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59화 (59/248)
  • 59. 독이 든 술잔

    아르보그 선제후의 사절이 왔다고 해도 나의 일탈은 얼렁뚱땅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돌아오자마자 리네아 여백작부터 만나야 했다.

    "그대는 너무 무모했다."

    리네아 여백작은 나를 보자마자 화를 냈다.

    할 말이 없었다.

    내 미래의 기억이 나를 잠시 미치게 했으니 옆에서 보기에 쟤는 웬 지랄이냐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내가 몇 자 끄적여준 편지 한 장 들고 귀환한 기사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그 친구들에게는 내가 따로 보답을 해야 한다.

    "애쉬 남작이라는 말을 듣고 잠시 정신이 나갔던 모양입니다.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리네아 님."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가라앉은 기색으로 나를 대했다.

    "미안하다. 애쉬 남작이 그대와 원한이 있다는 사실을 감안했어야 했는데. 앞으로 기회가 있을 것이다."

    "저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귀족끼리의 원한이다.

    이쪽 세상의 기준으로는 대를 이어가며 복수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게 무난하게 해명하고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리네아 여백작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윌리엄. 약혼식을 올리자."

    "예?"

    아니, 대화가 왜 이쪽으로 튀나?

    내가 뭔가 대화의 흐름을 놓치고 있는 건가?

    "나는 예비 약혼자를 더 이상 잃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대도 내 약혼자가 되면 좀 더 조심해서 행동하겠지."

    나는 잠시 리네아 여백작을 바라보았다.

    미인이다.

    게다가 마인드도 훌륭하다.

    이 사람은 지금까지 잘 해 왔고, 앞으로도 잘 해 나갈 것이다.

    그건 내가 보증한다.

    직접 봤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나는 잘해 나갈 수 있을까?

    어리석은 질문이다.

    나는 회귀한 첫날 이미 선택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기로.

    그래.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한 번 가 보자.

    내 시선에 리네아 여백작의 얼굴이 붉어질 때,

    나는 그녀의 제의에 응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약혼하는 것까지가 계약 내용이었다.

    받을 것을 선불로 다 받았는데 계약을 어길 수는 없지.

    나는 정직한 사람이란 말이다.

    *

    리네아 여백작이 그녀의 약혼자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르보그 선제후의 사절단은 손님을 위한 별채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들은 생각보다 두 사람 사이가 돈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첫 번째 제안의 폐기를 고민해야만 했다.

    "둘 사이가 정말 좋은 것 같은데? 급한대로 갖다 놓은 가짜 약혼자는 아닌 것 같군."

    "라그닐드 님 말씀대로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저희가 처음에 추측했던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칼마르 백작가에서 키운 자일 거라는 것 말인가? 아무런 증거가 없잖은가. 증거가 없는데 함부로 예단하면 안 돼. 그냥 있는 그대로만 보자고. 둘의 사이가 좋다는 것은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이리저리 소문을 모아봤는데 사이가 나쁘다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백작에게 잘 보이기 위해 윌리엄 경이 무리하게 백작령의 유력자들을 숙청해서 두려워하거나 원한을 가진 자들이 있을 정도더군요. 리네아 여백작 역시 윌리엄 경에게 대하는 것이 보통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문제는 아직 정식으로 약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소문대로라면 그런 것은 의미가 없을 정도입니다. 어차피 조만간 약혼이든 결혼이든 할 것으로 보입니다."

    "좋아. 약혼자인 남작은 모르겠지만 리네아 여백작은 아직 어려. 본인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감정에 휘돌릴 수 밖에 없는 나이지. 첫 번째 제안은 폐기하는 것으로 하자고. 괜히 안 좋은 감정을 가지게 할 필요는 없지."

    라그닐드는 미리 준비해 놓은 제안 중 아르보그 선제후의 조카와의 약혼은 아예 언급도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의심스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혼 동맹 따위를 제안했다가는 동맹이 아니라 적을 만들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르보그 선제후가 라그닐드에게 요구한 것은 간단했다.

    칼마르 백작가를 끌어들일 수 있으면 최선이고,

    중립을 지킬 것을 확약받아 오는 것이 그 다음이었다.

    최악은 아르보그 선제후를 적대시하는 것인데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라도 제대로 파악할 것을 주문받았다.

