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48화 (48/248)

48. 우리가 돈이 없나 사람이 없지.

우리는 젠슨 상단을 약탈했던 자들을 토벌하고 복귀했다.

도적 반, 난민 반으로 이루어져 있던 그들 중 특히 죄질이 불량한 자들은 따로 골라내서 칼마르 시까지 끌고 왔다.

주로 전직 용병이거나 강도단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자들이다.

모두 칼마르 시의 성문 앞에 목을 매달아 버렸다.

끝까지 반항한 자도, 울며불며 용서를 구한 자도 있었지만,

결과는 모두 같았다.

아, 모두 같지는 않았다.

도망치려다 내게 목이 달아난 놈도 하나 있었으니까.

과한 처벌일까?

과거의 나라면 멈칫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무른 사람이라는 시선이나 받았겠지.

그러나 지금의 나는 이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곳에서 좀 살다 보니까 나름대로 이곳의 풍습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그리고 솔직한 내 속마음을 드러낸다면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정도다.

지금 칼마르 백작령으로 몰려오는 난민들 중 약탈과 살인, 절도를 경험하지 않은 자는 없다고 본다.

자신이 직접 했을 수도 있고

범죄의 대상이 되었을 수도 있고

범죄의 혜택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주변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경험하지 않은 자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순진하고 어리숙한 농민 따위는 없는 것이다.

일벌백계로도 부족한 상황이다.

칼마르 백작령에서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죽는다는 인식을 머리 속에 박아주지 않으면 어떤 개판이 날지 모른다.

그것은 회의실에 모여 있는 백작의 가신과 영지의 관리들도 모두 공감할 것이다.

리네아 여백작은 여전히 냉철한 표정이었지만 눈가에 살짝 내려앉은 피곤함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미 이틀째 제대로 자지도 못한 채 난민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특히 이제 건설하기 시작한 난민촌은 벌써부터 각종 문제가 불거져 나와서 그녀와 영지의 관리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문제는 너무 급격하게 증가하는 난민의 숫자입니다. 벌써 3천에 달합니다. 이런 식이면 조만간 한계에 도달할 겁니다. 빨리 계획대로 둔전을 시행해야 합니다"

칼마르 시의 시장인 멜러는 핏대를 올리며 주장했다.

그의 눈에 난민 무리는 거지 떼와 별로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당장 필요한 물품의 리스트를 대충만 보아도 그냥 한 살림을 차린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할 정도다.

게다가 멜러는 시장인 동시에 재정관이기도 해서 돈이 빠져나가는 일에는 까다롭게 굴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아무리 난민을 위해 미리 준비한 예산이 있다고 해도 하루하루 지출되는 돈은 재정관인 그에게 스트레스일 것이다.

"그렇다고 난민을 칼마르 시 주변의 마을에 흩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벌써부터 자경대와 충돌하는 사례가 숱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잘 못 대응하면 영지 전체에 대혼란이 닥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의회의 감사인 미켈슨은 난민은 난민촌에 모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가 대표하는 농촌과 산촌은 이번 난민 사태로 재난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을에 갑자기 큰 태풍이 들이닥친 느낌 정도 일까?

처음에는 인지상정으로 마을의 공용재산을 이용해 구호했지만 이 상태로 방치한다면 농촌 마을의 재정에 큰 타격을 입힐 것은 분명했다.

그에게는 지금도 어려움을 호소하는 촌장들의 탄원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는 만약 이대로 난민을 방치한다면 칼마르 백작령도 무법지대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촌장들의 의견을 회의석상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었다

일리는 있다.

자신이 대표하는 자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점도 인정할만 하다.

그러나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혹시나 농촌으로 추가 부담이 돌아올까 두려워서 다시 한 번 선을 긋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자신들은 더 이상 지출을 할 생각이 없으니 칼마르 시에서 난민에 대한 부담을 전적으로 지라는 이야기다.

다들 뻔한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만 끌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장 쓸 돈이 부족하겠지.

그리고 두려움다.

그래서 아무 것도 모른 척 끼어들었다.

