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여백작의 약혼자는 음모의 대상이 되었다.
귀족의 결혼이라는 것은 일종의 사업이다.
이를테면 사업의 확장이나 유지를 위해 동업자를 구하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보험을 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랑?
있으면 좋다.
그러나 없어도 별 상관은 없다.
중요한 것은 가문을 이어갈 후손을 얻는 것과 가문의 영역을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귀족의 결혼 상대자는 격이 같거나 비슷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가 있는 것이다.
한 쪽의 격이 지나치게 떨어지면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물게,
아주 드물게,
서로 간 지위와 재산의 차이가 매우 커도 서로에게 절실한 부분을 도와줄 수 있다면 구태여 결혼을 반대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여백작의 입장을 이해하는 일부 유력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은 대놓고 찬성을 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격렬하게 반대할 생각도 없었다.
그런 자들은 상단주 가운데서도, 시 외곽의 촌락에서도 드물지 않게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자들도 많았다.
시의회의 여러 회의실 중의 하나에 모여서 의견을 나누는 시의회의 의원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여럿이었다.
"이런 시절에 너무 마음 가는 대로 하시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백작님께 도움이 될 수 있는 세력과 결혼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
"그러려고 했지요. 이미 두 차례나. 약혼자와 잠재적인 동맹 세력을 모두 잃었습니다만."
"그래도 이렇게 혈혈단신인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윌리엄 경이 세운 공적이 많고 유능한 사람이라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실력도 마스터 요한에 버금갈 정도라는 평판, 저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영지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이번 결정은 재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작님의 결혼은 개인의 일이 아닙니다. 영지의 미래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정책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열을 내면서 백작의 약혼에 대해 반대하는 시의회의 의원에게 동료 의원이 제동을 걸었다.
"아직 결혼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
"약혼을 선언하셨으니 곧 약혼은 하시겠지요. 그러나 결혼까지는? 글쎄요. 저는 잘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쇼그렌 경?"
"뭔가 인위적인 느낌이 나서 말입니다. 그리고 백작님의 곁에서 부모처럼 싸고도는 가신들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조용하더군요.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인데 윌리엄 경의 등장도 꽤나 이상했습니다. 뭔가 잘 짜여진 각본을 보는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저는 일단은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쇼그렌의 말에 회의실의 의원들은 각자 생각에 잠겼다.
다들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던 점이기도 해서 판단이 쉽지 않았다.
그 때 회의실의 문이 덜컥 열리며 의원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동료 의원 여러분. 중요한 소식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편지를 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건 무슨 편지요? 비요크 경."
"에릭 칼마르로부터 온 편지입니다. 아마 다른 의원분들께도 같은 내용의 편지가 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에릭 칼마르? 칼마르라고요? 누구요? 그런 사람이 있었나?"
"리네아 백작님과 증조부가 같습니다. 15년 전에 칼마르 시를 떠났지요."
의원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로의 눈에서 같은 대답을 얻었다.
이게 갑자기 약혼 선언이 나온 배경이구나!
"무슨 내용입니까?"
"자신에게도 칼마르의 백작 작위에 대한 계승권이 있음을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리네아 여백작님께서 아직 미혼이니 자격이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역시! 이제 다 이해가 가!"
"그렇군. 백작님께서는 이렇게 상황이 돌아갈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하신 거군. 그런데 에릭의 후원자는 누구랍니까? 혼자서 날뛸 리가 없을 텐데."
"편지에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뉘앙스로 본다면."
"보나마나 글렌 아니면 막시밀리안이겠지. 전부터 칼마르 백작가를 노리고 계속 수작을 부려 왔으니까."
"예. 맞습니다. 편지의 뉘앙스로 본다면 글렌 공작 같습니다."
그 말에 의원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다 함께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백작님. 제법 하시는데!
