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과거를 부수고 칼마르로 돌아왔다.
밤이 되었다.
어둠을 갑옷 대신 두른 나는 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광산 아래의 건물로 향했다.
왜, 어디로 광산 노동자를 데려간 거지?
그리고 너희는 누구지?
애쉬 남작?
그런 귀족 같지도 않은 자의 이름을 댄다면 나는 많이 실망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실망한 회귀자가 어떤 짓까지 할 수 있을지는 나도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내가 볼 때 애쉬 남작 따위는 별 것 아니었다.
그냥 돈에 미친 귀족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 돈에 미쳐서 영지민을 팔아치우고 가신의 목숨도 가볍게 취급했을 뿐이다.
그는 그러다가 자신의 목숨도 가볍게 잃었었다.
그의 암염 광산이 무너질 때 탈출한 초짜 강도에게 목을 따인 것이다.
자업자득이었다.
애쉬 남작은 신경 쓸 것 없다.
나중에 다시 복수를 해 주면 된다.
여기서 진짜 중요한 자들은 이 암염 광산을 운영하고 있는 자들이다.
이 곳을 지키기 위해 애쉬 남작이 파견한 병사는 경비견에 지나지 않는다.
내 기억으로는 병사들을 통솔하기 위해 머무르고 있는 애쉬 남작의 기사도 정기적으로 황금을 챙겨서 갔을 뿐 암염 광산에는 거의 얼굴도 들이밀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나는 이곳의 최고 책임자인 모베르그를 내 목표로 찍었다.
광산 아래의 건물은 크게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노예 노동을 하는 광산 인부를 수용하는 건물과 관리자들의 거주 공간.
목책을 세워서 둘러싸고 병사들로 지키고 있는 쪽은 광산 인부를 수용하는 건물 쪽이다.
상대적으로 관리자들의 거주 공간은 접근하기가 쉬웠다.
나는 어둠을 타고 이곳의 최고 책임자인 모베르그의 업무 공간으로 향했다.
그의 사무실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경비병들의 시선이 광산 인부들의 숙소에 집중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관리자들의 거주하는 건물 쪽에도 경비병이 없는 것은 아니다.
두 명씩 짝지어서 순찰하는 경비병들을 조용히 침묵시킨 후 모베르그의 사무실에 붙었다.
사무실 안에는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서서 불안하게 돌아다니며 떠들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의자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다시 강조하겠지만 시간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모베르그 조합장. 우리는 명령받은 대로 하면 되는 거요. 다른 생각은 하지 마시오. 광산은 무너뜨리고, 병사와 인부는 모두 죽이고, 건물에는 불을 지르면 되는 거요. 그게 우리가 이곳을 떠날 때 해야 할 일이오."
어딘지 성급하고 불안하게 느껴지는 어조였다.
그에 비해 대답하는 자는 묵직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는 기억에 있다.
이것은 모베르그의 목소리다.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폴손 님. 언제 실행하실지 그것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통나무를 수집해 오는 자들이 다 모이는대로 곧장 실행하도록 합시다. 영지전이 너무 일방적으로 끝나서 더 이상 남아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요즘 문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칼마르 백작가의 군대가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충돌이 없을 수가 없겠지. 오늘도 같은 조의 조원을 다 잃고 통나무까지 다 잃어 버린 멍청이가 하나 귀환했는데, 이 놈들이 실패작이라서 그런지 티미한 것이 영······"
"뭐, 별 일이야 있겠습니까? 정찰에 더 신경을 써 달라고 애쉬 남작의 기사에게 요청할 테니 칼마르 백작가의 군대가 여기까지 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여기는 엄연히 애쉬 남작령이니까요."
모베르그보다 상급자가 있는데?
모베르그보다 더 윗선으로 보이는 자가 사무실에서 떠들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서 강제 노동을 하며 구르고 있을 때는 모베르그가 하늘처럼 높아보였는데, 지금 보니 그냥 실무자 중 대표 정도 되는 위치인 모양이다.
이러면 잡아갈 대상이 달라질 수 밖에 없지.
폴손이라고 불린 자는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모베르그를 남겨두고 먼저 사무실을 떠났다.
나는 그가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의 뒤에서 목에 밧줄을 걸어 당기며 그대로 등에 업었다.
내 등 뒤에서 아무 소리도 못 내고 목에 감긴 밧줄을 풀려고 필사적으로 버둥대던 폴손은 몇 초만에 금방 의식을 잃고 축 늘어졌다.
