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44화 (44/248)

44. 고릴라 잡는 날.

시종은 내가 내민 쟁반을 보고 벌벌 떨기 시작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부들부들 떨면서 말하는 꼴을 보니 첩자니, 암살자니 하는 종류의 훈련은 안 받아본 것 같고, 그냥 백작가의 시종으로서 훈련을 받은 정도?

하지만 음식에다가 뭔가 저지른 것은 분명해 보였다.

나는 시종을 잡고 넘어뜨렸다.

그리고 끈을 꺼내서 손목과 발목을 등 뒤로 해서 함께 묶어 주었다.

이러면 절대로 수작을 부릴 수 없다.

"살려주십시오! 왜 이러십니까! 아니, 잘못했습니다!"

두서없는 외침이 시종에게서 터져 나왔다.

동시에 복도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뛰어 들어왔다.

"암살자다. 영주성을 폐쇄하고 사람의 이동을 막아라! 누구든지 영주성을 나가려는 자는 잡아 가둬라!"

순식간에 영주성이 폐쇄되고 기사들과 시종장이 달려왔다.

"시종장. 잘 왔습니다. 개 한 마리 데려 오십시오."

"예? 예. 알겠습니다."

시종장은 내 요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깨닫고 금방 어디선가 개를 한 마리 수배해왔다.

낯을 가리지 않는 개였다.

낯선 사람이 주는 음식도 잘 먹을 정도로.

개는 내 쟁반에 담긴 음식을 먹고 캑캑 거리다가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가 보고 있는 앞에서 죽어 버렸다.

차 한 잔 마시면서 비스켓 하나 먹을 정도의 시간이었다.

그 광경을 본 시종은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시종장 역시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시종장님. 저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외만이라고 백작님을 모신지 4대째 되는 집안사람입니다. 그 집안사람들은 대대로 한두 명씩 시종이나 서기관을 했지요."

간신히 정신을 추스른 시종장은 내 질문에 빠르게 대답했다. 자칫하면  자신까지 말려들어 갈까 봐 두려워하는 티가 역력했다.

"그렇다면 입이 무겁겠군요."

"보통 사람보다는 확실히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협박으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물로 합시다. 물은 답을 알고 있는 법이니까."

"예?"

시종장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그리고 외만은 과연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보여줬다.

물속에 얼굴을 담그고 삶과 죽음의 날카로운 경계를 넘나들다 보면 모든 것이 헛되게 느껴지는 법이다.

간절한 것은 오직 산소, 그것 하나뿐, 다른 것은 필요 없게 된다.

그 정도가 되면 모든 것을 말한다.

혹시 산소 말고 다른 것이 생각나는 듯이 보이면 다시 물에게 물어보면 된다.

그렇게 외만은 자신이 누구의 지시를 받아서 약을 음식에 탔는지 실토했다.

놀랍게도 주모자는 외만이 속한 호그베르크가의 가주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프리베르크가의 가주 역시 같이 있었다고 한다.

외만은 이어서 되지도 않는 변명도 같이 늘어놓았지만 그것을 누가 믿어주겠나.

설사약인 줄 알고 있었다니!

나 원 참.

그것도 문제지.

명색이 백작의 약혼자가 그 치욕을 당하고 어떻게 여기서 고개들고 사나?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겠다는 목적이었으면 그럴듯하기는 했다.

그러나 시종이 음식에 섞은 약은 설사약이 아니라 즉사성 독약이었다.

즉사성 독약은 구하기도 쉽지 않다.

그리고 먹었으면 죽었겠지.

체력이 MAX라도.

······아마도?

이거 나중에 확인해 봐야겠는데.

자백을 받고 배후가 드러나자 곧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리네아 여백작과 시녀장인 사라 부인이 들어왔다.

"윌리엄. 다행이다. 처음에 독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대도 잃는 줄 알았다."

"백작님. 저 그렇게 쉬운 사람 아닙니다."

작위와 영지를 받았는데 5년은 버텨야 계약 이행 아니겠습니까?

그거 놔두고 억울해서 못 죽습니다.

내가 가벼운 미소를 섞어가며 편하게 말하자 리네아 여백작의 얼굴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아직도 놀란 티가 가시지 않았지만 적어도 큰 근심은 덜었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시녀장인 사라 부인은 서릿발이 내린 것 같은 얼굴로 시종장을 다그치고 있었다.

"저자는 호그베르크 집안사람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사라 남작 부인."

"믿을 수가 없군요. 호그베르크라면 4대에 걸쳐 봉사해온 집안일 텐데. 이런 식이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외부인이 아니라 내부인과 연통한 것이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적어도 백작님께 직접 위해를 가하려는 시도는 없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당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닐슨. 당신은 영주성의 시종과 하인들 중에서 호그베르크와 친척 관계에 있는 자들의 명단이나 정리해 놓으세요. 그리고 하녀장보고 오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남작 부인."