"난민에 대한 처우는 이미 결정된 사항 아니었습니까? 예산도 준비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아렉슨 경은 난민촌의 건설과 관리를 위해 현장에서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나는 아직 먼지를 씻어내지도 못한 모습이었다.

먼지는커녕 옷에 묻은 핏자국도 그대로다.

약탈자들의 목을 매달고 영주성으로 돌아왔을 때 회의가 이틀이나 계속 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냥 회의실로 들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모두가 내가 고생하고 온 모습을 보고 내가 말할 때는 조심해서 말하라는 시위였다.

그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사람들이라서 내 질문에 핀잔은 없었다.

멜러가 사람들을 대표해서 내게 설명해 주었다.

"준비된 예산이 부족합니다. 윌리엄 경. 지금 당장은 괜찮습니다만, 앞으로가 문제가 됩니다."

"이해하기 어렵군요. 난민을 이용해 둔전을 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냥 허공에 던져버리는 돈도 아니고, 몇 년만 지나면 다 회수하고 추가로 세금까지 걷을 수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왜들 이렇게 돈 몇 푼에 벌벌 떨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몇천 명 수준이라고 예상했던 난민이 갑자기 몇만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니 이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준비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난민의 규모가 대략 3~4만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칼마르 시에서 감당하지 못할 규모는 절대 아니다.

명색이 제국 최대의 상업물류도시 아닌가.

어쩌면 자체 시예산만으로도 가능할 수 있다.

그것을 이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다.

아무리 난민의 규모를 예측하기 어렵다고 해도 칼마르 시의 재력이면 큰 문제는 없으리라는 것을 예상 못할 리가 없다.

진짜 문제는 이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껏 둔전을 일구었는데 영지를 이탈한 영주민의 송환 요구가 날아온다면?

둔전을 일구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영지전이 끝나서 사람들이 돌아가겠다고 한다면?

몇 백명도 아니고 몇 만명이면 송환 요구를 뭉개고 지나가기도 어렵다.

송환이 시작되면 둔전에 투입된 예산은 그냥 허공에 뿌린 돈이나 다름없게 된다.

그리고 아무도 말을 하고 있지 않지만 가장 두려워하는 문제.

올보르그 지역의 영지전이 둔전에 난민을 동원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칼마르 백작령까지 번지는 사태가 벌어지면 어떡하지?

노렌 용병대장의 말이 맞았다.

칼마르 사람들은 그동안 제국 내의 혼란에서 빗겨나 있어서 다른 곳과 다르다는 그의 평가가 틀린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사람들은 전쟁을 두려워했다.

"우리가 왜 둔전을 하려고 했는지 잊으신 것 같습니다? 칼마르 시의 자유민들은 다들 돈 버느라고 다른 일을 할 여유가 없지 않습니까? 상인, 공인, 선원인 우리 영지민들을 모조리 강제로 징병한다고 해봐야 5천 명이나 징병할 수 있을까요? 대신 칼마르 시의 산업은 박살이 나겠군요. 누가 물건을 만들고 누가 상행을 나가고 누가 배를 몰겠습니까? 다들 그것을 알기에 둔전을 하자는 백작님의 제안이 받아들여진 것 아니었습니까? 둔전을 일구고 난민을 병사로 징병한다는 복안에 모두 찬성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망설이고 있는 겁니까? 영지군은 최대로 동원해봐야 2천 명입니다. 부족합니다. 부족하면 채워야지요. 우리가 어디 돈이 없습니까? 병사 노릇 해줄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그러니까 돈을 벌 사람은 돈을 벌고, 땅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땅을 줍시다. 병사는 땅에서 뽑는 겁니다. 병사의 숫자만 지금보다 두 배로 늘릴 수 있으면 우리의 재산도 안전할 겁니다. 아무리 선제후들이 우리의 금고를 탐내도 손 못 댑니다."

"그렇다면 용병을 고용하는 것은······"

"아니, 용병은 무슨 하늘에서 떨어집니까? 그리고 숙련병은 너무 비싸요. 1년 정도만 고용한다면 모를까 장기고용으로 가면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작정하고 퍼 붓는 내 말에 사람들은 못 마땅한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섣불리 반대하지 못했다.