한참 전에 글렌 공작의 수작을 알아차리고 대응책을 미리 준비하셨다는 것은 글렌 공작의 심복 중의 누군가가 백작님께 포섭되었다는 소리잖아!
난세에 유능한 지도자는 폭풍 속으로 항해하는 배의 유능한 선장과도 같다. 승객들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칼마르의 백작은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자신의 결혼조차 수단으로 쓸 정도로 과감했다.
칼마르 시의 의원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의 일부를 떨쳐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 가지 궁금한 점은 남았다.
과연 윌리엄 경은 다른 약혼자들과 달리 살아남을 수 있을까?
*
글렌 공작은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다시 확인했다.
"내가 뭔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 칼마르의 어린 여백작이 자신이 서임한 기사와 약혼을 한다고?"
"예. 그리고 기사가 아니라 남작입니다. 남작으로 승작한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백작령의 일부를 떼어서 아예 남작령으로 독립시켰다고 합니다."
"여백작이 제정신인가? 아니지. 아냐. 그럴 수도 있겠군. 그래.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냐."
글렌 공작은 리네아 여백작이 어떤 생각으로 약혼을 했는지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두 차례나 약혼이 무산된 것은 리네아 여백작에게 정치적으로 큰 타격이었을 것이다.
백작 부군으로 선택할 정도로 우호적이었던, 그리고 동맹이 될 수 있는 세력을 잃은 것은 실질적인 타격이 되었을 것이고.
암살당한 첫 번째 약혼자의 가문인 플렌스 백작가는 막시밀리안 공작에게 급격하게 기울어 버렸다.
원래 막시밀리안 공작의 파벌이었지만 중립에 가까웠던 이들이기에 그들의 입장 변경은 암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암살미수에 그쳤지만 거의 암살당할 뻔했던 두 번째 약혼자의 가문인 라스머스 백작가는 그 이후로 대외활동을 급격히 줄이며 영지에 틀어박혔다.
만약 세 번째 약혼자를 구했는데 또 그가 습격을 받거나 죽으면 체면은 체면대로 깍이고 동맹세력이 또 하나 이탈하는 것이 된다.
감당하기 힘들었으리라.
게다가 아무리 정통성 있는 유일한 계승자라고 해도, 계승법을 위반하고 있는 것은 부담이 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이 협박의 수단으로 에릭 칼마르를 이용한 것이 아니었나.
정작 에릭 칼마르 본인은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노리겠다면서 열의를 불태우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그렇다면 협박을 좀 더 강화하는 것은 어떨까?
에릭 칼마르에게 좀 더 명분을 쥐어주면 어린 여백작은 자신과 손 잡는 것을 한 번쯤 고려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이 약혼예정자도 첫 번째 약혼자처럼 암살을 한다면?
"그런데 약혼자로 내세운 자가 윌리엄 버로스라고? 이 자 이름이 기억에 있는데? 크리스토퍼를 죽이고 전투 망치를 가져갔다던 그 기사 맞지?"
"예. 공작님의 지시로 신상을 조사한 후 보고드린 적이 있습니다."
"실력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자가 막상 그 배경은 보잘것없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튀어나오는군,"
글렌 공작은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느려지다가 멈췄다.
"이봐. 베르그렌."
"예. 공작님."
"탈린이라고 했던가. 매춘부와 같이 있다가 죽은 여백작의 약혼자?"
"예. 맞습니다. 플렌스 백작가의 3남이었습니다."
"그래. 그때 모양새가 아주 괜찮았어. 약혼자가 매춘부의 배 위에서 죽다니. 모욕감이 장난이 아니었을 거야. 어쩌면 칼마르의 어린 여자애는 이성을 잃고 날뛰었을지도 모르지."
"확실히 아크후가 일을 잘하기는 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똑같이 한 번 더 하면 어떨까?"
글렌 공작의 말에 베르그렌 서기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능할까?
