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숙청이 끝났다.
덩치는 한국에서 거인이라고 불리던 씨름 선수를 연상시킨다.
팔은 거의 무릎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숏다리다.
목덜미까지 두툼한 것이 정말 고릴라를 빼닮은 모습이었다.
클라손 프리베르크는 생긴 모습부터가 남달랐다.
아무리 때려도 끄떡도 안 할 것 같은 느낌?
한때는 마스터 요한과 비등비등하게 겨뤘다는 말이 이해가 간다.
그러나 지금은 살인교사범에 지나지 않는다.
본인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체포를 해야겠지?
"그게 패트슨의 기사들을 때려잡았던 철몽둥이인가? 생각보다는 매끈하게 빠졌군."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철로 된 봉을 본 클라손이 감상을 말한 후 자신의 무기도 들어보였다.
커다란 외날도였다.
일반적인 사람 키 정도는 될 정도로 비정상적인 크기였다.
클라손은 대도를 칼집에서 뽑은 후 칼집은 옆으로 휙 던져 버렸다.
시퍼렇게 날이 선 대도는 풍기는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생긴 것은 손잡이를 길게 한 펄션을 닮았는데 자신의 체격에 어울리게 크기와 두께를 키운 것이라서 전혀 펄션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제대로 맞으면 뭐든지 일도양단이 가능할 저 두툼한 대도는 칼등으로 쳐도 사람을 패 죽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클라손은 칼집을 옆으로 던지기가 무섭게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긴 팔 그리고 긴 도.
이 두 가지의 조합은 위력적이었다.
아직 거리가 있다고 있다고 느꼈던 클라손과 나 사이의 간격은 순식간에 없는 것이나 다름없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외날도 특유의 내려치기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한 번이 아니었다.
난사하듯 연달아 내려찍는 대도의 시퍼런 날이 어깨와 머리를 위협했다.
서늘한 기운이 나를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보고 막는 것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는 나다.
아무리 빠르게 내리쳐도 다 보인다.
나는 철봉으로 대도의 옆면을 연달아 쳐내며
빈틈을 노렸다.
더 가까이 다가온다면 목을 철봉의 스파이크로 찔러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클라손은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그자의 대도가 비정상적으로 길기는 해도,
내 철봉 역시 짧은 길이는 아니다.
둘 사이의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
그는 내가 대도의 옆면을 연달아 쳐내면서도
철봉의 끝이 휘청임 없이 계속 자신을 겨누는 것을 보고
조심스러워진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실책이 되었다.
조심스러워지면 기세가 죽는다.
기세가 죽으면 속도가 느려진다.
속도가 느려지면 잡힌다.
이렇게!
클라손의 대도가 다시 내 어깨를 내리치는 순간 철봉은 대도를 쳐내는 것이 아니라 갖다 내고 눌렀다.
그리고 대도의 움직임에 따라 철봉도 움직이며 대도를 놓지 않았다.
철봉과 대도가 서로 맞닿은 자리에서 불꽃이 일었다.
그러나 두 무기가 맞닿은 자리가 미끄러지며 움직이기는 했지만 떨어지지는 않았다.
결국 철봉이 대도를 잡은 것이다.
우리 둘은 무기를 서로 맞대고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내가 한 발 앞으로 가면, 클라손이 한 발 뒤로 가고,
클라손이 한 발 앞으로 오면, 내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클라손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흘렀다.
횃불에 드러난 그의 얼굴이 번들거렸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생긴 것과 달리 힘이 딸리나?
아니면 이런 고릴라 체형조차 내 힘을 따라오지 못하는 걸까?
그를 보며 씩 웃었다.
저놈은 지쳤고 나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나는 클라손의 커다란 도를 오른쪽 아래로 확 쳐내려고 했다.
클라손이 내 움직임에 맞추어 대도를 버티려는 순간,
철봉을 빼내면서 크게 휘둘러 클라손의 왼쪽 오금 뒤를 후려쳤다.
불시에 무릎 뒤를 맞은 클라손은 균형을 잃고 한 쪽 무릎을 꿇으며 옆으로 넘어졌다.
지금이다!
바로 매타작을 시작했다.
클라손이 완전히 쓰러지기도 전부터
철봉을 길게 잡고 클라손을 두들겨 팼다.
