상태창조차 흐리게 보였다.

나는 천천히 의식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차리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내 몸은 내 의지를 따라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깜빡 정신을 잃었다.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만찬장이 아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누군가가 나를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나를 두고 먼저 떠나셨다. 언니도 동생도 제대로 형제의 정을 나누기 전에 나를 떠났다. 나는 불행을 몰고 오는 자다. 나와 가족이 되는 자는 모두 나를 떠나고 만다. 나와 약혼을 하기로 했던 자들도 나의 불운에 휘말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 역시 그러한가? 그대도 나의 불운에 휘말려 나를 떠나려는 것인가? 나는 이렇게 홀로 남아야 하는가? 그대는 내게 약속하지 않았나. 왜 약속을 지키지 않고 나를 떠나려고 하는가!"

리네아 여백작이 홀로 청승을 떨고 있었다.

바로 눈 앞에서 약혼자가 독을 먹고 쓰러졌으니 충격이 크기는 했겠다.

약혼 예정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과는 느낌이 달랐겠지.

그래도 이렇게 자기비하가 심해서야.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의지와 인과와 확률이다.

행운이나 불행 따위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불행 따위는 내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렸다.

"전에도 이야기 한 것 같은데 나는 쉽게 안 죽습니다."

"그대!"

놀란 리네아 여백작이 몸을 일으키며 나를 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아직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보았다.

아직 뻐근한 감각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움직이는 것 자체는 괜찮은 것 같았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내 얼굴이 아닌 것 같은 둔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씨발!!

나 안 죽었다고!

이렇게 살아 돌아왔다고!

나한테 독 먹인 새끼 두고 보자.

다시 살아난 나를 축하하듯 상태창의 한부분이 깜박이고 있었다.

[스킬 : 독저항, LOCKED]

*

내가 깨어난 것은 쓰러진 날로부터 이틀이 채 지나기 전이었다.

의사는 겉으로 나타난 증상을 보고 해독제가 소용이 없다며 스스로 이기고 일어나는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는데 과연 나는 이틀 만에 스스로 일어난 것이다.

내가 독을 먹고 쓰러지는 통에 만찬이고 협의고 뭐고 할 것 없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만찬에서 내가 독을 먹고 쓰러졌다는 것은 만찬장에 있던 누구라도 독살의 위험에서 안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 아르보그 선제후의 사절단 중 누군가가 먹고 쓰러졌다면?

그리고 만약, 리네아 여백작이 먹었다면?

어느 쪽이든 등골이 서늘해지는 가정이었다.

시종과 시녀, 요리사 할 것 없이 그날 만찬을 담당했던 자들은 일단 모두 조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태창의 미니맵에 붉은 점이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상태창조차 눈치를 못 챈 것이다.

당장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리네아 여백작의 첫번째 약혼자 후보자였던 탈린의 암살.

탈린의 암살은 전문가의 솜씨였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모욕적으로 죽였다.

범인은 결국 잡지 못했다.

그리고 당시 나는 의심스러운 붉은 점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상태창조차 위치를 놓쳐버릴 정도로 은밀하게 움직이는 여자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상태창조차 잡아내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내게 독을 먹였다.

이것도 전문가의 솜씨다.

리네아 여백작은 글렌 공작이 나를 처리하기 위해 아크후라는 암살단에게 의뢰를 넣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녀의 손이 글렌 공작 바로 옆에까지 뻗어 있다는 중요한 비밀을 나와 공유하면서까지 내게 경고한 것이다.

역시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제 독은 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는 암살의 전문가 집단이다.

무슨 짓을 어떻게 할지 감을 잡을 수 없다.

글렌 공작을 어떻게든 처리하든가 아크후인지 아크바르인지 하는 자들을 처리해야 내 목숨이 안전하겠다.

아르보그 선제후의 사절단이 사로잡은 자들을 넘겨달라고 해야겠다.

*

이틀 전.

리네아 여백작의 약혼자가 쓰러졌을 때.

아르보그 선제후의 사절단 대표인 라그닐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사절단의 기사들이 즉시 그녀를 둘러싸고 주변과 거리를 두었다.

만찬장의 귀족과 유력자들 역시 서로 거리를 두고 서서 기사들의 통제에 따라 움직였다.

공개된 장소에서 일어난 암살 시도였다.

이럴 때 어떤 식으로든 오해받을 행동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모두 몸을 사리고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지 살피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한 편, 마스터 요한의 명령에 따르는 기사들은 당장이라도 칼을 들이댈 것 같은 살벌한 기세를 풍겼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수상한 자를 찾았다.

그러나 수상한 자는 그렇게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윌리엄은 쓰러지는 즉시 사람들 사이에서 격리되었다.

누구도 함부로 옆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눕혀 놓은 것이다. 윌리엄은 의식을 잃었지만 아직 미약하게 숨은 쉬고 있었다.

윌리엄의 옆에는 정신없이 달려온 리네아 여백작이 움직이지 않는 그의 손을 잡고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을 하고 있었다.

범인이 눈 앞에 있으면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은 기세였다.

잠시 후 시녀장인 사라 남작 부인이 그녀를 다독이며 만찬장 밖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윌리엄 역시 시녀들이 조심스럽게 들것에 들어서 내어갔다.