그대로 산으로 올라가서 미리 봐 둔 작은 동굴로 폴손을 데려갔다.
소음이 새어 나가지 않게 동굴 입구도 잘 막았다.
경동맥이 눌려서 기절했던 폴손은 시간이 흐르자 저절로 깨어났다.
그는 자신이 묶인 채 낯선 동굴에 있는 것을 알게 되자 공포가 서린 눈동자를 하고 두리번 거렸다.
이거 의외로 고문이나 협박이 통할지도?
낮에 잡았던 자들은 통증을 아예 느끼지 못해서 고문이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이 자는 그들과 달랐다.
감각이 살아 있고 눈빛도 탁하지 않다.
그냥 피부만 질겼다.
소위 성공작인 모양인데, 성공작이라는 것이 독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닐 것 같은데.
나는 단검과 비도를 그가 볼 수 있게 쭉 늘어놓고 그의 다리를 당겨서 나무와 밧줄로 고정했다.
그리고 입을 틀어막은 헝겊을 끄집어 냈다.
그는 나를 뚫어질 것처럼 노려보았다.
"이름?"
"너는 누구냐? 감히 이러고도 네 놈이 무사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제법 호통을 치기는 했지만 눈빛이 흔들린다.
이거 통하겠다.
나는 그의 고함이 끝나기도 전에 종아리에 단검을 꽂았다.
비명을 지르려는 놈의 입에 다시 헝겊을 쑤셔넣었다.
강제로 잡아 늘려도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것처럼 부릅 뜬 눈이 비명을 대신했다.
단검을 빼고 그 자리에 지혈제를 뿌려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시간은 많고, 지혈제는 별로 없군."
반응은 보지도 않았다.
다시 한 번 찌르고 지혈제를 뿌렸다.
"살고 싶다면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돼."
"이름 같은 것. 어려운 질문 아니잖아?"
입에 물린 헝겊은 빼지도 않고,
상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내가 할 말만 한 후에
반복해서 찌르고 지혈제를 뿌렸다.
해야 할 일이라서 하고는 있지만 구역질이 났다.
아무리 내가 나치의 정치장교라고 스스로 세뇌를 해도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동까지 하게 되니 이건 정말!
고문은 내 영혼까지 파괴하는 느낌이었다.
영화에서 고문 장면을 보는 것과 본 것을 직접하는 하는 것의 차이는 너무 컸다.
야한 소설을 읽는 것과 직접 하는 것의 차이보다 더 크다.
더 이상 구역질을 참지 못하겠다고 느꼈을 때,
드디어 이 자의 눈빛이 죽었다.
나는 그의 입에서 헝겊을 끄집어 냈다.
다시 질문을 시작했다.
"이름은?"
"폴손."
제대로 된 답변이 나왔다.
고문을 받은 자가 일단 답변을 하기 시작하면 둑이 무너진 것처럼 속에 있는 말을 다 쏟아내게 된다.
적어도 폴손은 자신이 아는 것을 다 토해내게 될 것이다.
잠시 후 나는 어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보그 선제후의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나?
그 사람 막시밀리안 공작하고 사이가 별로 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칼마르 백작령의 북서쪽을 차지하는 패트슨 남작, 애쉬 남작, 올롭슨 남작, 맷슨 백작까지 다 막시밀리안 공작 쪽 사람들이다.
그런데 애쉬 남작이 아르보그 선제후의 도움을 받아서 암염 광산을 운영하고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막시밀리안 공작도 명색이 선제후이고 한 파벌의 수장이다.
그의 의도에 따라 영지전을 하겠다고 나서는 귀족들이 있을 정도로 휘하 귀족에 대한 장악력도 좋다.
그런데 일개 남작이 뒤로 다른 수작을 하고 있다고?
이거 의외로 막시밀리안 공작이 약한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이 칼마르 백작령에 자꾸 손을 뻗는 것이 돈이 없어서였지.
이거 생각 좀 해 봐야 할 문제 같은데.
그리고 과거의 내 PTSD.
정기적으로 광산 인부들 중 일부를 데려가던 자들의 정체가 바로 폴손을 우두머리로 하는 비밀 결사인 것도 알게 되었다.
이들도 역시 아르보그 선제후에 속한 무리였다.