최초의 일격은 대도를 잡고 있는 손이었다.
손은 생각보다 약한 부위다.
손가락뼈의 굵기와 그 뼈를 둘러싸고 있는 근육을 생각해 보면 아무리 단련한 사람이라도 철봉에 맞는 순간 골절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것으로 커다란 도는 완전히 무력화됐다.
바로 다음 타격부터는 머리 쪽을 연달아 가격했다.
이러면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서 머리를 보호하게 된다.
손도 못 쓰게 되고 팔도 묶은 셈이다.
쓰러진 상태에서 팔을 쓰지 않고 일어나려고 하면 정말 힘들다.
하물며 위에서 1.5미터에 달하는 철봉인지 철몽둥이인지 헷갈리는 무기로 맞으면서 일어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클라손은 일어나지 못하고 계속 두드려 맞았다.
한때, 칼마르 영지군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적이 있다는 사람이,
한 때, 마스터 요한과 호각을 이뤘고 결국은 패배했지만 아직까지도 이름값이 남아 있는 자가,
내 앞에서 쓰러진 채,
꿈틀거리며
신음을 흘리며
비참하게 두드려 맞고 있는 것이다.
한참을 두들기니 일어나려는 것을 포기하고 축 늘어졌다.
정신을 잃은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늘씬하게 두들겨서 잘 다져놓으니까
저항할 생각은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 팼나?"
"내게 독을 먹이려고 한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패도 부족합니다. 기분 같아서는 당장에 죽이고 싶지만 그래도 백작님의 판결이 있어야 하니까 이 정도로 참겠습니다."
"그래. 일단은 살인교사범이니까 재판이 필요하지. 반역도 아닌데 현장 처분은 안 되네. 자네 평판도 생각해야 해."
평판.
그렇지.
여백작의 약혼자가 미친놈 같다는 말을 듣는다면 여러 사람의 입장이 좀 곤란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미친 놈 같다는 평판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
나를 장기말로 올리려는 사람들이 나를 이용하기 전에 한 번쯤 더 망설일테니까.
이 미친개 같은 놈을 이용하려다가 혹시 물리는 것은 아닐까?
이런 망설임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괜찮은 평판이다.
내가 진짜 리네아 여백작과 결혼할 것도 아니니까 평판 관리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클라손을 묶고 주변의 인원들도 체포해서 끌고 가는 동안 일부 영지군과 그들을 지휘하는 기사들은 프리베르크 가의 저택으로 진입해서 사용인들까지 몽땅 끌어내서 격리했다.
날이 밝으면 칼마르 백작가의 서기들와 기사들이 몰려와서 저택을 다시 한 번 싹 뒤질 예정이다.
특별한 것이 안 나오면 별 문제 없겠지만 뭔가 특별한 증거라도 나오면 살인교사가 반역으로 죄목이 바뀔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바뀔 것으로 확신한다.
"고생했네. 생각보다 자네 실력이 더 좋아진 것 같아. 클라손이 그렇게 만만한 자가 아니었는데 쉽게 제압해 버렸군."
"글쎄요."
나는 나보다 더 고생한 철봉을 들어 보였다.
클라손의 대도를 쳐냈던 철봉은 곳곳에 흠집이 가 있었다.
몇 군데는 상당히 깊은 흠집이라서 이 철봉을 계속 쓰는 것은 위험해 보였다.
언제든 반쪽이 날 테니까.
대장간에 넘겨야겠다.
"망가졌군. 클라손의 대검 실력은 전부터 좋았어. 발 움직임이 안 좋아서 그렇지 무기 쓰는 실력은 나도 무시 못할 정도였으니까. 서로 간의 입장 차이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이 쳐내기는 했지만 아쉽기는 해. 영지군에서도 꽤나 활약할 공간이 있었는데."
"그러면 이제 숙청은 다 끝난 겁니까?"
마스터 요한은 슬쩍 주변 기사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내게 손짓을 한 후 영주성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따라붙어서 나란히 걸었다.
"내 스승님은 이름있는 무술가셨지. 계승 남작 작위도 갖고 계셨고, 재산도 상당히 있었다고 기억하네. 자택 규모가 만만하지 않았거든. 제자들도 많았고. 나는 그때 아직 어린애 였어. 사라는 아기였고."