시종장 닐슨은 황급하게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그와 맞바꾸기라도 한 듯이 마스터 요한이 나타났다.

그의 뒤에는 부관 역할을 하는 기사 2명이 뒤따르고 있었다.

"이야기는 다 들었네. 호그베르크 쪽에는 경비대가 갈 걸세. 시종일을 하던 자들이니까 그냥 잡아오면 되. 하지만 프리베르크 쪽은 경비대로는 좀 부족하지. 한때는 제법 잘 나가던 자들이었으니까. 나와 기사들이 영지군을 이끌고 직접 가는 것으로 했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음? 아니 왜? 백작님과 함께 저녁 식사라도 다시 하지?"

"제가 마스터 요한과 겨루기 전까지는 프리베르크의 클라손이 백작령의 공인된 이인자였다면서요? 저하고 비교해서 누가 더 센지 궁금해져서 말입니다."

"별거 아닌 놈이야. 내 스승님이 이곳에 정착하실 때 박살을 내 놓은 집안이고 나도 밟아 준 적이 있지. 자네라면 문제 없을 걸세."

내게 독약을 보낸 자를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서 처리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내 목을 자르려고 했으면 자기 목도 내놓은 것 아닌가?

기꺼이 잘라 줄 생각이다.

*

프리베르크와 호그베르크는 본래부터 서로 간의 교류가 긴밀한 사이였다.

수 세대 전에 두 집안은 칼마르 인근의 산에서 이웃해 살았다고 한다.

성에 베르크라는 산을 의미하는 단어가 들어간 것이 그 때문이다.

칼마르 시로 이주한 후 한 쪽은 영지군에 투신해서 차근차근 사다리를 올라갔고 다른 한 쪽은 백작가의 시종이나 하급 서기가 되었다.

그 결과 수 세대가 흐른 지금, 프리베르크는 한 때 영지군을 쥐고 흔들었던 유력 가문이 되었고, 호그베르크는 백작가를 떠받치는 자잘한 뿌리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집안의 격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두 집안은 꾸준히 교류를 이어갔다.

그래서 두 집안의 가장이 한 곳에 모여서 밀담을 나누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클라손 경. 왜 목표를 바꾸신 겁니까? 분명히 에릭 칼마르님은 여백작을 목표로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보게. 호그베르크. 내 한 가지 물어보지. 만약 여백작이, 음. 어떻게 된다면 에릭 칼마르에게 기회가 돌아갈까? 그가 칼마르의 백작이 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가장 가까운 혈통을 가지고 계시니까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프리베르크의 클라손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호그베르크의 순진한 예상에 동의하지 않았다.

"만약에 황제께서 계시고, 제국이 평안하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이권도 좀 뜯기고 뇌물도 좀 뿌리고 하면 에릭 칼마르, 그가 될 수도 있을 거야. 어쨌든 그는 칼마르의 남은 자이니까. 하지만 말일세."

"예. 클라손 경."

"황제가 자기 자리에 없어. 그게 문제야. 그래서 지금은 칼이 말을 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네. 혈통? 증조부가 칼마르의 백작이라고 해도 이 곳에 에릭 칼마르의 기반이 있던가? 그 사람, 15년 전에 칼마르를 떠난 사람이야. 이름이야 기억하겠지만 얼굴까지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은가? 글렌 공작을 업지 않았다면 우리도 그 사람 무시했을 걸세."

"그건 그렇지요."

"생각해 보게. 만약 여백작께서 자리를 비우시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칼마르 시가 전쟁터가 될 거라고 생각하네. 막시밀리안 공작과 글렌 공작이 좋다고 달려올 모습이 훤해. 에릭은 글렌 공작이 써먹다 버리겠지. 덩달아 나도 같이 골로 갈 것이고. 명분도 좋지 않은가. 여백작의 복수를 하겠다. 그래서 에릭의 요구를 따르지 않은 거야. 그자는 너무 모험적이야."

사실 클라손은 글렌 공작의 연락을 받았을 때 상당히 망설였다.

칼마르 시의 친 글렌 공작 계열은 모건이 숙청당할 때 함께 쓸려 나갔다. 죽은 사람은 얼마 안 되지만 자숙을 명령받고 집안에 틀어박혀서 눈치만 보고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자들에게 글렌 공작이 뭔가를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뭐든 연락을 취하면, 여백작에 대한 충성을 증명할 절호의 기회라며 쪼르르 달려가서 일러바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스터 요한의 정치적 맞수이기도 한 자신에게 제안이 온 것이라고 이해했다.