평소의 그라면 당연히 가능하다고 먼저 대답하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윌리엄에 대해 조사한 보고서를 읽으면서 그에 대한 평가를 한참이나 상향해 버린 그로서는 가능하다고 말하기가 힘들었다.
무력은 마스터 요한보다는 조금 떨어지는 정도.
그러나 머리 돌아가는 것이나 사람 다루는 것을 보면 몇십 년은 상단에서 구른 중견 상인이라고 해도 어색함이 없는 자였다.
아무 생각 없이 인생을 즐기며 살아온 귀족가의 3남 따위와는 궤가 다른 사람인 것이다.
이런 자를 매춘부와 엮어서 암살한다고?
아무래도 그림이 안 그려지는데?
"대답이 늦군."
"죄송합니다. 공작님."
"힘든가 보지?"
절대로 힘들다는 말은 해서는 안된다.
글렌 공작으로부터의 신뢰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실적을 보여야 했다.
아크후는 황제조차도 죽일 수 있다고 자신하는 조직이었다.
그래. 아크후를 믿자.
"아닙니다. 공작님. 가능합니다. 다만."
"다만?"
"상대의 무력이 마스터 요한보다 약간 떨어지는 정도인데다가 이제는 백작의 약혼자입니다. 경호가 잔뜩 붙어 있겠지요. 탈린을 처리할 때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그렇겠지."
"아크후에게 줄 의뢰금이 좀 클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양이 조금 안 예쁠 수도 있습니다. 윌리엄과 매춘부, 둘 다 죽여서 한 방에 두는 식으로 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구체적인 계획은 아크후에서 짜겠지만 탈린을 처리할 때처럼 자연스럽게는 안 될 겁니다."
"괜찮아. 자연스럽지 않아도 돼. 이것은 대낮에 길거리에서 칼질을 한바탕 하는 것과 같은 거야. 공포가 목적이지. 자신의 약혼자가 어이없게 죽는다면 자신도 어이없게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기지 않을까? 두려움은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하는 법이지. 그때가 되면 칼마르의 그 여자아이도 대화할 생각이 들 거야."
"의향이 그러시다면 진행하겠습니다."
글렌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운 보고서로 시선을 돌렸다
강력한 선제후인 벵트손이 황제 후보로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손자를 내세웠다는 내용이었다.
손자라고?
그는 신경을 곤두세우며 보고서에 집중했다.
*
칼마르 시와 인근의 유력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리네아 여백작이 나와 곧 약혼할 예정이라고 공표한 것은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충격의 크기 만큼이나 빠르게 사람들의 태도가 변했다.
미래의 백작 부군에게 줄을 대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아부가 쏟아지고, 방문객과 초대장이 밀려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새로운 권력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미니맵을 통해 보는 세상은 또 달랐다.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 미워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터무니없이 늘어난 것이다.
나를 향해 웃음을 짓는 사람들 중에도 빨간 점으로 표시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굴러온 돌이 리네아 여백작을 차지하는 것이 싫다는 것이겠지.
이럴 때면 리네아 여백작의 인기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다.
그러나 이런 식이면 칼마르 백작가를 적대시하는 세력과 나에게 적의를 품은 자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미니맵에 이런 문제점이 생길 줄은 정말 생각 못했다.
그래도 영주성에서 자유스럽게 돌아다닐 수 있는 시종조차 빨간 점으로 표시된다는 것은 문제가 좀 있는데······
게다가 약혼 발표 전에는 분명히 영주성내에는 빨간 점이 없었단 말이다!
그렇다면 이놈은 어딘가에 소속된 놈이 아니라 그냥 질투에 미친 병신인 걸까?
그것도 아니면 원래는 그냥 첩보나 수집하던 놈인데 나를 처리하라는 명령이라도 떨어졌나?
그리고 지금 빨간 점인 이놈이 내게 가져온 식사는 과연 안전한 것일까?
"먹어 봐."
"예?"
"먹어 보라고."
나는 쟁반에 놓인 식사를 시종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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