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46화 (46/248)

46. 난민이 몰려온다.

다들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지만,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많은 노력과 자본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강을 따라 내려오는 것은 배에 타기만 하면 된다.

노를 저을 필요도 없고, 황소로 배를 끌고 갈 필요도 없다.

심지어 배가 없어도 된다.

통나무를 얼기설기 엮어서 그 위에 올라타고 긴 장대로 방향을 잡으면서 내려오면 그만이다.

게다가 달라벤 강처럼 느린 유속과 언제나 일정하고 충분한 유량을 가진 강이면 그 난이도가 확 떨어진다.

그리고 달라벤 강의 끝에는 칼마르 시가 있다.

멀리 떨어진 영지에서도 칼마르 시와 그 주변의 풍요로움에 대한 것은 상식이다.

칼마르 시에 가면 빈 몸에 빈 손으로 가도 일할 자리가 있다.

항구에서는 언제나 선원을 구하고 있고 배에 타기만 하면 1년 치 선금을 준다.

약간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칼마르 시의 공방에서 일하는 것도 좋다.

공방 길드들은 언제나 기술자가 부족하다.

농사일만 아는 사람이라면 칼마르 시 주변의 농촌에서 날품팔이를 하면 된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과장인지 알 수 없는 이런 종류의 소문은 평소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칼마르 시가 어디 이웃 마을도 아니고, 가려면 달라벤 강을 따라 배를 타고 며칠씩 내려가야 있는 곳이다.

물길을 관리하는 영지의 관리인들 역시 중간중간 자리를 잡고 함부로 영지를 떠나려는 사람들을 막는다.

결정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자라고 죽었다.

멀리 가봐야 이웃 마을 정도였다.

이웃 영지 정도가 되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먼 외국이었다.

그렇게 좁은 세상에서 나고 자라고 늙고 죽는 것이다.

그런 땅 중에 올보르그라는 지역이 있다.

평범한 곳이다.

3개의 남작령과 1개의 백작령이 이웃했고,

산이 좀 있고 주로 농사짓고 사는 그런 곳이었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남작령 하나가 달라벤 강을 접하고 있어서 달콤하게 꿀을 빨고 있다는 정도?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고 내일도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는 땅이었다.

그런데 높으신 분들의 전쟁이 그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막시밀리안 공작과 글렌 공작이 바로 그 높으신 분들이었다.

그들 간의 가벼운 신경전이 곧 체면을 건 영지전이 되었고,

각자의 사정에 의해 영지전은 아예 내전급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전쟁을 위한 특별세,

다음에는 젊은이를 대상으로 한 인력 공출,

그리고 군대가 지나가며 사람과 물자를 징발했다.

징발은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징발할 것이 없으면 또는 징발을 거부하면

약탈이 시작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버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도망쳤다.

처음에는 이웃 마을로 그리고 산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이웃 마을도 별 차이가 없는 상황이고,

산에서는 많은 사람이 살 수 없었다.

서로를 약탈하고 죽이며 살 길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은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칼마르 백작령에 대한 소문.

일자리가 넘치는, 풍요로운 영지에 대한 소문을 기억해 낸 것이다.

만약 칼마르 백작령까지 걸어가야만 했다면,

칼마르 백작령으로 향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길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칼마르 백작령의 관리들은 누가 자신들의 땅으로 오려고 했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달라벤 강이 칼마르 백작령으로 향하는 물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설사 그 사실을 몰랐던 사람도 금방 소문을 듣고 달라벤 강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달라벤 강으로 가던 도중에,

그리고 달라벤 강에서 죽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달라벤 강을 따라 내려왔다.

나룻배를 훔치기도 하고, 뗏목을 만들어 타기도 하고,

그도 못하는 사람들은 무작정 강을 따라 걸어서 내려왔다.

그들이 칼마르 백작령에 도달했을 때,

칼마르 백작령은 난민의 거대한 물결과 맞부딪쳤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것은 강도와 도둑의 물결이기도 했다.

가장 먼저 백작령 경계선의 촌락에서 비명을 지르는 촌장의 보고서와 파발이 연달아 영주성에 도착했다.

상황 파악이 채 되기도 전에 달라벤 강의 물류가 막혔다는 보고가 상단을 통해 들어왔다.

그리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강 옆의 길을 따라 이동하던 상단이 약탈당했다고 영지군이 알려왔다.

