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남작군 붕괴하다.
투구, 판금갑옷, 전투마 그리고 장창.
기사가 갖출 수 있는 정석적인 무장이다.
갑옷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이 오늘의 기사대전을 위해 신경 써서 손질이라도 한 모양이다.
기사대전이 무슨 결투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설마 정직하게 서로 장창으로 살짝 치고 지나간 후 누구 하나가 포기하기 전까지 공방을 주고받는다는 식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설마?
만약 그렇게 생각했다면 저자는 큰 실망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으로는 싸우지 않는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으니까.
안장 옆에 걸어놓았던 작은 쇠뇌를 잡고 적 기사를 향해 쏘았다.
미리 장전되어 있던 쇠뇌살은 예상했던 것처럼 적기사의 판금갑옷에 맞고 튕겨져 나갔다.
적 기사는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는 것을 깨닫자 눈빛에 비웃음이 서렸다.
아마 입도 웃고 있겠지?
그런데 아무려면 내가 말 타고 쏘는 작은 쇠뇌로 기사의 판금갑옷을 뚫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겠나.
그냥 잠깐 멈칫하는 것이 필요했을 뿐이다.
나는 적 기사가 멈칫하는 순간,
적 기사가 탄 말도 순간적으로 속도를 늦춘 바로 그 순간을 원했다.
내 손에서 비도가 연달아 날아갔다.
4개였다.
비도는 말의 머리 부분에 빨려들어가듯 박혔다.
빗나간 비도는 없었다.
두 개는 말머리에 씌워놓은 마갑에 맞고 튕겨 나갔지만 다른 두 개는 빈 틈에 제대로 적중했다.
적 기사의 말이 울부짖으며 날뛰다가 옆으로 넘어갔다.
눈과 머리에 비도를 연달아 맞으면 말처럼 큰 동물이라도 어쩔 수 없다.
말은 쓰러진 채 거품을 물려 일어나지 못하고 다리를 휘젓기만 했다.
말에게 전투용 마갑을 입혀놓았다고는 하지만 몸통 위주로 덮어놓은 것이 전부다.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공격은 말도, 파트너인 기사도 대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말에 타고 있던 적 기사도 낙마해서 바닥에 쓰러졌다.
머리가 살짝 움직였던 것을 보면 살아는 있는 모양이지만 낙마한 충격에 너무 커서 그런지 쓰러진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전투망치를 높이 들어올렸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내가 이겼음을 과시했다.
백작령의 군대는 다시 일제히 발을 구르고 고함을 지르며 기세를 올렸다.
반면, 남작군은 기사가 떨어지는 순간 동시에 숨을 들이키며 조용해 졌다가, 건너편에서 기세를 올리며 고함을 지르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웅성거리는 병사들의 소음을 뚫고 크게 외쳤다.
"보라! 명예로운 자는 다 떠나고 남은 자는 말도 탈 줄 모르는 병신들 뿐이다. 갑옷을 입고 말을 탄다고 해서 모두가 기사가 되는 줄 아는가? 기사는 기사다워야 한다!"
도발이 지나쳤나보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명의 기사가 달려 나왔다.
하나는 검을 들었고, 다른 하나는 메이스를 들었다.
창으로 돌격해서 한 방을 노리는 스타일이 아니라 붙어서 싸우겠다는 의미였다.
실력에는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나 역시 전투망치를 들고 그들에게 향했다.
둘은 거의 동시에 도착해서 나를 가운데에 끼워 놓으려고 했다.
양 쪽에서 동시에 나를 다구리 치겠다는 의도겠지만 그런 뻔한 수작에 말려들어 가기에는 내가 탄 말이 너무 영리했다.
리네아 여백작이 내게 내어준 전투마는 둘이 접근하기가 무섭게 옆으로 스텝을 밟으며 둘 사이에 끼이는 것을 피해버렸다.
나는 검을 든 자의 왼쪽으로 말이 지나가는 순간 나를 향해 내려치는 검을 완갑에 대고 흘리며 전투망치의 자루로 적 기사의 얼굴을 찍어버렸다.
그리고 팔로 그의 목을 휘감았다.
검을 든 기사는 말고삐를 놓지 않고 버티려고 했지만 내 전투마에게 목을 물린 자신의 말이 날뛰자 결국 낙마하고 말았다.