    그리고 미래를 위해 낚시를 하나 던지는 것도.

    최선을 위해 노력하겠지만 가장 확실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결혼 동맹이 불가능하게 됐으니 칼마르 백작의 입에다 뭔가 근사한 것을 물려줘야 차선이라도 가능할 것 같았다.

    라그닐드는 자신이 준비한 근사한 것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으면 했다. 이것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 뿐 아니라 새로이 막시밀리안 공작이 된 바르거도 꽤나 큰 부담을 져야 했으니까.

    *

    아르보그 선제후로부터 온 사절단의 접견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루어졌다.

    "신성 마르스홀롬 제국의 선제후이시고, 아르보그의 공작이시며, 후딕스발과 외레브로의 군주이신 칼손 아르보그 공께서 칼마르의 백작이시며 자유도시 노르셰핑, 순스발, 트롤헤탄의 보호자이시고, 우데발라와 피테오의 친우이신 리네아 칼마르 공에게 안부를 전하셨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이고 선제후의 정식 사절이니까 인사말이 길어지는 것은 알겠는데 거창하기는 하다.

    본진 이외에도 멀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저런 식으로 과시하고 상대방의 멀티도 내가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인사말이다.

    그리고 피차 알 것은 다 아니까 엉뚱한 짓은 하지 말고 대화를 하자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절단의 대표로 온 라그닐드 경은 선제후의 가신 출신이라고 한다.

    영지를 관리하는 행정쪽 사람이 아니라 아르보그 선제후를 정무적으로 보좌하는 쪽이다.

    사절단의 대표로 보기 힘들만큼 젊어 보이는 여자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지위가 있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뜻도 된다.

    과연 그에 걸맞게 라그닐드 경이 내놓은 제안은 우리를 놀라게 했다.

    "막시밀리안 공작은 패트슨 남작과 올롭스 남작에 대해 봉신계약에 따른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모든 권리와 의무에 대해 해제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에 따라 패트슨 남작과 올롭스 남작은 자유로이 새로운 봉신계약을 맺을 수 있는 자격이 생겼습니다. 전부터 두 남작 가문과 교류가 있었던 아르보그 선제후께서는 이들의 봉신계약을 칼마르 백작님께 제안하는 것이 어떨까하는 의향을 저를 통해 보내셨습니다."

    아르보그 선제후의 사절을 면담하는 자리에는 나와 리네아 여백작 이외에도 영지의 중요 관리와 가신들이 모여 있었다.

    라그닐드의 제안이 공개되는 순간 모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리네아 여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리네아 여백작이 앉아 있는 의자 옆에 서 있던 나는 나를 향해 놀란 시선을 돌린 백작의 손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리네아 여백작은 순식간에 감정을 조절하고 다시 차가운 안색으로 돌아갔다.

    "귀족들간의 봉신 계약은 매우 중요합니다. 막시밀리안 공작께서 그런 결정을 하셨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군요. 라그닐드 경. 혹시 막시밀리안 공작의 가신이 같이 오지는 않았습니까?"

    "먼저 바르거 막시밀리안 공께서 새로운 막시밀리안 공작이 되셨다는 사실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전대 막시밀리안 공작과 그 분의 자제들은 비극적인 사고로 인해 유명을 달리하셨다고 합니다. 바르거 공께서 가문의 비극을 수습하는대로 연락을 주실 겁니다.

    그러니까, 아르보그 선제후께서는 바르거인지 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같은 선제후인 막시밀리안 공작을 제꼈고, 그 와중에 얻은 전리품 중 일부를 우리에게 주면서 잘 지내보자고 하는 건가?

    와! 우리는 지금까지 막시밀리안 공작의 휘하에 있는 남작들과 드잡이질을 하고 있었는데 아르보그 선제후는 단숨에 상대의 머리를 날려버리네?

    선제후들간에도 체급차이가 확실히 있는 모양이다.

    만약 아르보그 선제후가 작정하고 칼마르 백작령을 노렸으면 위험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느끼는 위협을 리네아 여백작 역시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차가운 얼굴이 풀리지 않는다.

    게다가 아르보그 선제후의 선물이 너무 근사해서 곤란했다.

    칼마르 백작령에 바로 붙어 있는 남작령이다.

