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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54화 (54/248)

54. 영지전은 끝났다. 그리고 선제후는 죽어간다.

앞으로 달려가는 동안 사방에서 공격이 들어왔다.

재수없게 내 왼손에 잡힌 채 얼떨결에 방패 대용이 되어버린 병사는 몇 번 비명을 지르다가 축 쳐져 버렸다.

왼쪽에서 들이미는 창칼을 내 왼손의 병사로 막은 것이다.

오른쪽의 공격은 내 전투망치가 부쉈다.

중간중간 창을 들고 있던 병사들은 바로 옆을 지나는 내게 어떻게 해 볼 틈도 없이 전투망치에 찍혔다.

전투망치의 날카로운 스파이크에게 병사의 갑옷은 골판지와 별 다들 바 없었다.

찍는대로 갑옷은 퍽퍽 뚫리고 병사는 무력화됐다.

방패와 칼을 들고 있던 병사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방패를 내리치면 방패와 함께 넘어지는 병사가 대부분이었다.

팔이 부러졌다면서 비명을 지르는 병사도 있었다.

나무로 된 방패는 그마저도 못하고 그냥 구멍이 뚫리고 부서져 버렸다.

방패를 잡고 있던 손도 같이 부서졌다.

방패로 막는다는 것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방패를 내리치면서 잠깐 멈춘 사이에 뒤에서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그 중에는 나를 잡아서 넘어뜨리려는 심산으로 내 다리를 향해 몸을 던지듯 돌진해 오는 병사도 있었다.

과감한 정도를 넘어 반쯤 미친 것이 아닌가 싶은 자였다.

전투의 열기와 공포에 취해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자다.

이런 병사가 정신이 나가면 옆에 있는 아군에게도 칼을 휘두른다.

나는 왼손으로 잡고 있던 방패 대용 병사를 뒤에서 달려들던 병사들에게 던졌다.

그리고 내 다리를 향해 태클하듯 달려들던 병사는 축구공을 차듯 걷어차 버렸다.

나를 향해 달려들던 병사 몇 명이 시체에 맞아서 뒤로 뒹굴 때,

내 발에 채인 병사도 뒤로 몇 바퀴를 굴러갔다.

양 쪽 다 일어서지 못했다.

몸을 다시 앞으로 돌리며 손에 걸리는 적들에게 전투망치를 휘둘렀다.

내가 노리고 있던 남작이 말에 오르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구분이 된다.

남손 남작이다.

베르그렌 남작령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영지의 주인.

글렌 공작의 파벌에 속한 자다.

죽일까?

패트슨 남작의 경우와 달리 살려서 잡아가 봐야 이익이 될 것이 없다.

개인 적으로는 파산 상태일 것이고, 영지 역시 파산 상태.

이미 백작령에 정착한 자기네 영지민이나 내놓으라고 뻗대기가 십중팔구는 되겠지?

그렇다고 글렌 공작을 버리고 우리 아래로 들어온 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귀족의 파벌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글렌 공작이 죽으면 모를까.

그러니 죽이자.

생각은 길었지만 행동은 빨랐다.

결단을 내린 순간 내 전투망치가 남손 남작을 향해 날아갔다.

전투망치는 남손 남작의 투구를 갈겼다.

머리를 너무 세게 맞으면 설사 투구로 머리를 보호해도 목이 버티지 못한다.

말에 오르던 남손 남작은 목이 탈골이 되면서 땅으로 떨어졌다.

그것으로 그는 끝장이 났다.

그 모습을 본 남작군은 일제히 붕괴해 버렸다.

중앙에 자리잡고 있던 남손 남작 휘하의 병사들은, 특히 용병은 더 이상 싸우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

엘리아슨은 기사대전을 제대로 보기 위해 말 위에 오른 상태였다.

병사들의 움직임까지 한 눈에 담기 위해서는 지대 자체가 조금만 더 높았다면 더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하는 순간 부하 병사들의 환성과 고함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또 이긴 것이다.

그것도 둘을 상대로.

윌리엄 버로스.

갑자기 나타나서 리네아 여백작의 약혼자로 선언된 사람이다.

백작령에서 대를 이어가며 봉사해온 자들도 언감생심 꿈도 못 꿀 계승남작위와 영지까지 불과 몇 달만에 단숨에 움켜쥐었다.

