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52화 (52/248)

52. 칼마르 백작령은 영지전을 시작했다.

10여 명의 기사, 2천에서 한참 부족한 병사.

베르그렌 남작이 가진 병력 전부였다.

2천의 병사 중에도 영지군은 천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나머지는 용병.

실력이야 믿을 수 있지만 과연 다음 달에도 함께 싸워줄지 의문이다.

돈이 없다.

문제는 그것을 용병도 안다는 것이다.

분기마다 지급해야 할 용병의 고용비 지급일은 당장 다음 달인데.

돈을 주지 못한다면 이들은 더 이상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을 것이다.

병사의 숙련도를 생각하면 최소한 전력의 절반이 날아가는 것이다.

그만큼 이번에 치를 영지전이 중요했다.

상대는 칼마르 백작령.

제국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풍요로운 영지다.

그리고 다음 분기의 용병 고용비를 지불하게 만들어야 하는 곳이다 .

어떻게 해서든지.

남손 남작의 병력이 접근해왔다.

남손 남작의 군대 역시 베르그렌 남작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모양새였다.

숫자는 더 적어서 모두 합쳐야 1천 수백 정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전해 듣기로는 용병에 대한 유지비가 이미 한 번 밀려서 대부분의 용병대가 이탈했다고 한다.

뒤늦게 글렌 공작의 보증을 받아와서 간신히 추가 이탈은 막았다지만, 용병들의 의욕이 떨어진 것은 그냥 눈으로 봐도 알 정도였다.

양쪽의 병사들이 적당히 자리를 잡는 동안 베르그렌 남작의 시종들이 지휘부를 위한 막사를 치고 탁자와 의자도 구비해 놓았다.

그리고 다과를 내놓은 후 막사 구석으로 갔다.

남손 남작은 의자가 놓이자마자 의자에 몸을 싣고 늘어졌다.

그는 차를 마시며 신음했다.

"음. 며칠 만에 차를 마시는 건지. 그 씁쓸한 차가 이렇게 맛있는 것인 줄은 미처 몰랐소. 신선한 물은 커녕 시큼털털한 술도 없이 행군하느라고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

"내 영지를 지나면서 약탈까지 하신 분이 그런 말씀이라니!"

베르그렌 남작은 대충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막상 기대에 못 미치는 숫자의 병력을 보니 짜증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당신 영지에는 약탈할 것이라도 남아 있더군. 내 영지는 그마저도 없다오. 그리고 약탈로나마 식량을 보급하지 못했으면 여기에 도착한 것은 걸뱅이 몇백이 다였을 거요."

"어쨌든 늦지 않게 도착을 했으니 다행이오. 당신을 끝으로 우리 쪽은 다 도착했으니까."

"글렌 공작이 보낸 병력은 어디에 있는 거요?"

베르그렌 남작은 남손 남작의 질문에 왼쪽의 숲으로 눈길을 돌렸다.

남손 남작 역시 베르그렌 남작을 따라 숲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잘 숨어 있군. 계획대로만 잘 된다면 그동안 입은 손해를 다 복구할 수 있겠지만······ 베르그렌 남작. 당신 생각은 어떻소? 우리가 버티고 저들이 옆을 들이친다는 작전은 기본 중의 기본인데, 그게 그리 쉽게 될까?"

"남손 남작. 당신도 알지 않소? 실전을 처음 겪는 병사들이 얼마나 얼을 타고 병신 짓을 하는지. 우리 병사들이 숫자가 부족해도 칼마르의 영지군을 상대로 버티는 것은 걱정하지 않소이다. 걱정하는 것은 글렌 공작의 지원병이 제 역할을 해주는 것이지. 제대로 칼마르 영지군의 옆구리를 찔러주기만 하면 숫자의 많고적음 따위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거요."

"당신의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군. 오! 베르그렌 남작. 보시오. 칼마르 사람들이 오고 있소."

*

베르그렌 남작과 남손 남작은 올보르그 지역에서 자기들끼리 싸울 때는 영지전의 기본적인 관례를 무시하고 온갖 잔인한 일을 서슴없이 벌였다.

그러나 글렌 공작을 배후로 두고 둘이 함께 연명으로 칼마르 백작령에 영지전을 선포할 때는 관습과 법에 따른 절차를 꼼꼼하게 밟았다.

항의 서한이 오가고,

고위 귀족의 중재 권고가 따라오고,

영지전을 선포한 후,

영지전을 벌일 일시와 장소까지 합의한 것이다 .

