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남작령으로 갑시다.
막시밀리안 공작 역시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어디에도 자신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리고 절망했다.
온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그는, 자신을 경호하고 있던 기사들이 죽어가는 소리를 꼼짝도 못하고 들어야 했다.
무기가 서로 부딪치고 사람이 생으로 찢기며 생명 하나하나가 처참하게 스러지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며 마지막까지 발악하던 자신의 마지막 기사가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못 할 때, 그도 마지막 희망을 포기했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그의 병사들 역시 방 안에서 죽어간 기사들과 마찬가지 꼴이 되어 있을 것은 뻔했다.
이 자들은 괴물이었다.
애초에 이런 자리에 오면 안 되는 일이었다.
"다행히 막시밀리안 공작의 조카는 현명하더군요. 가문의 역량이 황제를 배출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사실에 대해 그와 우리는 의견일치를 이뤘습니다."
막시밀리안 공작의 눈동자가 커졌다.
조카라니!
바르거 막시밀리안.
죽은 형의 유복자가 무슨 짓을!
언제나 조용하게 책이나 읽던 녀석이었는데,
슬쩍 속을 떠봐도 죽은 눈동자로 영혼없는 미소나 짓던 녀석이었는데!
막시밀리안 공작은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 못 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오판으로 자식들이 위험해졌음을 알게 되었다.
이 곳에 병사를 인솔하고 온 둘째는 이미 포기했다.
그러나 공작령에 남아서 자신을 대행하고 있을 첫째가 자신 대신 가문을 잘 수습하리란 희망은 놓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자들은 그 희망마저 짓밟을 참이었다.
"아르보그 선제후께서는 새로운 막시밀리안 공작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우리의 맹약대로 8개의 선제후 가문은 언제나 그대로 있어야 하니까요. 그대는 그대의 가문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신이 할 말을 다 마친 여인은 조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마치 그녀와 교대하듯 복도에서 흘러들어온 핏줄기가 방을 가로질러 그의 앞으로 흘렀다.
이제 곧 전대 막시밀리안 공작이 될 남자의 시야가 서서히 어두워졌다.
마치 해가 지면서 빛을 잃어가는 저녁 한 때의 어느 순간처럼.
*
반란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힘의 우위가 있어도 명분이 없으면 사람들은 잘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반란을 꾀하는 자들이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이 명분이다.
만약 적당한 명분이 없으면 만들기라도 해야 했다.
다행히도 반란자들에게는 명분이 있었다.
정당한 후계자에게 막시밀리안 공작위가 돌아가야 한다는 명분.
모두에게 손해가 되는 무리한 황제입후보를 포기한다는 명분.
그렇게 두 가지 명분을 내세울 수 있었다.
바르거 막시밀리안은 그 두 가지 명분을 내세워 파벌의 귀족들을 포섭했다.
외부의 도움 역시 받아들였다.
치러야 할 대가는 있겠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그는 선친이 이어받았어야 할 작위를 자기 손으로 다시 가져오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용의가 있었다.
그리고 결행의 날. 그는 검을 들었다.
"바르거 경! 이건 아닙니다. 제발 정신을 차리십시오. 막시밀리안의 이름을 가진 자끼리 검을 겨누는 것은 절대 안 됩니다."
"집사장. 그대의 충언에 감사하네. 그러나 이것은 막시밀리안의 이름을 가진 자끼리 해결을 봐야 할 문제일세. 나는 나의 정당한 지위를 되찾기 위해 나섰을 뿐.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저 안에 있는 내 사촌 형제겠지."
막시밀리안 공작이 업무를 보던 방의 입구를 막고 있는 사람은 집사장이 유일했다.
다른 자들, 이곳을 지켜야 할 기사라든가 병사 등은 이미 바닥에 누운 후였다.
아르보그 공작이 보내준 기사들의 솜씨였다.
그들은 평범한 기사를 압도하는 힘과 속력으로 막시밀리안 공작의 기사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병사들은 아예 상대도 되지 않았다. 막시밀리안 공작의 병사들은 칼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몰살당했다.
반면 저택의 밖에서는 아직도 전투의 소음이 가시질 않았다.
바르거의 편에 선 자들도 많았지만 막시밀리안을 배반하지 않은 자들도 적지 않았다.
서로 비등비등한 전력이기에 그들의 충돌은 쉽게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피해를 줄이려면 어서 이 안에 있는 그의 사촌 형제, 비제 막시밀리언을 죽여야 했다.
바르거는 눈짓을 했다.
막시밀리안 공작가를 위해 대를 이어가며 봉사해온 집사장은 아르보그 기사의 칼질 한 번에 목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넘어지는 몸은 집무실의 문에 잠깐 기대며 분수처럼 피를 뿜어댔다. .
그 와중에 집무실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로 문과 열린 입구는 온통 붉은 색이었다.
그것은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는 표식인 양 위험하게만 보였다.
바르거는 피를 밟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의 발자국마다 피가 묻어났다.
집무실에는 그의 사촌이자 현 막시밀리안 공작의 첫째 아들인 비제 막시말리언이 있었다.
그는 밖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보고 있었다.
바르거가 기사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오자 그제서야 몸을 돌렸다.
"우리 모두를 감쪽같이 속였구나. 대단하다. 바르거."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비제."
"그래서 막시밀리안을 아르보그에게 팔아넘겼나?"
"도움을 받았을 뿐이지. 단지 거래일 뿐이야."