그 과정을 본 젊은 기사들은 질투심도 느끼고, 자괴감도 느끼고, 경이스러움도 느끼며 복잡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중이다.

지금도 윌리엄의 실력에 감탄을 하면서도 경쟁심을 불태우는 젊은 기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인생 성공의 사다리를 한순간에 올라가 버린 살아 있는 사례를 눈 앞에서 목격했으니 다들 나도 한 번! 하고 기합을 넣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처럼 마스터 요한에게 배운 1세대 제자들은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윌리엄은 전대 백작과 이미 죽은 마스터 요한의 스승이 힘을 합쳐 길러낸 자가 아닐까 추측하는 중이었다.

마스터 요한의 스승은 흔히 신비라고 부르는 이해할 수 없는 힘을 체계적인 수련으로 발현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고 일정부분 성공도 했다.

마스터 요한이 대표적인 성공사례였다.

자신 역시 마스터 요한에게 기사의 무술과 그의 스승의 무술을 모두 배우며 좀 더 강하게 공격할 수 있는 기운을 얻지 않았던가.

그로서는 윌리엄의 인간같지 않은 놀라운 힘이 마스터 요한의 스승에게 근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말이 안되었다.

만난지 몇 달 되지도 않는 자를 백작의 배우자로 삼는다고?

그걸 마스터 요한과 사라 남작부인이 용납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상념에 잠긴 사이.

저 앞쪽, 남작군의 방향에서 나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남작군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백작군은 아직 자기 자리에서 서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면을 노려보며 귀는 활짝 연 채 전투의 두려움을 삭이는 중이었다.

엘리아슨은 주변에 수신호로 출발 신호를 알렸다.

그러자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백작군의 나팔수와 기수가 명령에 따라 출발 신호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나팔 소리와 깃발 신호를 본 백작군도 남작군에 맞서서 천천히 움직였다.

가장 전면에 선 둔전병들은 대부분 전투 경험이 없는 신병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중간중간 끼어 있는 고참 영지군들이 고함을 지르며 병사들을 단속하는 덕분이리라.

둔전병의 뒤를 따르는 영지군에서 적을 향해 화살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활을 다루는 병사는 양성하기 너무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거기다 활도 화살도 너무 비싸다.

지금도 활을 쏘고 있는 궁병의 수가 백 명이 되지 않았다.

모두 산에서 사냥할 수 있는 특권을 받은 자들이다.

드디어 백작군과 남작군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고함소리가 비명소리를 덮고,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고함소리를 뚫고 귀에 박히지만 승패가 결정되려면 아직 멀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렇게 양쪽 군대가 대규모로 모여서 회전을 벌이는 경험은 엘리아슨도 처음이었다.

양쪽 군대를 다 합치면 거의 1만에 가까운 병력이다.

세상에나!

다시 생각해도 엄청난 규모였다.

엘리아슨은 이런 대규모 회전을 경험한 사람 자체가 백작군과 남작군을 통털어도 몇 없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영지전은 기사대전으로 적당히 마무리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약 진짜 영지의 운명을 걸고 싸워야 한다면 약한 쪽이 성에 틀어박혀서 시간을 끄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니면 소규모 부대로 흩어져서 서로 전투를 피하면서 약탈과 기습을 반복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렇게 영지의 운명을 단 한 번의 전투에 걸고 벌이는 대규모 회전은 무척이나 드물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렇게 말 위에서 명령을 내리며 태연하게 있어도 속은 시커멓게 타서 이미 재가 된 지 오래였다.

물론 엘리아슨도 이렇게 양쪽이 평지에서 전력으로 맞서 싸우는 회전을 할 때는 어떤 식으로 싸워야 한다는 방법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론으로 안다고 해서 그게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더구나 싸우는 기사보다는 군대를 지휘하는 장교에 가까운 그로서는 실전에 들어가면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이론대로 실전이 돌아가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불안하기만 했다.

명령을 내릴 때마다 이게 맞나 싶은 불안감에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고, 갑자기 옆으로나 뒤로 남작군의 별동대가 달려들 것 같아서 자꾸 주변을 두리번 거리게 된다.

윌리엄에게도 병법에 대해 잘 아는 척하며 예비대를 두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실은 불안했기 때문에 따로 병력을 손에 쥐고 싶은 것 뿐이었다.