글렌 공작의 요구는 그리 무리한 것이 아니었다.

에릭 칼마르를 이용해 리네아 여백작을 적당히 위협하고 흔들 테니까 칼마르 시 내부에서 여론을 형성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정도는 가능한 범주였다.

그런데 에릭 칼마르가 여백작을 독살하자는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해 온 것이다.

클라손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글렌 공작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걸까?

아니면 대놓고 미친 짓을 하겠다는 걸까?

내가 이런 말도 안되는 제안에 응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정말로?

화를 내려던 클라손은 그 때 한가지 가능성에 꽂혀 버렸다.

만약, 여백작이 아니라, 여백작의 약혼자를 독살할 수 있다면?

그는 윌리엄의 등장 자체가 마스터 요한을 주축으로 하는 가신 집단의 작품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아마도 사라 남작 부인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윌리엄을 독살할 수 있다면 그의 부친 때부터 악연으로 이어진 마스터 요한 뿐 아니라 건방진 사라 남작 부인까지 기분 좋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범인 색출도 역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범인을 찾기 위해 식사를 나른 시종, 음식을 만든 요리사, 식재료를 공급한 업자, 그리고 그 주변의 하녀들까지 다 신문하고 고문하겠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얻기는 불가능하리라.

호그베르크 집안의 시종 교육은 만약을 대비한 고문참기까지 포함되어 있으니까.

오히려 고문에 못이긴 사람들이 내뱉는 말에 혼란만 가중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범인으로 따로 지목되고 집중적으로 고문을 당하는 상황만 아니라면 시간은 충분히 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상황이 진정되면 감옥에서 끄집어 내는 것 정도야.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에릭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리네아 여백작의 주변을 위협하고 흔드는 일을 자신이 해 내는 것이다.

글렌 공작은 자신의 이용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지.

그리고 에릭은 칼마르 시의 유력자들에게 도발적인 편지를 보낸 덕분에 혐의를 뒤집어 쓰고 노골적인 제거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면 칼마르의 성을 가진 자가 진짜 하나만 남게 된다.

그 이후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누가 알겠나?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클라손 경. 잠시만. 이상합니다. 밖이 너무 밝습니다."

호그베르크는 열변을 토하던 클라손을 제지하며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의 눈에 프리베르크의 저택을 둘러싼 횃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횃불을 들고 있는 영지군의 모습 역시 볼 수 있었다.

"클라손 경. 영지군입니다. 저택을 포위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둘은 나란히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실패했구나!!

*

프리베르크 집안의 저택은 규모가 상당했다.

데려온 영지병의 수가 백 명인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포위를 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 비싼 땅에서 이렇게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니!

과연 몇 대에 걸쳐 칼마르 시의 권력자로 살아온 집안다웠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쾅쾅!!

저택의 경계에 있는 정문이 도끼질 몇 번에 그대로 넘어갔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는 진작에 도망쳐 버리고 없었다.

영지병이 저택을 포위하고 있는 동안 마스터 요한이 데리고 온 기사들이 저택 경내로 진입했다.

나와 마스터 요한은 그들을 뒤따랐다.

정원을 지나 금방 본관이었다.

본관의 앞에는 프리베르크 집안에서 키우는 사병이 몰려나와 있었다.

20명에 달하는 인원이었다.

일부는 프리베르크의 일가붙이이고 일부는 소작농 중에서 불러 올린 자들이다.

모두 무기를 들고 있지만 겁을 먹은 모습이 역력했다.

중무장한 기사와 횃불을 들고 저택을 둘러싼 영지병의 위세는 숫자도 얼마 안되는 사병이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본관 앞에 도착하자 곧 안에서 2명의 중년인이 걸어 나왔다.

한 명은 평범한 체격의 일반인이지만 다른 하나는 체격 자체가 달랐다.

잘 생긴 고릴라.

딱 그런 느낌이었다.

"클라손 프리베르크. 살인 교사 혐의로 체포한다. 살인 미수범은 이미 체포했고 모든 것을 자백했다. 법정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한다."

선임 기사의 선언에 사병들이 술렁거렸다.

그러나 고릴라는 그런 것은 신경도 쓸 생각도 없다는 듯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어울리지 않게 머리를 쓰다가 제풀에 넘어진 모양이군. 그런 문서 쪼가리는 다 집어 치워라. 나를 때려 눕히면 나를 잡아가는 것이고, 너희를 박살내면 나는 이곳을 떠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기사들을 헤치고 고릴라 앞으로 나섰다.

내 목에 칼을 들이댔던 놈이 도망가려고?

그건 안돼.

나는 내 특제 철봉을 앞으로 내밀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