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납치.
칼마르 백작령의 북쪽으로 베르그렌 남작령이 있고, 그 북쪽으로 남손 남작령이 있다.
모두 글렌 공작의 파벌에 속한 자들이고 이번 영지전에서 칼마르 백작령의 군대에 패배한 자들이다.
칼마르 시라는 거대 상업도시를 중심으로 농촌과 산촌이 산재해 있는 칼마르 백작령과 달리 두 남작령은 모두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평범한 영지에 지나지 않는다.
자급자족을 기본으로 하는 농업 위주로 영지의 경제가 돌아간다는 의미다.
자급자족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경제는 잉여를 많이 남길 수 없는 구조다.
농민이 열심히 농사를 지어봐야 적어도 절반을 세금이나 소작료 명목으로 넘기고 남은 것으로는 가족을 건사하기도 빠듯하다.
만약, 특별세를 내야 한다든가 농사가 좀 안됐다든가 하는 식으로 농사꾼의 손에 남는 비율이 줄어들면 당장 생계에 위협을 받는 것이다.
여기에 보탬이 되는 것이 비공식적인 생산활동이다.
구황작물을 거두고, 주곡이 아닌 잡곡도 경작하고,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동네 사람의 일을 돕고 대가를 받기도 하고, 숲에서 채취(사냥이 아니다!)도 하면서 만들어내는 경제 규모가 의외로 상당하다.
영주님이 전쟁을 벌이겠다면서 특별세를 거두고 사람을 끌고 가도 버틸 수 있는 힘이 여기서 나온다.
덕분에 좀 더 무리를 한다면 한두번 정도는 강제 징발도 견뎌낼 수 있다.
노동력을 제공할 수 없는 늙은이와 아이를 줄이고,
기아에 가깝게 극도의 내핍을 하면서 견디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은 농촌 특성상 불가능하다.
강제 징발 한두번이면 비축하고 있는 잉여가 말라버린다.
남은 것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남겨놓은 씨앗과 생존을 위한 약간의 식량 뿐.
이런 상황까지 가면 징발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병사들이 약탈을 하는 것이다.
농촌 사람들은 씨앗을 내놓을 바에는 차라리 죽을 테니까.
칼마르 영지군이 베르그렌 남작령을 지나는 동안 목격한 것이 바로 그런 약탈의 흔적이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도 멀쩡하게 수십 호가 모여 있던 마을이 사람 하나 찾아 볼 수 없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집은 불에 타서 재만 남았고, 쓸만한 가재도구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마을 앞의 농토도 황무지로 변하고 있었다.
"베르그렌 남작이 글렌 공작의 열렬한 추종자라는 소리는 못 들은 것 같은데?"
"열렬한 추종자가 아니라면 뭔가 크게 약속을 받은 것이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영지를 이렇게 까지 방치할 리가 없지."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문 대대로 이어받아 온 영지를 이렇게 망가뜨리다니 영주의 자격이 없는 것은 분명해."
같이 온 기사들이 나지막하게 나누는 대화가 내 귀에도 들려왔다.
영지군 역시 근본이 농촌 사람들이라서 충격을 받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둔전병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는 많이 들었겠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또 다르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광경을 보는 것이 처음이 아니다.
그래서 이들이 아직 모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겉보기와 달리 이렇게 사람이 다 죽어버린 것 같은 마을에서도 살아날 사람은 살아남아서 도망치는 법이다.
과연 추수 후의 밀밭처럼 싹 쓸려나간 것 같았던 베르그렌 남작령의 주민들이 멀리서 슬슬 모습을 나타내더니 우리가 근처의 소도시에 진입했을 때는 남작령의 관리들을 앞세우고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그들은 잠시 눈치를 보며 우리와 대화를 나누다가 더 이상 위험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숨겨두었던 금과 귀중품을 가지고 백작군과 함께 움직이는 상인들에게 몰려가서 식량부터 거덜 내 버렸다.
