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과거의 인연, 또 하나.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가 있는 시대가 아니다.
그렇다고 로마식으로 포장을 한 도로를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영지 외곽의 산을 둘러 가는 길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흙길이었다.
그 흙길에 10여 대의 마차가 한꺼번에 움직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실력 있는 추적자는 이렇게 남은 흔적에서 이런저런 정보를 알 수 있는 법이다.
노렌의 용병대에도 사냥꾼 출신으로 추적에는 상당한 실력이 있다는 하사관 하나가 있었다.
그는 한참을 앞서서 나가다가 노렌에게 돌아왔다.
"바퀴 흔적을 보니 마차에 식량을 실은 채 이동한 것은 맞는 것 같은데, 문제는 함께 움직인 난민이 적지 않습니다. 여자나 아이로 보이는 흔적도 꽤 있는데요."
"같은 마을 출신일 수도 있겠군. 게다가 산에다가 한 살림을 차릴 것 같은데. 이거 참."
하사관의 보고에 노렌은 못마땅하다는 표시를 잔뜩 내며 툴툴 거렸다.
"문제가 되나. 노렌 경?"
"난민이 모인 것이라면 조금만 불리해져도 금방 흩어지겠습니다만, 같은 마을 출신이면 쉽게 도망 안 갈 겁니다. 도시분들은 실감이 잘 안 가겠지만 같은 마을 출신이라는 것은 일가친척이나 다름없으니까요. 피를 많이 볼 수도 있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미 상단을 약탈한 순간부터 더 이상 난민은 아니지. 그 정도는 자네도 알 텐데?"
용병대장 노렌은 내 말에 마음이 놓인다는 듯 씩 웃었다.
그리고 왜 내게 괜찮겠냐고 물었는지 설명을 해 주었다.
"간혹 자비심이 많은 귀족분께서 떠도는 난민들을 너무 불쌍하게 생각하시는 경우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게다가 칼마르 백작령은 그동안 제국 내의 혼란에서 빗겨나 있었으니까요."
"아직도 그런 자비로운 귀족이 남아 있었나? 몇 년 전이라면 모를까 이제는 씨가 말랐을 걸. 그리고 칼마르 백작령은 겉보기와 달라. 여기도 나름 빡센 곳이라고. 노렌 경도 이곳에 좀 있다보면 알게 될 걸세."
용병대장 노렌은 도적을 토벌할 때 눈치를 봐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추격 및 귀순이 아니라 아예 포위, 섬멸로 기본 계획을 잡아 버렸다.
노렌 용병대는 약탈당한 마차들을 추적한 지 오래지 않아서 버려진 마차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차에 실린 식량은 당연히 없고, 마차조차도 일부 부품을 분해해서 가져갔을 정도였다.
약탈자들의 흔적은 이제 산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용병 대장 노렌은 처음 세웠던 계획을 바꿨기 때문에 약탈자들의 흔적이 남은 산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려던 것도 포기했다.
대신 칼마르 시에서 모병한 용병 중 이쪽 지역의 지리에 밝은 자를 앞세워서 근처의 마을에서 새로운 길잡이를 구해왔다.
그리고 그의 조언에 따라 약탈자들이 자리 잡을 만한 곳을 선정하고 길잡이와 척후를 함께 내보냈다.
아예 약탈자들이 자리 잡은 곳을 찾아낸 후 습격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그의 새로운 계획에 동의했다.
척후로 산을 들어갔던 길잡이와 하사관 2명은 하루가 지난 후 돌아왔다.
*
바스무스는 행복했다.
잘 빻은 밀로 만든 전병을 굽는 것도,
속재료도 못 넣은 전병이나마 그의 동생들이 머리를 맞대고 맛있게 먹고 있는 것도,
비명과 울음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도,
다 행복했다.
지난 3개월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그러나 이 행복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먹고 있는 이 식량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마스무스."
"예. 에. 엉님."
바스무스는 어눌하게 대답하며 자신을 부른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바보 노릇을 하는 것.
이것이 지난 3개월간 그가 생존한 방식이었다.
영리한 사람, 용감한 사람이 가장 먼저 죽었다.
마을 촌장, 자경대장, 어른들, 형님들.
뭔가 해 보려던 사람들, 남보다 앞장서야 했던 사람들이 먼저 죽었다.
그래서 그는 바보가 되었다.
그는 챙겨야 할 동생들이 있었다.
"따라 와라. 날라야 할 것이 있다."
"동싱들 먹고. 예."
"야, 바쁘다니까. 그냥 와!"
"이씨!."
바스무스는 험상궃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주먹을 쥐고 일어났다.
"야, 야! 알았어. 애들 다 먹이고 와. 아, 새끼. 정말. 말귀만 제대로 알아 먹어도 한결 나을텐데. 이 바보 새끼가 힘만 안 쎘어도."