난민이 올 것은 예상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규모가 너무 크고 갑작스러워서 영주성에 모인 관리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

"보고하라."

"닉카 마을의 자경대원의 보고입니다. 베르그렌 남작령, 남손 남작령에 속한 영지민 50여 명이 닉카 마을에 도착해서 구호를 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젊은 남자는 없고, 절반이 노인과 여자, 아이들입니다. 나머지는 장년층의 남자들인데 부상자가 상당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말로는 자신들 뒤로도 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수백 명은 오고 있다고 합니다. 닉카 마을 촌장은 일단 마을 공용 창고의 물자로 구호를 하고는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문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경대장은 현재 자경대원이 40명이 채 안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외부의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며 영지군의 파견을 요청해 왔습니다."

"촌장들의 보고가 더 있나?"

"다섯 군데에서 보고서가 도착했습니다. 모두 영지군의 파견과 식량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촌장들의 보고서를 취합해보면 적어도 2천에서 3천의 난민이 하루 이틀 사이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리네아 여백작은 아무런 표정도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계속 보고할 것을 요구했다.

영주성의 문관들이 보고서를 취합하고 정리하여 보고하는 동안에도 전령이 계속 도착하고 있었다.

"급보입니다!"

"뭔가?"

"젠슨 상단에서 패트슨 남작령으로 운반하던 밀이 난민들의 공격에 의해 약탈당했다고 합니다. 호위하던 용병과 상인들이 모두 살해당했고, 불과 2명 만이 탈출에 성공해서 사고 소식을 알려왔습니다."

난민이 몰려와서 구호를 기다린다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문제였다.

식량을 운반하던 상단이 통째로 몰살당했다면 난민으로 구성된 무장집단의 규모가 상당하다는 뜻이다.

어쩌면 난민이 아니라 탈영병 무리일 수도 있다. 아니면 아예 약탈에 나선 용병일지도.

정체가 무엇이든 이런 종류의 무장집단은 빠르게 제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리를 잡고 앉아서 통행세를 걷는 산적이나 수적이 되고 만다.

과거의 나처럼.

"마스터 요한.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영지군으로 난민을 구호하고, 용병으로 도적을 토벌하겠습니다. 농촌과 산촌의 촌장들에게는 난민에게 먹을 것을 주고 칼마르 시로 보내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계획대로 칼마르 시 외곽에 난민촌을 만들도록 하지요."

영지군은 충성심과 전투력 모두 믿을 수 있는 전력이지만 백작령 전체를 커버하기에는 그 숫자가 적다.

지금 소집되어 있는 영지군도 1천 명 정도가 전부다.

패트슨 남작과의 영지전을 준비하면서 영지군을 소집해서 1천 명이라도 숫자가 채워진 것이지 평소 같았으면 3백 명도 많다고 했을 거다.

이들을 백 명 단위로 나누어서 백작령 경계와 길목에 배치한 후 난민을 난민촌으로 유도하면 된다.

그리고 용병 역시 패트슨 남작과의 영지전을 대비해서 용병대장들에게 모병을 지시한 덕분에 5개 용병대에 각각 백명씩은 대기하는 중이다.

그러고 보면 패트슨 남작의 도발이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이렇게 미리 군대를 소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영지군은 제가 지휘하겠습니다. 용병대는 윌리엄 경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경비대는 무기한 비상대기 상태로 절반은 난민촌에 투입되어야 합니다. 아렉슨 경은 준비해 주십시오."

리네아 여백작은 백작령의 유력자들에게 보내는 유화 메세지로 아렉슨을 경비대장에 유임시켰다.

그가 원래 모건 계열의 사람이기는 했지만 백작에게 충성하면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프리베르크와 호그베르크를 동시에 숙청하는 바람에 술렁거리던 유력자들은 백작의 메시지에 마음을 놓고 충성을 외치는 중이었다.

혼란이 닥쳐온 지금, 유력자들의 안정은 백작령에도 좋은 일이다.

나는 임무 분담에 따라 대기중인 용병대들에게 갔다.

5명의 용병대장이 각각 그들의 직속 부하들과 함께 용병을 모병해서 꾸린 5개의 용병대다.

각각 백 명 정도 규모이니까 총원은 5백명 정도 된다.