그런 모습은 남작령을 지나면서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었다.
칼마르 백작령에 대해 딱히 악감을 가진 자들은 없었다.
대신 그들은 남작령을 약탈하고 파괴한 막시밀리언 공작 계열의 귀족인 올롭슨 남작과 맷슨 백작에 대해서 저주를 퍼붓고 자신들이 당한 약탈과 파괴에 대해 울분을 토로했다.
그들은 영주인 베르그렌 남작에 대해서도 대놓고 욕설을 퍼부었다.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우호적이라고 하기도 뭣하고 비우호적이라고 하기도 뭣한 베르그렌 남작령의 분위기 속에서도 해야 할 일은 빠르게 처리해 나갔다.
도적떼로 변해버린 낙오병과 용병들을 토벌하고, 치안이 무너진 도시의 치안을 회복하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일은 식량을 공급하는 일이었다.
상인들이 끌고 온 식량 마차만 들어가면 웬만한 일은 다 해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괴된 촌락과 살해된 사람이 너무 많아서 과거의 베르그렌 남작령으로 돌아가기에는 많이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베르그렌 남작은 글렌 공작 계열아니었던가?
글렌 공작과 막시밀리언 공작을 대신해서 벌어진 대리전에서 글렌 공작 계열이 이긴 쪽이고.
그런데 이긴 쪽이 이 모양이면 진 쪽은 도대체 어떤 상황이라는 거지?
내 의문은 며칠 후에 풀렸다.
올롭슨 남작령에 진입한 우리들이 맞닥뜨린 것은 역시나 파괴된 촌락과 황폐해진 농토였다.
지금까지 베르그렌 남작령에서 본 것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영지전이랍시고 서로 개싸움을 벌였다고 하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처음에는 베르그렌 남작령의 상황과 크게 차이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올롭스 남작령은 군데군데 산재해 있던 촌락 뿐 아니라 소도시조차 전면적인 약탈의 대상이 되어서 멀쩡하게 서 있는 건물이 몇 없을 정도였다.
살아 남은 사람들 역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기에 바빴다.
멀리서 우리의 그림자를 보기만 해도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것이 오히려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무슨 꼴을 당하면 저렇게 외부인을 두려워하게 되는 걸까?
우리의 의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 눈빛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올롭스 남작의 관리 한 명이 해 주었다.
그는 자신이 징세관 휘하에 있던 징세원 중 하나였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한 팔은 잃었지만 걷는 것은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 자였다.
그는 몇 모금의 멀건 죽을 마시고 난 후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막시밀리안 공작이 약속한 지원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자금이 좀 오고 기사도 몇 왔다고 하는데 갑자기 모든 지원을 끊어버려서 올롭슨 남작님이 맷슨 백작에게 심하게 항의를 했었습니다. 맷슨 백작은 좀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하다가 소식이 없어서 알아보니까 먼저 항복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우리도 어쩔 수 없이 항복을 했습니다. 비겁한 새끼. 그리고 보시다시피 우리는 완전히 털렸습니다. 용병이든 영지병이든 상관없이 다들 약탈에 진심이라서 남아난 것이 없습니다. 항복 후에는 더 극성으로 털어 가더군요."
베르그렌 남작령의 사람들이 식량 대금으로 지불한 금과 귀중품에는 이 사람들의 지분도 있겠다.
"영지전이 끝났는데 왜 사람들이 영지 복구를 위해 나서지 않는 건가? 영지의 관리들은 뭘하고 있는 거지?"
내 질문에 외팔이 관리는 자신의 잃어버린 팔 쪽에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힘없이 말했다.
"남작님. 이 팔은 영지전이 끝난 후에 잃은 겁니다."
"도적질을 하고 다니는 용병이 남아 있다는 것인가?"
"용병이 아닙니다. 조직적으로 영지민을 납치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치안이 무너진 영지를 노리고 날뛰는 도적떼?
있을 수 있다. 없으면 오히려 이상하지.