바스무스는 그제서야 바보스런 웃음을 지으며 앉았다.
바보짓만으로는 생존에 충분하지 않다.
바보를 이용해 먹겠다고 달려들 사람은 많으니까.
이렇게 뭔가 거슬리면 미친 듯이 난폭해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필요했다.
특히, 그의 동생들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래야 했다.
이들의 무리와 처음 합류했을 때도 그랬다.
동생들에게 접근한 놈을 때려 죽이니까 그제서야 대접이 달라졌다.
그 전까지는 그냥 일꾼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자기 패거리의 하나로 취급해 주었다.
바스무스가 합류한 패거리는 패전한 용병대였다.
처음에는 용병대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대부분 전사하고 살아남은 용병들이 주축이었다.
그들에게는 손에 쥔 무기 이외에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당연하다는듯이 도적단으로 변해버렸다.
피난민들을 약탈하고, 아직 형체나마 남아 있던 마을을 덮치면서 덩치를 불렸다.
덩치를 불린 그들 중 절반은 도적, 나머지 절반은 도적의 가족이었다.
그렇게 완전히 도적단으로 변한 그들은 올보르그 지역의 전투를 피해서 그리고 칼마르 시의 풍요로움에 대한 소문을 따라서 이동했다.
다른 피난민들이 소문을 따라 칼마르 백작령까지 흘러온 것처럼,
도적단인 그들도 소문을 따라 칼마르 백작령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소문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식량으로 가득 찬 수레와 마차가 무방비나 다름없는 상태로 이동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래서 덮쳤다.
어떻게 안 덮칠 수가 있나!
밀포대가, 식량이 바로 눈 앞에 지나가는데!
하지만 한바탕 약탈이 끝나고나자 모두가 제정신이 들었다.
이곳은 내전 중인 올보르그 지역이 아니다.
칼마르 시에 있다는 백작이 화를 내고 군대를 보낼 것이 뻔했다.
그래서 그들은 산으로 도망치기로 했다.
물론 천 한조각까지 아쉬운 처지였기에 죽은 자의 속옷까지 벗겨서 모조리 들고 산으로 향했다.
도적단의 간부들은 산적이 되기로 결정하고 적당히 몸을 숨길 만한 곳을 물색했다.
그 결과가 지금 바스무스와 난민 떼거리가 모여 있는 곳이었다.
바스무스는 동생들을 챙겨 먹인 후 자신을 부른 도적들에게 갔다.
산채를 건설하려는 그들에게 바스무스는 좋은 일꾼이었다.
"이쪽부터 여기까지 목책을 세울 것인데, 아이고, 이 놈은 그런 말을 이해 못하지. 야. 여기 있는 이 바위들, 그래. 이것들. 들고 날라서 여기다 쌓아놔라. 다 쌓으면 이거, 밀자루다. 이걸 줄 거야."
"에.엉님."
바스무스와 난민 중 일부가 일을 시작한 지 한참이 되었을 때,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서는 들려서 안 될 소리였다.
바스무스는 나르던 돌덩이를 떨구고 몸을 숙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탁! 탁!
화살이 날아왔다.
무기를 들고 황급하게 뛰어나온 도적들이 화살을 맞고 나뒹굴었다.
"경계 서던 놈들은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거야!"
화를 내며 고함을 지르던 용병대의 하사관, 이제는 도적단의 두목 중 하나는 고함을 지르다 말고 앞으로 쓰러졌다.
그의 뒤통수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화살이 날아왔다.
도적들도 화살에 맞고, 난민들도 화살에 맞았다.
비명과 죽음이 골짜기를 메웠다.
그리고 잠시 후에 일단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맹렬한 속도로 달려온 병사들은 무기를 든 도적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한바탕 화살을 뒤집어 쓴 후라 겁을 잔뜩 집어먹은 도적들은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했다.
"엎드려라!"
"서 있는 자는 죽인다!"
"무기를 버리고 엎드려라!"
"엎드린 자는 살려준다!"
난전을 벌인 병사들 뒤로도 몇십 명의 병사들이 줄지어 내려오며 고함을 질러댔다.
그 소리를 들은 자들은 황급히 무기를 버리고 자리에 엎드렸다.
바스무스 역시 자리에 엎드려서 눈치를 살폈다.
동생들이 걱정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지금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걱정하는 그의 옆으로 십여 명의 병사들이 지나다가 멈췄다.
"이 자는 덩치가 좋군."
엎드린 바스무스의 위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바스무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관심을 끌면 안된다.
높은 분의 관심은 죽음이다.
그러나 높은 분의 관심은 그냥 지나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일어나라."
바스무스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면서 몸을 일으켰다.