그제서야 만찬장의 사람들은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라그닐드는 그 모든 광경을 시각보다는 후각과 청각으로 기억했다.

점점 정리되는 만찬장의 모습을 본 그녀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너희들이 나보다 낫잖아. 냄새든 소리든 뭐든지 이상한 것이 있으면 알려다오."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라그닐드의 명령에 따라 사절단의 기사들은 거슬리는 것을 찾아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수상한 냄새를 찾아냈다.

"하나 둘 셋. 저 구석 쪽은 사람이 셋이 있는데 왜 냄새는 넷이지?"

유달리 후각이 좋은 기사 하나가 라그닐드가 들으라는 듯이 혼자말을 했다.

"으흠. 그러네 냄새가 넷이네."

"냄새는 넷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그러면 말이 안되는데. 그런데 이거 움직이는 것 아닌가?"

다른 기사들 역시 조용히 맞장구를 쳤다.

"어떻게 할까요? 라그닐드 경. 가서 한 번 쑤셔볼까요?"

"아니. 그러지 마. 우리끼리 처리하지. 나는 보이지만 경들은 안 보이는 것 같으니 냄새를 놓치지 말도록."

라그닐드와 사절단의 기사들은 숙소로 가 있겠다는 전언을 보내고 주변의 눈길을 끌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조심스럽게 만찬장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기사들은 라그닐드를 따라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영주성의 입구를 지나게 되었다.

조금만 더 가면 칼마르 시의 번화가로 연결되는 도로가 나오는 곳이었다.

그제서야 라그닐드는 이 추적을 끝내기로 했다.

그녀는 목표를 향해 달리며 연달아 앞으로 도약했다.

그리고 고양이처럼 높이 점프하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어깨가 그곳에 있었다.

그 순간 사절단의 기사들은 마법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나타난 여자를 볼 수 있었다.

라그닐드의 손에 어깨가 잡혀 있는 여자였다.

기사들은 다급하게 달려가서 지금까지 그들의 인식 밖에서 움직이던 여자를 잡았다.

라그닐드는 기사들에 의해 거칠게 다뤄지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보이지는 않는데 냄새가 나더군. 심지어 움직이기까지하고 말이지. 그런데 냄새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녀 복장의 여자 하나가 보이지 뭐야. 자신의 존재감을 이렇게까지 지울 수가 있다니 이렇게 직접 보면서도 믿어지지가 않네. 암살자로는 최상급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야. 그래. 그런데 너는 어디의 누구지?"

그러나 라그닐드의 질문은 답을 얻지 못했다.

라그닐드가 질문을 마치는 순간 은밀하고 치명적인 공격이 그들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사절단의 대표였던 라그닐드는 물론 기사들까지도 제대로 된 갑옷을 입지 않은 상태였다.

심지어 기사들조차 간단한 흉갑과 호신용 검이 그들의 무장의 전부였다.

그래서 갑자기 날아온 화살은 제대로 그들의 몸을 꿰뚫었다.

한 명은 머리에, 다른 한 명은 목에 화살을 꽂고 그 자리에 엎어졌다.

그러나 기습의 이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절단의 기사들이 화살이 날아온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화살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다.

다음에 날아오는 화살은 가볍게 휘두르는 손길 하나로 땅에 쳐박혔다.

"여자를 죽이려는 것인가 아니면 구하려는 것인가?"

"여자를 노리고 날아온 화살은 없습니다. 대장."

"그렇다면 여기를 덮치겠다고 올 놈들이 있겠군."

라그닐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칼을 든 두 명의 남자가 공격해 왔다. 그들의 뒤에는 창을 든 자도 하나 더 있었다.

모두 사절단의 기사들 못지 않은 기세를 풍기는 자들이었다.

라그닐드는 하녀복장의 여자를 구하기 위해 기사 못지 않은 느낌의 사람들이 나타나자 곧장 단검을 뽑아서 하녀복장의 여자를 찔렀다.

쉽게 도망가지 못하도록 종아리를 베고 발등에 단검을 찔러 넣은 것이다.

여자의 억눌린 신음과 함께 싸움이 시작되었다.

공격해온 자들의 실력은 기사 못지 않았다.

공격과 방어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 어렸을 때 부터 칼을 수련해 온 티가 팍팍 풍겼다.

칼을 맞댔을 때 부드럽게 칼을 돌리며 칼끝으로 기사의 손목을 베어버리는 기법은 숙련자가 아니면 엄두도 내기 힘든 기술이었다. 저거 잘못하면 상대의 손목을 베기 전에 그냥 찔리고 만다.

뒤에서 틈을 노려 창을 찔러대는 자도 위험하기 그지 없었다.

잠깐 정면의 적에게 집중하는 사이에 휙하고 들어온 창이 기사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갑옷을 제대로 입지 않았으니 이런 것도 치명상이 된다.

이대로라면 칼마르 백작가에서 지원이 오기도 전에 싹 다 죽을 판이었다.

라그닐드는 고함을 질렀다.

"본신을 드러내도 된다. 다 쓸어버려!"

그리고 라그닐드도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냈다.

흉기보다 더 위협적으로 보이는 발톱이 쓰러져 있던 여자의 허벅지에 다시 한 번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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