엘리아슨이 불안과 걱정으로 속이 타들어갈 때 변화가 일어났다.

이론대로라면 아직 몇 시간은 더 힘겨루기를 하며 기세싸움을 이어가야 하는데 갑자기 적의 방진 한 쪽이 우르르 무너진 것이다.

엘리아슨이 변화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남작군 쪽의 큰 방패 몇 개가 넘어간 후였다.

구멍이 뚫린 남작군의 방진을 향해 백작군이 미친 듯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가장 앞에는 윌리엄이 있었다.

왼손에는 병사를 잡아서 방패 대용으로 쓰고 오른손에 잡은 전투망치로는 주변의 병사들을 내리치며 날뛰는 중이었다.

전투망치를 내려칠 때마다 남작군의 병사들이 쓰러졌다.

급한 나머지 매달리는 병사도 있었지만 윌리엄의 움직임은 병사가 매달릴 때나 매달리지 않았을 때나 차이가 없었다.

평범한 기사가 적의 한가운데에 난입한다면 병사 몇 명이 달라붙어서 넘어뜨리면 된다.

그는 순식간에 죽을 것이다.

홀로 고립된 기사는 생각보다 약하다.

그러나 윌리엄에게는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마치 거인과도 같은 힘을 가진 그는 병사 몇 명이 달라붙었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마치 재해와도 같았다.

결국 윌리엄은 얇은 방진을 그대로 가로질렀다.

윌리엄이 지나간 좌우의 남작군은 글자그대로 쑥대밭이 되었다.

그리고 윌리엄을 따라서 밀고 들어간 백작군은 방진을 완전히 박살내 버렸다.

그리고 윌리엄은 도망치려는 적의 남작 하나를 죽였다.

그 모습을 본 중앙의 남작군이 우루루 무너지며 도주하는 모습이 엘리아슨에게도 보였다.

기회다!

적이 수습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

엘리아슨은 나팔수를 향해 다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에 따라 나팔수가 약속된 악보를 연주했다.

그리고 기수 역시 격렬하게 깃발을 흔들어 댔다.

백작군 전체가 남작군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 옆의 용병대는 남작군의 측면을 향해,

영지군과 둔전병 역시 정면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미 중앙의 남작군이 붕괴한 상황이라서 남작군은 반으로 쪼개진 채 포위되어 전멸할 것이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원래부터 숫자까지 밀린 남작군으로서는 외부의 도움이 없는 한 패배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전멸 전에 항복하느냐 아니면 도주하다가 전멸당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 때 오른쪽 숲에서 일단의 기마병이 튀어나왔다.

거의 3백은 되어보이는 규모였다.

승패를 뒤바꿀 수는 없겠지만 남작군의 붕괴를 막고 수습을 할 수는 있는 전력이었다.

남작군의 오른쪽 측면으로 접근하던 용병대가 전진을 멈추고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방진을 짜며 창을 든 용병을 앞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역시 전투 경험이 많은 자들이라서 무력하게 짓밟히지는 않을 듯 했다.

엘리아슨은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남아 있던 예비대를 몽땅 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대로 남작군을 놓아보내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백작령을 대상으로 조직적으로 약탈이라도 하면 골치가 아파진다.

무리하더라도 여기서 끝장을 내야 했다.

급하게 이동하는 엘리아슨의 부대 뒤편에서 갑자기 한 무리의 기마병과 마차들이 나타났다.

마스터 요한이 이끄는 기사들과 용병들이었다.

그것으로 변수는 더 이상 없었다.

전투는 반나절이 지나기 전에 끝났다.

백작군의 완승이었다.

*

비단으로 벽을 장식한 화려한 방 안에 두 사람이 있었다.

금으로 장식한 의자에 마주보고 앉은 두 사람은 이야기가 좀 길었던지 다 식은 차를 앞에 두고 있었다.

"막시밀리안 공작. 선제후라고 해서 다 같은 선제후는 아닙니다. 그대는 무리한 짓을 했어요. 8개의 선제후 가문 중 황제를 배출해 본 가문은 절반 뿐이고, 그 중에 그대의 가문은 없지요. 그대의 가문은 아직 자격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 공작은 그녀의 말에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의 혀는 굳어 있었고, 손과 발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지 눈으로 앞에 있는 자를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막시밀리안 공작은 죽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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