고급스럽게 차려 입은 젊은 귀족과 눈을 부라리고 있는 중년의 용병이 있었다.
그리고 10명의 용병이 그들을 지키듯 둘러싸고 있었다.
높으신 분이었다.
몸을 일으킨 그를 경계하듯 두 자루의 창이 그를 겨눴다.
살기어린 눈빛은 당장이라도 그를 찌를 것 같았다.
바스무스는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조금이라도 반항한다면 죽는다.
그는 가늘게 떨리는 손을 가눌 수 없었다.
"아까 바위를 나르던 자를 봤는데, 그게 너 였나?"
"에. 바위. 나르습니다."
젊은 귀족은 비웃는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있는 바위를 가리키며 명령했다.
"좋아. 이 것도 들어봐라. 들 수 있으면 너는 내가 고용하지."
바스무스는 젊은 귀족의 옆에 있는 바위를 보았다.
아까 들고 나르던 바위의 두 배는 되는 크기였다.
과연 들 수 있을까?
하지만 들지 못해도 들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성문 앞에 대롱대롱 목이 매달릴 것이다.
강도질, 그것도 사람을 죽이고 강도질을 한 자는 성문 앞에 목이 매달리는 것이 기본이니까.
칼마르 귀족의 자비만을 믿고 있기에는 자신의 덩치가 너무 컸다.
도적이 아니라고 주장해봐야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바스무스는 크게 심호흡을 몇 번하며 바위를 노려보았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고향에서 비슷한 크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요 며칠 동안 밀로 된 전병이나마 잘 챙겨 먹었다.
그러니까 들 수 있다.
들어야 한다.
으아악!
바스무스는 무릎을 구부리고 바위를 끌어 안았다.
그리고 고함을 지르며 일어섰다.
아랫배 어디선가에서 회오리치듯 쏟아져나오는 힘이 그를 도왔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힘이 빠진다는 느낌이 들 때 간신히 바위를 옆으로 던질 수 있었다.
쿵!
땅이 울리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바위가 떨어졌다.
경악한 얼굴로 그를 보는 병사들 사이에서 젊은 귀족은 기분좋게 웃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옆에 있던 중년 용병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노렌 경을 따라온 덕분에 내게 힘 좀 쓸 법한 부하가 하나 생겼어."
"축하드립니다. 윌리엄 경."
그 때, 사람들 사이를 뚫고 바스무스의 동생들이 달려왔다.
"오빠!"
"형."
울면서 바스무스에게 매달리는 아이들을 본 칼마르의 젊은 귀족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상상 외의 일을 만난 사람 같았다.
"동생들이 있었다고?"
"예. 나으리. 둘 다 제 동생입니다."
바스무스는 고개를 수그리며 끄덕였다.
"그래? 살아 있는 동생들을 위해서라도 내게 제대로 봉사해야겠군. 그리고 더 이상 병신 짓은 하지 마. 제대로 말하니까 얼마나 듣기 좋은가 말야."
바스무스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고 그의 새로운 고용주를 바라보았다.
윌리엄 경이라고 불린 젊은 귀족은 더 이상은 그에게 관심이 없는지 중년의 용병을 옆에 끼고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바스무스는 그와 그의 동생들의 운이 아주 좋다고 생각하며 동생들을 보듬었다.
*
그러나 칼마르 백작령의 경계로 갔던 용병대 하나는 그다지 운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더 강력하고 잔인한 자들과 맞부딪쳤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패배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무기와 갑옷을 모두 내어준다고 하지 않았나!"
"맞아. 용병끼리는 그렇게 하지. 패배한 자의 무기와 갑옷을 받고 그냥 보내주는 것이 관습이라는 정도는 나도 알아."
"그런데 왜!"
"내게 검을 들이댔으니까. 그러면 반역이야. 반역자는 죽어야 해!"
조곤조곤 설명하던 자는 갑자기 미친 듯이 화를 내며 칼을 내리쳤다.
항의하던 용병 대장의 머리가 단숨에 둘로 갈라졌다.
그의 부하 용병들 역시 다르지 않은 처지가 되었다.
포로가 되어 묶인 채 한 쪽에 몰려 있던 용병들은 자신들을 향해 내리치는 무기에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학살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학살을 저지른 용병대는 현장을 치울 생각도 하지 않는 듯, 곧 자신들의 깃발을 들고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카날 용병대.
울보르그 지역의 분쟁에서 활약하던 용병집단이었다.
그리고 에릭 칼마르가 용병 대장으로 있는 바로 그 곳이었다 .
그는 피에 젖은 자신의 칼을 허공에 털었다.
핏방울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죽어 있는 용병대 대장의 얼굴에도 그 흔적이 남았다.
에릭 칼마르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보았다.
칼마르 시를 향한 큰길.
그것이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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