용병대장,

언제나 데리고 다니는 그의 숙달된 하사관 집단 10여 명,

모병이 있으면 우선적으로 고용되는 경험이 풍부한 선임 병사 30여 명,

사지멀쩡하고 제대로 보고 들을 수 있으면 합격인 용병이 60여 명.

그게 1개 용병대의 구성이다.

즉 숙련병 40명에 비숙련병 60명으로 구성된 백인대 하나인 셈이다.

무장은 모두 각자 부담.

그래도 비숙련병을 위한 기본적인 무장은 가불로 땡겨서 갖춰는 준다.

5명의 용병대장들은 내게 더 없이 곰살맞게 굴었다.

내가 칼마르 영지의 통치자인 리네아 여백작의 약혼자(예정)니까 잘 보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덕분에 명령권을 두고 쓸데없는 다투지 않아도 되었다.

용병대장들은 모두 내 명령에 절대 복종하겠다고 입을 보아 맹세했다.

그럼 나는 편하지.

2개 용병대는 달라벤 강으로,

2개 용병대는 백작령의 주요 도로로,

그리고 나는 남은 용병대 하나와 함께 약탈을 벌인 무장집단을 추격하러 출발했다.

"노렌 경. 용병들의 무장 상태가 좋군. 마음에 드네."

"감사합니다. 윌리엄 경. 무리를 해서라도 무장은 제대로 갖추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렌 용병대의 대장인 노렌은 중년의 노련한 용병이었다.

그는 용병이 제대로 무장을 갖추지 않으면 경험을 쌓기도 전에 쉽게 죽는다면서 갓 들어온 신참 용병이라도 갑옷과 투구, 칼은 무조건 지급한다는 방침을 자신의 용병대에 적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숙련병의 비율이 다른 용병대보다 높았다.

그리고 노렌은 자신이 용병대를 이끌고 5차례의 영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상단호위나 유력자의 경호로 경력을 쌓은 것이 아니라 전투로 경력을 쌓았다는 것을 어필하는 것이다.

"사실 용병대장이라는 자리가 좋은 일거리를 따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잘 지휘하는 것은 하사관들이, 잘 싸우는 것은 선임병들에게 맡기면 되니까요. 제가 윌리엄 경에게 이렇게 노렌 용병대의 실력을 강조하는 것도 좋은 고용주를 놓치기 싫어서 그러는 겁니다."

"칼마르의 백작님은 좋은 고용주인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그렇지만 제가 지금까지 모신 고용주분들 중 가장 좋으신 분입니다."

"왜 그런가?"

"계산이 명확하시니까요. 의뢰는 명확하고 의뢰비는 선불로 주십니다. 충성을 바치기에 부족함이 없으시지요."

"왜? 의뢰비를 떼어먹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지?"

"아직 떼어먹힌 경우까지는 없었습니다만, 외상으로 했다가 알아서 약탈로 채우라는 경우는 있었습니다."

"음, 아직 영주들의 돈이 마르지는 않은 모양인데?"

"윌리엄 경께서도 영지전이 길어지면 생기는 문제를 아시는군요. 그래서 저희가 칼마르를 떠나고 싶지 않은 겁니다. 많은 영지들이 앞으로는 문제가 심각해 질 겁니다."

우리 둘은 수다에 가까운 대화를 하며 젠슨 상단이 난민들에게 공격당한 현장으로 향했다.

현장은 깔끔했다.

마차와 식량은 함께 사라졌고, 전투의 흔적도 마찬가지였다.

현장 주위를 조사하자 죽은 사람들을 묻어놓은 큰 구덩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기는 물론 옷과 신발까지 깔끔하게 걷어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냥 난민이 아니었다.

조직화된 자들이었다.

"노렌 대장. 마차 바퀴자국을 발견했습니다. 산길을 따라 간 것 같습니다."

"좀 위험해 보이지?"

용병대장의 질문에 그의 부관 역할을 하는 하사관이 잔뜩 인상을 썼다.

"보시는 대로죠. 뒷정리 깔끔하게 하고 갔습니다. 어중이떠중이 아닙니다."

"쯧쯧. 새로 들어온 녀석들에게 방패 들려서 일선에 세워. 독전대 할 애들 바로 뒤에 붙이고. 앞에 서는 애들은 갑옷, 투구 다시 점검해 줘. 적어도 화살에 뚫리는 일은 없도록 하자고."

노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하사관이 용병들에게 돌아갔다.

잠시 후 길을 따라 노렌 용병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