멀리서 벌어지는 전쟁은 장사하기에 좋은 조건지만 가까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이 사람들도 예상하고 준비는 했지만 막상 코앞에 전쟁의 위험이 닥치니까 당황했을 뿐이다.

곧 제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일하겠지.

다들 입을 닥치자 회의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리네아 여백작이 어색한 침묵을 깼다.

"멜러 경. 그래서 지금 당장 투입할 예산이 없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백작님. 예비비가 있습니다. 단지 다른 곳에 투자가 되어 있어서 회수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일단 내가 내 개인 재산을 내주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 급하니까 먼저 집행하세요."

"감사합니다. 백작님. 이자는 제대로 계산하겠습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이자를 이야기하는 멜러를 보니 역시 여기가 상업의 도시라는 것이 실감난다.

리네아 여백작은 내가 한바탕 지른 덕분에 빙빙 돌면서 변죽만 올렸던 회의가 끝난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그녀는 드물게 내게 농담까지 던졌다.

"윌리엄 경은 내가 내 개인 재산을 쓰는 것에 불만이 있나요? 그거 내 지참금인데."

"지참금은 리네아 백작님의 자비로운 마음씨만으로도 넘칩니다. 제게는 쓸만한 무기 하나와 잘 때 두를 겉옷 한 장이면 충분합니다. 백작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저는 언제나 백작님의 첫 번째 지지자이며 백작님의 적을 일격에 참살하는 검입니다."

와우!

이 정도면 나도 아부 좀 하는 것 같은데!

그래, 사회생활은 이렇게 하는 거지.

뚱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미켈슨 따위는 저리 가라고 해.

내 동아줄은 백작이라고.

회의를 끝내고 몸을 씻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 입은 후 간식까지 먹었다.

며칠 만에 제대로 쉬는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이럴 때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도록 하자.

나는 바스무스를 호출했다.

잠시 후 바스무스는 그의 두 동생과 함께 나타났다.

산에서는 걸레를 걸치고 검댕을 발랐는데 지금은 깔끔해진 모습이었다.

장사 바스무스.

내가 망루를 잃고 강에서 도망쳐서 산으로 갔을 때 만났던 산적이다.

그는 내가 만났던 사람 중에서 가장 힘이 강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오크와 맞짱을 떠서 이겼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정도로 강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흉포해 보이지도 않고.

오히려 순박한 느낌까지 들었다.

이런 덩치만 큰 평범한 남자가 일단 흥분하면 사람 하나는 죽여야 진정이 됐다는 흉악한 인간의 원래 모습이라니!

아마 그의 두 동생 때문일 거다.

내가 만났을 때의 그는 혼자였으니까.

"바스무스. 자네 이름은 바스무스라고 들었고. 옆의 동생들의 이름은 뭔가?"

"여자애는 알라시아, 이 어린 놈은 마틴슨이라고 합니다."

"여자애였나? 변장을 잘 시키고 다녔군."

"아무래도 위험해서 그랬습니다."

"오빠로서 현명한 행동이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나는 르하베트의 남작 윌리엄 버로스라고 한다."

"예, 남작님."

"사람이 필요하다. 말 잘 듣고, 힘 쎄고, 입이 무거운."

"......"

"동생들은 영주성에서 일하게 될 거다. 의식주 그리고 안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죽을 때까지도 칼마르 시를 공격한 자는 없었으니까.

바스무스는 한 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냥 힘이 세고 도리깨질이나 할 줄 아는 농부입니다. 남작님이 저희 목숨을 살려주셨으니 따르겠습니다."

"도리깨질, 좋군. 편곤을 쓰면 되겠어. 농사꾼이라니까 손에 익숙할 거야. 내일은 나하고 편곤을 쓰는 법이나 배워보도록 하지."

그러나 바스무스와의 약속은 조금 미뤄져야 했다.

용병대 하나가 전멸했다는 소식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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