나는 그가 말에서 떨어지는 순간 팔로 휘감았던 목을 비틀고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냥 낙마한 수준이 아니라 꽤나 험하게 내팽개쳐진 그는 자신의 무기도 놓친 채 엎어져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땅에 떨어진 자 따위를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내가 검을 든 기사를 처리하는 동안 메이스를 든 기사가 내게 따라 붙었기 때문이다.
메이스는 철몽둥이의 머리 부분에 이런저런 철장식을 덧붙인 흉악한 무기다.
사람이 맞으면 부러지고 깨진다.
과연 그는 일단 나를 한 방 내려칠 생각인 듯했다.
높이 든 메이스는 내 머리를 노리는 듯 했지만,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아서 휘두르지 못하고 있었다.
메이스를 든 기사가 내게 다가오는 만큼 내 전투마가 뒤로 옆으로 스텝을 밟으며 거리를 유지해 준 것이다.
이 녀석을 타면서 느끼는 것인데 마상 전투의 절반은 말에게 좌우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듯 싶다.
좋은 말을 탄 기사는 팔다리가 한 쌍씩 더 있다고 간주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좋은 말을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
접근하는 적 기사를 향해 내 말을 돌진시켰다.
적 기사는 내 전투마가 뒷걸음질 치며 도망치다가 갑자기 자신을 향해 달려오니 오히려 잘 됐다는 듯 메이스를 휘둘러왔다.
나는 더 가깝게 접근해서 메이스의 자루부분을 쳐 버렸다.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적 기사의 메이스는 약해진 힘으로나마 내 등판을 쳤다.
그러나 판금갑옷은 그런 공격을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적 기사의 공격을 허용한 대신 나는 적 기사의 말고삐를 잡았다.
말의 재갈 쪽의 말고삐를 잡으며 힘껏 위로 당겨 버렸다.
그리고 내 전투마는 내 지시에 따라 적 기사의 말을 들이받았다.
적 기사의 말은 옆으로 붕 뜨는 듯하다가 그냥 넘어졌다.
말을 탄 적 기사 역시 옆으로 던지듯 내동댕이쳐졌다.
판금갑옷을 입고 낙마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왜 기사가 배우는 기승전투법에 적을 말에서 떨어뜨리기가 빠지지 않고 있겠는가 말이다.
칼을 쥐고 싸울 때도, 망치를 들고 싸울 때도, 창을 들고 싸울 때도 적을 무기로 싸워서 이기는 법보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말에서 떨어뜨릴 수 있는지에 열심히 설명을 한다.
그만큼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말에서 떨어지는 것이 위험하다.
오늘 말에서 떨어진 기사들은 더 이상 전투에 끼어들지 못할 것이다.
나는 쓰러져 있는 적 기사들을 바라보며 승리감을 만끽했다.
다시 한 번 전투망치를 높이 들어올리며 말로 한 바퀴를 돌았다.
미칠 듯한 환호성과 고함이 다시 한 번 터져나왔다.
만약 남작군이 기강이 약했다면 이대로 그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망가지고 있었다.
남작군의 지휘과 역시 그러한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환호성이 잦아들 때 나팔 부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남작 하나가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 있는 나팔수의 나팔 소리에 따라 남작군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살도 날아오기 시작했다.
주로 백작군을 노리고 날아가기는 했지만 내게 날아온 화살도 적지 않았다.
몇 대의 화살이 판금갑옷 위를 치고 떨어졌다.
나는 메이스를 주은 후 위협이 될 만한 화살은 쳐내며 백작군으로 돌아갔다.
백작군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3개의 방진으로 길게 늘어선 백작군의 전면이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맨 앞에는 큰 방패를 든 사람이 서고,
그 뒤에 칼을 든 자들이 서고,
그 뒤에는 긴 창을 든 사람이 선다.
그리고 그 뒤로는 작은 방패와 칼을 든 자들이 섰다.
모두가 둔전병이다.
그리고 전투를 처음 경험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무기를 든 채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 어디에서도 신병티는 나지 않았다.
일반 병사의 실력 중 절반은 갑옷과 무기라는 말이 있다.
나머지 절반은 전투 때 제정신을 챙기는 것이고.
전투 때 제정신을 챙기는 것은 그 동안 받은 훈련과 같이 움직이는 영지군을 믿는 수밖에 없지만
나머지 절반의 실력은 돈을 퍼부으면 갖출 수 있는 것이다.