전쟁 후에는 탈영병과 계약이 끝난 용병이 흔하니까 도적도 흔하다.
그게 정상이다.
그러나 영지민을 납치해 가는 수상한 자들?
그것은 좀 이상한데?
그리고 영지민을 납치해서 뭐 하려고?
원래 칼마르 백작령의 영지군이 확보하려던 지역은 글렌 공작의 파벌에 속한 두 남작의 영지였다.
영지전의 보상이 끝날 때까지 중요 도시를 점령하고 징세권을 가져오는 것과 글렌 공작에 대한 노골적인 견제를 외부에 보여주는 두 가지가 남작령으로 향한 영지군의 주요 목적이었다.
우리는 이미 두 가지 목적을 모두 달성했다.
올롭스 남작령까지 넘어온 것은 정찰의 의미가 강했다.
그래서 기사 몇 명과 영지군 백인대 하나가 여기까지 온 전력의 전부였다.
보급도 짐말에 실은 것과 각자 가지고 있는 식량 약간 뿐이었다.
이런 전력으로 도적떼로 타락한 탈영병을 토벌하는 것도 아니고 영지민을 납치해 가는 뭔가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자들을 추격한다는 것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이다.
전력도 전력이지만 당장 보급이 안 된다.
"그래도 대충 어떻게 생겨먹은 자들인지 그리고 어느 방향으로 가는 지 정도는 확인해 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좀 수상해 보이는데 말입니다."
기사 하나가 내게 의견을 제시해왔다.
아무래도 내가 가장 작위가 높으니 내 눈치를 보는 것이다.
"그렇겠지? 나 역시 보딜 경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정찰을 포기할 수는 없다. 빠르게 치고 빠지도록 하지. 기사는 2명, 그리고 영지군은 말을 탄 사람 중 1명만 제외하고 같이 가도록 한다. 보급품을 실은 짐말도 우리가 가져간다. 나머지는 즉시 복귀하도록."
내 명령에 따라 영지군은 곧 둘로 갈라졌다.
나와 함께 움직일 기사와 병사들은 여유분의 말에 외팔이 관리를 태우고 그를 안내인 삼아 즉시 출발했다.
오랫동안 돌아다닐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말을 타고 한 3일 정도?
외팔이 관리가 수상한 자들을 마지막으로 본 장소에서 시작할 예정이었다.
*
상태창은 처음 내게 나타난 이후로 변한 것이 없었다.
알려주는 정보도 그대로고,
잠겨 있는 부분도 그대로였다.
미니맵도 변한 부분이 없었다.
그러나 미니맵은 처음부터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촉이 유달리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도 얻었고,
강한 자기 확신과 그에 걸맞는 성과를 보이며 주변에서 신뢰를 얻기도 했다.
무엇보다 뒤통수를 맞을 가능성이 거의 없어졌다는 점에서 내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 것이 가장 큰 도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지금,
나는 또 한번 미니맵의 도움을 받았다.
외팔이 관리가 알려준 장소는 산으로 올라가는 초입이었다.
이 길을 따라 산을 몇 개 타고 넘으면 애쉬 남작령으로 이어진다.
애쉬 남작? 암염 광산? 설마?
설마하니 암염 광산에서 이렇게까지 대놓고 노동자를 끌어모았다고?
나는 설마설마 하면서도 마음 속에 피어오르는 의심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의심을 가진 채 산길을 올랐다.
내 상식으로는 나무를 헤치고 나지도 않은 길을 만들면서 가는 것은 숙련된 산사람도 힘든 일이다.
그러니 포로로 잡은 사람을 끌고 산으로 올랐다는 것은 산길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고 당연히 흔적이 남는다.
우리는 그 흔적을 찾으며 산길을 이동했다.
과연 이 흔적이 우리가 찾는 목표와 관련된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이 있었지만 수상한 흔적은 계속 나타났다.
그리고 나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미니맵에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었다.
모두 10여 개의 점이었다.
그러나 붉은 색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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