이 자들이 왜 이러지?

"그건 당연한 겁니다. 윌리엄 경."

내 의문에 영지군을 이끌고 나선 엘리아슨이 설명을 해주었다.

엘리아슨은 마스터 요한의 제자 중 하나로 영지군에서는 서열 3위에 해당하는 기사다.

나이는 이제 40대 초반.

백작의 가신 중에서도 발언권이 강한 축에 든다.

"저 자들은 글렌 공작의 파벌에 속한 자들이고, 쓰고 버리는 팻감에 지나지 않습니다. 글렌 공작에게 필요한 것은 칼마르 백작령이 그의 금고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글렌 공작의 도구에 불과한 자들이 백작령을 휩쓸고 다니면서 황폐화 시켜 버리면 그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최대한 칼마르 백작령이 피해를 입지 않는 선에서 장악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확실히 영지전은 좋은 수단이겠군요. 이길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내 말에 엘리아슨은 씩 웃으며 자신의 뒤로 손을 뻗었다.

그의 뒤에는 줄줄이 이동하는 칼마르 영지군의 행렬이 쭉 이어지고 있었다.

기존의 영지군 중 지난 전투에서 발생한 부상자와 사망자 때문에 발생한 결원은 특권을 이어받을 자들이 대신 채웠다.

부상자나 사망자의 아들이나 조카, 형제, 도제 등이 특권을 이어받고 가족을 돌보겠다는 서약을 하고 영지군에 합류한 것이다.

이것으로 영지군의 정원을 모두 채운 후 영주성을 지킬 일부만 남겨놓고 대거 출정을 했다.

출정한 영지군은 천오백이 넘었다. 그 중 고참병은 따로 출정했다.

그리고 용병 역시 추가로 모병해서 덩치를 불렸다.

비숙련병의 비율이 갑자기 올라갔지만 용병대의 하사관과 선임병들이 미친 듯이 굴리고 가르쳤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제 역할을 해줄 것으로 예상들을 했다.

이렇게 용병대도 8백에 달하는 숫자로 출정했다.

그리고 땅에서 솟아나는 병사.

둔전병을 모병했다.

자경대, 영지군, 경비대 경력자에게는 계약금을 추가로 주고,

창을 들고 10분 이상 버틸 수 있는 남자라면 우선적으로 땅을 지급했다.

그렇게 모은 병사가 3천.

지급된 땅을 기준으로 10명 단위로 묶은 후 부조장을 세우고 모두에게 새로운 갑옷과 무기를 지급했다. 그리고 영지의 고참병들을 조장으로 임명했다.

탈영이나 반란이 쉽게 발생하지 못하도록 앞으로 함께 농사지을 사람들을 한 단위로 한 것이다.

그리고 백작의 기사들이 50여 명.

백작을 경호할 기사와 경비대의 기사를 제외한 전부가 출동한 것이다.

그 중 20명의 기사들은 마스터 요한을 따라갔고, 30명의 기사들은 엘리아슨을 따라왔다.

칼마르 백작령에서만 5천 명이 넘는 병력을 동원한 것이다.

웬만한 백작령이라도 이런 숫자의 병력을 유지는 커녕 징병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파산을 각오하더라도 과연? 이라는 물음표가 붙는 규모였다.

그런 대규모의 군대가 지금 엘리아슨의 손아래에 있는 것이다.

"영지전의 관례는 다 지키려고 하는 모양이니까 기사대전도 있을 겁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윌리엄 경."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여백작의 예비약혼자라는 신분은 일반 사람들의 경외의 대상이 되지만 젊은 기사들 사이에서는 질투의 대상 또는 부러움의 대상, 아니면 뭔가 이해하기 어렵지만 괜히 심통이 나서 툴툴거리고 싶은 대상 정도가 된다.

그러나 엘리아슨 정도의 연배가 있는 기사들은 조심스럽게 나를 대했다. 특히 마스터 요한과 비등하게 겨뤘다는 소문이 퍼진 후에는 더욱 그랬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았지만 예의를 갖춰서 대해주니 나도 예의로 대할 뿐이었다.

영지전을 약속한 장소는 칼마르 백작령과 베르그렌 남작령의 경계 부근이었다.

중간에 넓은 평지가 있고 남작군이 자리잡은 뒤쪽으로는 약간 언덕진 구릉이 자리 잡고 있었다.