"칼마르 인근 출신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아예 마르스홀롬 제국 출신도 아니지. 우리는 무밀 왕국 사람들이야. 지금은 의미없는 이름이지만."
무밀 왕국?
제국 북쪽에 있는 왕국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이고 사람은 거칠기 짝이 없다는 곳이다.
그게 내가 아는 무밀 왕국에 대한 지식의 전부다.
지도에서만 보던 나라 출신이 바로 옆에 있었다니 신기하기는 했다.
"사정이 있어서 스승님과 스승님의 막내였던 사라, 그리고 나는 왕국을 떠나야 했네. 그리고 신원을 숨기고 흘러흘러 칼마르 시까지 왔었지. 그 때가 벌써 30년도 전이군."
"전대 칼마르 백작님께 마스터 요한의 스승께서 발탁되신 거군요."
"맞네. 전대 칼마르 백작님은 나이도 젊으신 분이 진짜 통이 크셨지. 심지어 그분과 백작 부인께서는 사라와 나를 한 가족으로 삼아 주셨지 뭔가. 내게는 큰 형님이셨어. 그분은."
마스터 요한과 시녀장인 사라 남작 부인은 사실 일반적인 가신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마치 리네아 여백작의 친척처럼 굴었고, 리네아 여백작 역시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진짜 일가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까지 했으니까.
"칼마르 시는 백작령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정착할 당시만 해도 백작의 권한이 지금처럼 크지는 않았다네. 시의회의 의장과 상단들의 대표와 시장을 겸한 정도? 지금처럼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은 없었지. 지금의 권력은 전대 백작께서 이룩해 놓으신 걸세."
"전대 백작께서 1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것은 그동안 진짜 운이 좋았다는 말 밖에 못하겠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많이 노력했다고 생각해주게. 지금까지 우리가 잡아낸 암살자가 몇 명이나 됐을 거라고 생각하나?"
미니맵도 없이 암살자를?
나로서는 무리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가문 단위로 쓸려나간 경우는 거의 없어. 노골적으로 외부와 손을 잡고 반항하는 자들 말고는 경고만 하고 그냥 넘어간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래서 영지의 유력자들이 적당히 타협하는 면도 있지. 웬만하면 목숨은 안전했으니까. 어쨌든 오늘 두 베르크 가문의 숙청을 끝으로 외부 세력과 손을 잡고 일을 꾸밀 만한 가문은 이제 없다고 생각하네. 막시밀리안이든 글렌이든지 칼마르에서 호응하고 나설 자들은 더 이상 못 구할 걸세."
"역시 난세를 걱정하신 겁니까? 전대 백작께서는?"
"황제 궐위 이후로 계속 걱정하셨지. 그래도 궐위 상황이 앞으로 오래 가지는 않을 거라고 예측하셨네. 길어야 한 5년 정도? 그래서 중립을 유지하고 쓸데없이 영지전에 말려들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하셨다네. 나는 그 분의 유지를 따르는 것 뿐이야."
그러나 나는 5년 후에도 황제가 없었음을 안다.
아니면 내가 죽고 얼마 안 되어서 황제가 등극했나?
예측에서 1~2년 정도 차이나는 일은 감안할만 하잖아.
"그러나 그 이후에도 계속 황제위가 궐위 상태라면 선제후들간의 전면적인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말씀하시더군. 그러면 제국은 산산이 부서져서 대혼란이 닥칠 거라고 하셨지."
"그거야 5년 이후에 가 봐야 알 일이겠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주변에서 일어난 영지전에 말려들지 않는 거겠지요?"
"그렇지. 나도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외부세력과 연계해서 말썽을 피울만한 자들은 다 정리했으니까 우리는 장사나 하면 되겠습니다. 전쟁통에도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니까요."
"자네는 확실히 상인 냄새가 나. 칼마르 백작가에 잘 어울리는 약혼자같아."
"잊지 마십시오. 5년입니다. 저는 그 이상 일 안 합니다?"
"그래. 5년."
정말 아무 쓸데없는 주변 영지의 전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리네아 여백작부터 사정을 아는 가신들까지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전쟁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전쟁이 우리에게 관심을 갖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울보르그 지역에서 벌어진 영지전의 여파가 칼마르 백작령까지 밀어닥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