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암염 광산에서
상태창을 내게 준 알 수 없는 존재는 설명서나 도움말을 같이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상태창을, 특히 미니맵을 이리저리 테스트를 하면서 눈치껏 사용 경험을 쌓아야 했다.
좀 애매한 부분은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사용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본다면 지금 이렇게 점으로만 표시된다고 해서 우리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만나고 나서야 붉은 점으로 바뀌기도 하니까.
어떤 떄는 붉은 점이었다가 그냥 점으로 표시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아예 점이 없어지기도 했다.
정보가 뒤늦게 업데이트가 되어서 '아니, 저 놈들이 적이었다고!' 하고 후다닥 색을 바꾸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적군이었지만 이제는 적군이 아니니까 바꾼다.'라며 반응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심지어 '어, 얘는 어디 갔지?' 하면서 슬쩍 점을 지우기도 하고 말이다.
뭐랄까? 상당히 인간적인 반응을 한다고나 할까?
아마 내게 상태창을 준 존재는 아카식 레코드 같은 것과는 관련이 없는 것 같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정보를 가진 존재는 절대로 아니다.
미니맵 역시 정보의 한계가 명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주변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사기적인 정보우위를 가지게 된다.
"저 쪽, 좀 더 올라가서 왼쪽으로 꺾어서 보면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보딜 경은 나를 따라오고 에이크만 경은 병사들을 인솔하도록."
모두 내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내가 촉이 이상할 정도로 좋다는 평판은 이럴 때 도움이 됐다.
다들 내가 저 쪽에 사람들이 있다고 했으니 있다고 당연히 있다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보딜과 함께 앞서서 달렸다.
순식간에 꺾어지는 길목에 도착한 후 조심스럽게 산길을 따라 움직였다.
과연 얼마 이동하지 않아서 5명의 남자들을 끌고 가는 5명의 수상한 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추레한 복장의 남자들이 줄에 묶인 채 무기력한 모습으로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을 몰고 가는 자들은 모두 진한 회색의 로브를 걸치고 두건을 썼다.
로브의 색깔만 아니라면 패트슨 남작의 방에서 본 그 기분 나쁜 놈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했다.
"보딜 경. 내가 먼저 치고 나갈 테니까 포로들을 확보하게."
지시를 하자마자 나는 곧장 산길을 따라 달려갔다.
우리와 그들 사이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내가 그들을 보고 칼을 꺼냈을 때 그들도 나를 보았다.
미친 듯이 달려오는 칼을 든 기사.
그리고 그의 뒤에는 기사가 한 명 더 뛰어오고 있다.
이러면 보통의 병사들은 도망쳐 버린다.
그러나 로브를 입은 자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한 뼘이 조금 넘는 길이의 단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들은 칼에 찔리고 베이는 것에 아무 두려움이 없다는 듯 방어에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무조건 나를 끌어안고 단검으로 찌르려고 했다.
그런 자가 한 명도 아니고 다섯 명이다.
평범한 기사라면 몸으로 밀어붙이는 저들의 기세에 밀려서 바닥에 넘어진 채 단검이 얼굴로, 겨드랑이로 찔러오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평범한 기사가 아니다.
온 몸을 던지며 덮쳐오는 로브를 입은 자에게 강력한 일격을 내리쳤다.
그의 팔이 로브의 팔부분과 함께 날아갔다.
그대로 몸통 박치기로 그자를 날려버리며 다음에 덮쳐오는 자를 향해 위로 칼을 올려 쳤다.
날카로운 칼의 기세는 적의 아랫배에서 가슴, 얼굴까지 일직선으로 그어 버렸다.
그리고 손으로 그 자를 밀치며 다음에 오는 적을 향해 비스듬하게 칼을 내리쳤다.
적의 머리가 로브의 두건에 담긴 채 바닥을 굴러갔다.
머리를 잃은 적은 쓰러지지도 않고 뻣뻣하게 서서 피를 뿜어내다가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단 한 호흡에 내가 벌인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 두 명이 남아 있었다.
저 앞쪽에서 나를 향해 달려오던 두 명의 로브 입은 자들은 동료들이 한 순간에 전멸하는 모습을 보자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 보더니 몸을 돌려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것도 산길을 따라서 도망을 치는 것이 아니라 산길을 벗어나서 나무 사이를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재빠르게 팔에 감아놓은 비도집에서 비도를 잡아채며 연달아 던졌지만 하나를 잡았을 뿐이다.
숲의 나무가 방패 역할을 해준 나머지 하나는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운이 좋은 자였다.
"윌리엄 경. 추격할까요?"
뒤늦게 따라온 보딜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도망치는 자는 산비탈을 따라 아예 굴러가고 있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어디가 부러졌어도 벌써 부러졌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그는 가끔 나무에 부딪치면서도 엄청난 속도로 도망치는 중이었다.
벌써 나무에 가려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저걸 뒤쫓느니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자들을 심문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내가 칼질을 한 자들 중에서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자는 두 명에 불과했다.
한 팔이 날아간 자와 비도에 맞고 쓰러진 자.
둘 다 입은 멀쩡했다.
그렇다면 말은 할 수 있겠지.
나는 먼저 그들의 로브를 벗겼다.
역시 그들은 평범하지 않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삐쩍 마른 몸, 그리고 뻣뻣한 피부.
체모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내가 패트슨 남작을 납치하러 갔을 때 제거했던 자와 같은 느낌이었다.
"보딜 경. 저자들의 팔을 단검으로 그어 보게."
내 명령에 보딜 경은 두말하지 않고 자신의 단검으로 그들을 팔을 쭉 그었다.