마스터 요한이 수장으로 있는 무예 집단이 칼마르 백작가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아르보그 선제후 밑에도 이런 저런 단체가 있는 것이다.
이들 역시 그렇게 아르보그 선제후의 후원을 받는 단체 중 하나였다.
인간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연구를 한다고 하는데 필요한 실험체를 이 광산에서 조달해 가는 것이었다.
신비가 있는 세상이라서 신비에 대해 연구하다가 이렇게 흑화하는 단체가 나오기도 하는 모양이다.
잠재력의 극대화라니.
성공했다고 내놓은 것이 고작해야 피부가 질겨지는 것인데 그게 무슨 잠재력의 극대화인가.
그리고 피부가 질긴 자라도 칼에 찔리면 구멍이 나고 죽는다.
피부가 가죽이 아니라 철판이 된다고 해도 전투 망치의 스파이크로 내려치면 구멍이 펑펑 뚫릴 거다.
나는 이들의 실험이 목숨을 보호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폴손에게 증명해 주었다.
폴손의 질긴 피부 따위는 단검 아래서 일반인의 피부와 다른 점을 보이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광산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만약 이번에 벌어진 영지전 때문에 칼마르 백작가의 군대가 가까이 진군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이들은 계속 암염을 캐고 정기적으로 광산 인부를 실험체로 데려 갔을 거다.
역시 용서할 수 없었다.
자기 파벌 수장의 눈을 피해 암염 광산을 운영하려고 사람들을 납치해다가 광산 인부로 부려먹고, 그걸 또 실험체로 팔아넘기다니 애쉬 남작도, 포르모가라고 불리는 이 비밀 결사도 역겨운 자들이었다.
내 마음 속에 맺힌 무엇인가를 풀어버리기 위해서라도 이 곳은 용납하면 안 되겠다.
아직 밤이 지나지 않았다.
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어둠이 아직 나를 보호하고 있을 때 나는 건물 사이로 스며들었다.
순찰을 도는 자들을 마저 처리하고 창고에서 기름을 꺼내서 건물마다 뿌렸다.
그리고 불을 질렀다.
광산을 관리하는 자들이 기거하는 건물 몇 동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서 그런지 불길은 위협적으로 보일 정도로 치솟았다.
당장에 비상종이 울리고 비번이던 사람들이 뛰어나왔지만 기름을 잘 부어놓은 목재 건물들은 폭우가 쏟아져도 꺼지지 않을 것처럼 맹렬하게 타올랐다.
불이 날뛰는 동안 나는 감시탑으로 달려갔다.
자고 있던 광산 인부들이 상황을 깨닫고 탈출을 시도할 때 방해가 될 만한 것들을 다 치워버리기 위해서였다.
나무로 된 감시탑은 사다리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빠르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나는 어둠 때문에 피아도 식별 못하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경비병들을 잡아서 그대로 감시탑 밖으로 던져버렸다.
삶과 죽음은 그들의 운명에 맡겨 두고 곧장 다음 감시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도 똑같은 일을 벌였다.
과연 그 사이에 자고 있다가 몰려 나온 인부들은 슬슬 눈치를 보다가 도주를 시도했다.
이제 새벽 미명에, 건물마다 맹렬하게 불길은 오르고, 감시해야 할 병사들, 순찰해야 할 병사들은 언제 당했는지도 모르게 쓰러져 있으니, 총체적 난국이었다.
도망치는 인부들을 잡아야 할 병사들도 우왕좌왕하고 관리자들도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인부들의 대부분이 목책을 벗어났다.
그 이후는 인부들이 알아서 도망칠 일이다.
나는 암염 광산으로 가서 이곳의 인부 역시 탈출 시켰다.
이쪽은 병사는 거의 없고, 감시하는 자들만 조금 있는 수준이어서 오히려 쉬운 편이었다.
입구를 막고 있던 병사 몇 명의 머리를 날려버리자 감시자들은 저항할 엄두도 못내고 앞을 다투어 도망쳐 버렸다.
광산의 깊이도 아직 얼마 되지 않아서 안에 대고 고함을 치는 것으로 상황을 알려주었다.
이쪽의 인부들 역시 허겁지겁 지상으로 올라와서 내게 감사를 표하며 산 속으로 흩어졌다.
나는 속에 맺힌 무엇인가가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몰랐을 때는 두려웠지만 알고 보니 별 것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칼마르 백작령으로 복귀하니 아르보그 선제후의 사절 역시 막 도착한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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