    백작령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백번 낫다.

    그러나 정치의 세계에서는 받은 만큼 내줘야 한다.

    특히, 힘이 약한 쪽에서는 더욱 그렇다.

    충분히 내주지 않으면 반드시 보복을 당한다.

    그러니 만약 아르보그 선제후가 원하는 것이 너무 크면 아무리 멋진 제안이라고 해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리네아 여백작의 질문은 직설일 수 밖에 없었다.

    "라그닐드 경. 아르보그 선제후의 관대한 제안은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아르보그 선제후께서도 원하시는 것이 있을텐데 무엇을 원하시는 건가요?"

    "칼마르 백작령은 언제나 중립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중립이기를 원합니다."

    대가가 너무 싼데? 뭔가 미끼 아닌가?

    칼마르 백작령이 선제후들 사이에서 중립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일을 요구하다니 오히려 이상하다.

    그러나 당연한 일을 요구하니 거부한다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나는 찜찜했지만 리네아 여백작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대가를 치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아르보그 선제후께서는 원하시는 것을 얻으셨다고 전해 주셨으면 해요. 라그닐드 경."

    "감사합니다. 백작 각하. 패트슨 남작은 손님의 자격으로 이곳에 계시니 새로운 봉신계약을 맺는데 별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올롭스 남작은 영지전 중에 전사했기 때문에 새로운 올롭스 남작을 세워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대의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아르보그 선제후의 사절단은 뭔가 아쉬워하는 기색이 엿보였지만 원하는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인지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였다.

    우리쪽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보물이 갑자기 생긴 셈이어서 오히려 어쩔 줄 몰라했다.

    그렇게 모두가 행복해하고 있을 때 라그닐드가 한 가지 제안을 해 왔다.

    "얼마 후면 바르거 경이 막시밀리안의 공작이자 선제후임을 선포할 것입니다. 그 때 아르보그 선제후 님 뿐 아니라 다른 선제후들께서도 몇 분이 오시기로 했습니다. 새로운 선제후의 탄생을 축하해주기 위해 어려운 발걸음을 하시는 거지요. 칼마르 백작가와 새로이 봉신 계약을 맺을 분들이 원래 막시밀리안 공작가와도 깊은 관계가 있었으니까 리네아 백작님과 약혼자 분도 함께 방문하셔서 축하해주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황제께서 귈위하신 이후로 오랫동안 이런 자리가 없었지요."

    정말 훅 들어오네.

    그런데 이 초청을 거부할 수가 없다.

    별다른 이유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이 초청을 거부하면 분명히 문제가 생긴다.

    정치적인 중립을 선언하고 장사나 하는 백작령이라는 인식에서 자신들을 경계하고 적대하는 백작령으로 인식이 바뀌어도 할 말이 없게 된다.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

    리네아 여백작 역시 그것을 알았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겠지요. 날짜가 잡히는대로 알려 주세요. 함께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르보그 선제후님과 막시밀리안 공작님이 모두 기뻐하실 겁니다."

    아마도 원래 목적이 이것이었을 거다.

    다른 것은 혹시 모르니까 재확인한다는 의미로 던져 본 것이고.

    낚시에 걸린 기분이지만 어디서든지  하나나 둘쯤 건사하는 것은 걱정이 되지 않는다.

    진짜 걱정되는 것은 이 일로 칼마르 백작령의 중립성이 손상당할까 하는 점이다.

    막시밀리안 공작을 손에 쥔 아르보그 선제후의 파벌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것은 곤란했다.

    가서 잘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글렌 공작이라도 끌어들여나 하나?

    사절단의 환송을 위한 만찬에서도 내 나름대로의 고민을 이어갔다.

    속으로는 이런저런 대안을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드 사교적인 미소를 지으며 사절단의 기사와 대화를 나눴다.

    "의외군요. 주로 다루시는 무기가 없다니."

    "그래서 전투망치를 계속 사용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예 새로 만들어서 말이지요."

    "그것도 괜찮습니다. 손에 익으면 정말 위협적입니다."

    대화를 나누며 옆에 있는 술을 한 잔 마시는 순간이었다.

    이거 기분이 이상한데.

    나 아무래도 독을 마신 것 같아.

    씨발!!

    나는 미니맵을 보았다.

    붉은 점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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