날카로운 단검으로 그었음에도 처음에는 붉은 흔적만 나더니, 나중에 힘을 주고 그으니까 그제서야 피가 솟았다.
"피부가 이상하지?"
"예. 마치 마른 가죽이라도 한 겹 씌운 것 같은 느낌입니다."
역시 내가 잘 못 느낀 것이 아니었다.
애쉬 남작의 암염 광산에서 주기적으로 사람을 데려가던 자들.
패트슨 남작의 방에서 내가 죽인 자.
그리고 사람들을 납치해서 끌고 가던 이들.
모두 같은 무리일 가능성이 컸다.
나는 눈에 불을 켜고 살아남은 두 명을 신문했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에 면역이라도 있는 듯 신음하나 흘리지 않았다.
이 자들의 눈을 들여다보니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에 가까웠다.
고통에 아주 둔감한 것이다.
칼로 찔러도 손가락으로 누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고문으로는 답이 안 나왔다.
포기하는 수 밖에.
나는 엉망이 된 그들을 편하게 해주었다.
뒤늦게 도착한 나머지 병력은 묶인 채 끌려가던 자들을 챙겼다.
모두 올롭스 영지의 영지민이었다.
그들은 자신들도 죽는 줄 알고 공포에 질려 있다가 우리가 칼마르 백작령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안심을 하고 알고 있는 것들을 몽땅 털어놓았다.
왠지 두 눈에 여전히 공포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았지만 필사적일 정도로 매우 협조적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납치 행각이 시작된 것이 상당히 오래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지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공연히 납치가 벌어졌다는 증언이 있었다.
어쩌면 영지전이 벌어지기도 전부터 납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는 납치에 대한 소문을 영지전이 벌어지기 전에 들었다고 했다.
모두 피난민으로 떠돌다가 잡힌 자들이었다.
그들에게서는 더 이상 들을 만한 내용이 없었다.
나는 투구와 정강이받이, 스커트, 건틀릿 등을 차례로 풀어서 내려놓았다.
흉갑과 완갑의 일부만 남기고 복장을 정리한 후 무기도 점검했다.
그 모습을 본 보딜이 놀라서 나섰다.
"윌리엄 경. 무엇을 하고 계신 겁니까? 설마 혼자서 정찰이라도 가시겠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부대와 함께 모두 돌아가도록. 나는 정찰을 좀 더 하고 백작령으로 복귀하겠다."
"혼자서는 안 됩니다. 윌리엄 경."
"그렇습니다. 위험합니다."
대번에 반대가 튀어나왔다.
그게 정상이다.
어떻게 영주의 예비약혼자를 혼자서 적진을 돌아다니라고 내버려 두나?
당장에 문책을 당해도 할 말이 없지.
그래도 억지를 좀 써야겠다.
암염광산을 보고 싶어서 못 견디겠거든.
하루하루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칠 때,
그 때 내가 있던 곳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고.
"몸을 숨기고 조용히 돌아다닐 생각이다. 그리고 나 하나가 가는 것이 오히려 더 안전하다. 내가 따로 서신을 적어 줄 테니 엘리아슨 경에게 전해 주도록."
나는 기사들이 책임을 면할 수 있도록 서신을 적어서 맡겼다.
그리고 아직도 나를 말리려는 기사들을 놔두고 산으로 들어갔다.
애쉬 남작의 암염 광산 위치는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었다.
탈출할 때야 정신이 없어서 어디가 어딘지 몰랐지만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 된 것이다.
내가 길잡이를 따로 구하지 않은 이유도 그래서다.
어디로 가야할지 아니까.
그래도 혹시 납치된 자들이 애쉬 남작의 암염 광산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갔을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지는 않고 산길에 남은 흔적을 꾸준히 살피면서 이동했다.
산길이라고 하지만 등산로 같은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길이 생길 정도로 사람이 많이 다니는 것도 아니고, 일부로 길을 만들 정도의 수고가 필요한 위치도 아니다.
그냥 산짐승이 지나고 어쩌다 사람이 지나고 하면서 다른 곳보다 다니기에 조금 더 편하게 만들어진 곳을 산길이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 곳이니 여러 명의 사람이 지나가면 금방 티가 난다.
상당한 기간동안 여러 명의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지나갔을 테니 따로 착각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래서 나는 예상보다 빠르게 애쉬 남작의 암염 광산에 접근할 수 있었다.
잡혀간 사람들의 흔적이 모두 애쉬 남작의 암염 광산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암염 광산이 위치한 곳은 애쉬 남작령 외곽의 산이었다.
올롭스 남작령과 애쉬 남작령 사이를 지나서 칼마르 백작령에서 끝나는 산맥의 지류에 속하는 여러 산들 중 하나에 암염 광산이 위치한 것이다.
아마 산맥을 타고 흐르는 거대한 암염의 한 갈래가 아닐까 싶다.
나는 암염 광산의 입구를 찾아 조심스럽게 주변 산을 탐색했다.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소금캐는 광부들의 숙소가 있을 테니 암염 광산의 위치를 특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역시 수색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광부들의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목책으로 둘러싸고 감시탑에서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여러 동의 건물이 산골짜기에 숨어 있었다.
목책과 감시탑.
기억에 있는 모습이었다.
제대로 위치를 찾아온 것이다.
지금은 낮.
야간조의 광부들이 잠을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리고 캐온 암염을 정리하는 사람들은 목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의 한 쪽에서 암염을 자루에 넣고 있을 때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목책 밖의 건물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암염 광산을 운영하는 사람들.
광부들을 주기적으로 다른 곳으로 데려갔던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들어야 할 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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