바르거의 말에 비제가 불같이 화를 냈다
"미친 놈! 오랜 시간동안 노력해온 우리의 염원을 쓰레기통에 버리다니! 우리 가문이 황제가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데!"
"그래서 파벌의 귀족들을 파산으로 내몰았나? 능력이 부족한 주제에 욕심만 많으면 어쩌자는 거지? 나는 정말 이해가 안가."
"칼마르를 장악하기만 하면 재정문제는 다 해결되는 거였어!"
비제는 여전히 열을 올렸지만 바르거는 비제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것은 바르거의 손을 들어준 막시밀리안 파벌의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파벌의 귀족들은 칼마르와 꾸준히 거래를 해온 자들이 많았고, 칼마르의 저력에 대해서 대충이라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공작의 시도는 너무 무모해 보였다.
"그 돈귀신들이 잘도 우리에게 숙이겠다. 불가능한 일을 이야기하지마. 너희들은 되지도 않는 욕심 때문에 우리 모두를 위험에 빠뜨렸어. 이것은 너희가 자초한 일이다."
"공작님이 돌아오시면 모든 일이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너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럴 일은 없다네. 내 사촌이여."
"뭐?"
"이제 끝내지."
비제는 진짜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의 부친이자 공작령의 주인이고 선제후인 막시밀리안 공작에게 일이 생긴 것이다.
바르거가 일으킨 반란은 그 연장선상에 지나지 않는다.
비제는 자신을 향해 찔러오는 검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
하루 종일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던 회전은 생각보다 훨씬 이르게 끝이 났다.
숫자의 우위, 방진에 난 구멍을 복구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난입한 지원군의 3박자가 잘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물론 마지막에 어! 하는 순간은 있었다.
글렌 공작의 지원군이 갑자기 나타나서 백작군의 옆구리를 노릴 때였다.
승패를 뒤집는 것까지는 무리였겠지만, 피해를 최소화해서 남작군이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 있게 하는 정도는 가능한 공격이었다.
그것을 막은 것이 마스터 요한의 군대였다.
영지전의 마지막 일격은 마스터 요한이 끌고 온 용병대가 해냈다.
4개의 용병대, 모두 6백에 달하는 인원이었다.
마스터 요한이 여분의 병력을 이끌고 온다는 이야기는 들어서 기대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어디서 이런 사람들이 왔나 의문이었다.
칼마르 시에서는 더 이상 모병할 용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해답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남손 남작이 용병 계약을 연장하지 못했다더군. 그래서 계약이 해지된 용병대장들에게 새로운 계약을 제의한 것 뿐일세."
뭐랄까. 이럴 때는 내가 아직도 이 중세틱한 판타지 세상에 적응이 완벽하게 안 됐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세상에나.
돈 때문에 군대가 싸우다 말고 편을 바꾸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다니.
머리로는 당연히 그렇지 하면서도 가슴으로는 어쩐지 불편하다.
국민개병제의 나라에서 살다 온 사람은 이거 평생 적응이 안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갑자기 창의 방향을 바꿔버리면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까?"
"원래는 도의상 곧장 창의 방향을 바꾸지는 않지. 그렇지만 이번에는 대금 지급이 워낙에 밀려서 내부에서 불만이 심했다고 하더군. 게다가 초기부터 약탈로 대금지급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아서 용병들이 질색을 했다고 하네. 약탈이 일상화가 되면 영지군조차 도적이 되어 버리는데 용병은 오죽했겠나. 내 계약제의를 받아들인 용병대장 중 하나는 자기가 용병대장인지 강도단 두목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고 불평했을 정도니까 도의를 따지기 보다는 남손 남작을 탓하는 것이 맞다고 보네."
남손 남작은 내 손에 큰 부상을 입고 전장에 방치되었었다.
원체 급박하게 전장 상황이 돌아가기도 했고, 남손 남작군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통에 챙겨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뒤늦게서야 자기 부하들에게 발견되어 실려왔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호흡곤란으로 죽고 말았다.
반면에 베르그렌 남작은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항복을 선언하고 자기 발로 걸어왔다.
덕분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남작군 패배의 원인이라든가 실책이라든가 하는 것을 몽땅 남손 남작 책임으로 밀어버렸다.
죽은 사람이 변명을 할 수도 없으니 남손 남작 책임론이 어느새 정설이 되었다.
남손 남작에게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전투 후 뒷정리는 삼일이나 걸렸다.
죽은 사람의 매장까지 끝낸 후에야 둔전병은 돌아갈 수 있었다.
영지군과 용병대의 일부도 항복한 남작군을 데리고 칼마르 시로 돌아갈 참이었다.
항복한 남작군의 일부는 칼마르 백작군에 받아들이고 일부는 몸값을 내고 풀려나기로 되어 있었다.
이도 저도 아닌 쪽은 대개 1년짜리 노역형에 처해서 노잡이로 끌려갈 것이다.
칼마르 시로 돌아가기로 한 병사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올보르그 지역의 안정과 정리를 위해 남작령으로 진군할 참이었다.
남작령 전체를 통제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고 중요 도시나 가치가 있는 지역을 확보한다는 의미가 컸다.
이것은 글렌 공작에 대한 견제의 의미이기도 했다.
칼마르 백작가는 요근래 외부의 도발에 대해 소극적인 대처로 일관해왔다.
선대 백작이 서거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때문에 막시밀리안 공작이나 글렌 공작이 더 날뛴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이제는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작령에 진군해 간 우리는 상상 이상으로 망가진 남작령과 마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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