좌우로는 숲이 펼쳐져 있어서 군대의 이동에 방해가 되었다.

지형만 봐도 저 쪽의 의도를 알겠다.

서로 정면에서 힘대결을 하자는 것이다.

실력과 숫자에 자신이 있다면 가장 정석이기는 하다.

그러나 실력은 모르겠지만 숫자는 우리가 더 많은데?

기사 대전에서 이길 생각인가?

이미 자리잡은 남작군 앞에 백작군도 천천히 자리를 잡았다.

둔전병을 셋으로 나누어 전면에 나란히 배치하고 그 뒤를 절반의 영지군이 받쳤다.

용병대는 둘로 나누어서 좌우로 두고 언제든지 돌격할 수 있도록 하고 나머지 영지군은 예비대로 돌려놓았다.

기사들의 일부는 병사들을 지휘하기 위해 나갔고, 일부는 기사 대전을 위해 지휘부의 막사에 남았다.

나는 엘리아슨 경에게 다가갔다.

"엘리아슨 경. 예비대가 없으면 패배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비슷한 전훈은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영지군의 편제에는 언제나 예비군을 두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 두 남작군을 보면 예비대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그리고 저 쪽."

내 손은 오른쪽의 숲을 가리켰다.

미니맵에는 빨간 점이 하나 가득이었다.

"저 숲에서 반사광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움직이는 것 역시 보았습니다. 느낌으로는 숫자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매복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 주의해 두겠습니다. 저 앞의 구릉과 좌우의 숲은 복병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스터 요한의 별동대에게 전령을 보내 놓겠습니다."

내 나름의 걱정과 제보가 무색하게 이 사람들도 미리 대처하고 있었다.

전쟁은 이 사람들이 전문가이기는 하다.

나는 그냥 싸움꾼이고.

확실히 나 혼자 머리를 짜내며 이리뛰고 저리뛰면서 발버둥 칠 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안정감이 있다고 해야 하나?

나는 그냥 기사 대전이나 집중하면 되겠다.

잠시 후에 양 쪽 군대가 서로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았다.

그제서야 전투를 앞 둔 분위기가 서서히 달아올랐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긴장과 살기가 두 군대 사이를 메우며 병사들의 피를 마르게 했다.

그런 압박감 속에서 양쪽의 지도부가 나서서 서로를 비난하고, 연설하고, 격려하며 기세를 북돋웠다.

그러나 아무래도 우리가 밀리는 느낌이었다.

저 쪽은 두 명의 남작이 번갈아 나와서 떠드는데, 우리쪽은 엘리아슨이 맞상대를 하니 아무래도 격이 떨어져 보이는 것이다.

영지군이야 엘리아슨이 영지군의 3인자이고 가신집단에서도 발언권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만, 새로 만들어진 둔전병이 그런 것을 알 리가 있나.

그래서 내가 나섰다.

"나는 칼마르의 백작이신 리네아 공의 약혼자이며, 르하베트의 남작인 윌리엄 버로스다. 감히 백작령에 숨어들어 약탈과 살인을 벌인 용병 에릭과 그의 부하들을 처단한 자가 바로 나다. 너희 자유민들은 왜 여기에 와 있는가? 누구를 명령에 따라 여기에 와 있는 것인가? 명예를 저버리고 자신의 영지민조차 약탈하고 살인한 베르그렌과 남손은 과연 귀족이라고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가? 귀족이 왜 귀족인가? 영주가 왜 영주인가? 자신이 보호해야 할 자들을 보호하기 때문에 귀족이고 영주인 것이다. 자신의 영지민을 잡아먹는 자를 어떻게 영주라고 할 수 있겠나. 그런 자를 어떻게 남작이라고 불러 줄 수 있겠나. 너희 자유민들은 자격 없는 자들의 꼬임에 넘어가 불명예스러운 자리에 온 것이다. 베르그렌 그리고 남손. 너희는 영주인가? 너희는 귀족인가? 감히 그렇게 주장하고 싶다면 너희의 자격을 증명하라! 여기 귀족의 자격이 없는 자를 심판하기 위해 나, 르하베트의 남작 윌리엄 버로스가 나왔다!"

"우아아아!"

전쟁 망치를 높이 쳐들고 외치는 내 뒤로 백작군의 열렬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내 앞에 늘어서 있는 남작군의 기세는 확연하게 꺾였다.

그리고 내가 떠드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기사 하나가 남작군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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