덕분에 백작령의 무기 창고가 싹 비었다고 한다.
돈보다 사람이 더 귀한 우리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양쪽이 점점 가까이 다가가자 백작군쪽에서도 본격적으로 화살이 날아가기 시작헀다.
둔전병의 뒤에서 따라오는 영지군의 궁병이 쏘기 시작한 것이다.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화살은 남작군을 연달아 넘어뜨렸다.
남작군 쪽에서도 계속 화살이 날아왔지만 그 수는 우리쪽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다다다닥!
드디어 양쪽의 장창이 얽히기 시작했다.
두 길은 넘는 길이의 창은 맞은편의 적을 노리고 찔러갔지만,
큰 방패에 막혀서 대부분이 병사들의 위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장창에 찔려서 쓰러진 병사는 얼마 되지 않았다.
대신 큰 방패 사이로 또는 큰 방패 아래로 쑤셔 넣는 검 때문에 연달아 부상자가 발생했다. 부상자는 뒤로 끌려 나갔다.
장창을 든 사람은 상대방의 머리와 어깨를 노리고 내리쳤다.
비명과 고함, 방패끼리 또는 방패와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할 정도로 시끄러웠지만 의외로 죽어나가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부상자는 계속 나왔지만 방패를 사이에 둔 힘겨루기는 그렇게 많은 사람을 잡아먹지는 않은 것이다.
나는 말에서 내려서 둔전병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호위를 하겠답시고 기사 2명이 다급하게 따라붙었지만 내 관심은 둔전병에게 쏠렸다.
둔전병 대부분 전투 경험이 없는 병사임에도 불구하고 기대보다 훨씬 제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딱 정해진 역할을 죽어라 훈련한 점과 땅을 기준으로 10명씩 묶어버린 것, 그리고 영지군 출신의 조장이라는 조합이 꽤나 잘 들어맞은 덕분이다.
이대로 시간을 끌며 힘을 빼다가 한타 싸움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우리쪽이 숫자도 많고 준비한 것도 많기 때문에 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정석적으로 가면 내 주위에 있는 이 둔전병들이 많이 상해 나갈 것 같다.
기껏 안전한 곳에 농사지을 땅을 구하고 가족을 정착시켰는데 죽어서 돌아가면 좀 억울하지 않겠나?
게다가 실전을 거친 병사는 많을 수록 좋은 법이다.
"너희 둘. 두 다리에 힘을 주고 가만히 서 있게."
나는 내 앞의 둔전병 2명에게 명령을 내린 후 그들의 어깨를 손으로 짚고 몸을 끌어 올린 후 그대로 어깨를 밟고 섰다.
내 앞에 좌우로 길게 늘어서서 악을 지르며 버티고 있는 양 쪽 병사들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약한 고리가 필요했다.
한 순간에 파고들 약한 부분이.
큰 방패를 들고 있던 남작군 한 명이 머리를 창대에 맞고 비틀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금방 뒤에 있는 사람이 교체해 주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향해 뛰어갔다.
줄줄이 늘어서 있는 우리편 둔전병의 어깨를 밟으며 앞으로 달렸다.
그리고 목표한 방패를 향해 뛰어 들었다.
방패와 방패를 들고 있던 병사를 동시에 짓밟았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적 병사들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한 손에는 전투망치, 다른 한 손에는 메이스를 들고 남작군 병사들의 어깨를, 얼굴을, 머리를 후려쳤다.
큰 방패를 들고 열심히 앞을 막고 있던 남작의 병사들은 뒤통수에 날아드는 쇳덩어리의 타격에 연달아 쓰러졌다.
그들의 뒤에 있던 창병과 검병도 미처 반응하지도 못한 채 연달아 전투망치와 메이스에 얻어맞고 뒤로 넘어갔다.
순식간에 방진에 구멍이 났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백작군의 병사들이 밀려들어왔다.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방진의 구멍을 메우려고 다급하게 남작의 병사와 기사들이 몰려왔지만 나는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는 내 주변의 남작군이 우르르 쓰러지는 순간 기겁을 하고 뛰어오는 기사를 향해 메이스를 던졌다.
메이스는 기사의 투구에 박혔고, 기사는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앞으로 굴러버렸다.
다시 주변의 병사들에게 전투망치를 휘두르다가 한 명을 끌어다가 앞에다 잡아서 세운 후 그대로 앞으로 달려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두 명의 남작 중 하나가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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