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계약을 이행할 때.
사람들은 빠르게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공훈을 세우고 돌아온 기사에게 상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을 뭐라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사실상 선전포고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에서 패트슨 남작을 잡아 온 것은 도대체 어떤 상을 줘야 하느냐고 고민할 정도로 큰 공훈이라는 것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남작 작위라니!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남작 지위에 있는 사람부터가 몇 되지도 않는다.
다들 기사 아니면 백작령의 관직이나 명예직을 갖고 있을 뿐이다.
물론 백작령 전체를 통틀어서 살펴보면 남작이 제법 있기는 있다.
몰락해 버려서 남작이라는 이름만 남은 자들이라든가 외부에서 이주해온 귀족 등 출신은 다양하다.
그러나 그들은 칼마르 백작령에 영향을 끼칠 만한 자들은 아니다.
칼마르 백작령의 통치 계급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상단을 배경으로 하는 유력자들,
칼마르 시 주변의 촌락을 배경으로 하는 귀족들,
그리고 백작 개인의 가신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그것이다.
그런데 신참자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아직 어린 여백작의 총애를 바탕으로 승승장구한다?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공적을 세우며 여백작의 충실한 수족 노릇을 한다?
그리고 리네아 여백작은 명분이 생기자마자 그를 대뜸 남작으로 삼아 버렸다.
작위와 실권을 동시에 가진 새로운 유력자의 탄생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상단이나 촌락에 근거를 둔 사람들보다는 백작 개인의 가신 집단에서 반발이 나와야 정상인데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정치력과 눈치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자들이다.
대번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것은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에 리네아 여백작과 그녀의 가신들 사이에서 무엇인가가 합의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윌리엄의 승작에 대해 축하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했다.
솔직히 말해서 윌리엄이 갑자기 남작이 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나?
따로 영지를 내어준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사업권을 빼앗아서 준 것도 아니다.
빠른 출세에 배는 좀 아프지만 내 케이크에 손을 댄 것이 아니니 좋은 얼굴로 축하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이왕 축하하기로 했으면 제대로 축하해야 하지 않을까?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맞부딪칠지도 모르는데?
순식간에 사람들의 계산이 끝났다.
그들은 리네아 여백작의 선언이 떨어지고 잠깐의 머뭇거림이 있은 후 일제히 환호성과 축하의 말을 건네며 윌리엄의 승작을 축하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생각과 머뭇거림이 담겼던 환호성은 금방 진짜 환호성과 기쁨으로 변했다.
저간의 사정이야 어쨌든 전쟁을 피한 것이다.
그것도 대충 얼버무린 것이 아니라 일방적이고 확실한 승리다.
이제 패트슨 남작의 몸값을 협상하고, 백작령이 입은 손해에 대해 보상을 받으면 된다.
특히 그동안 알게 모르게 이런저런 피해를 보고 있던 상단주와 상단의 관련자들은 이제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게 되었다는 점만으로도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법률 고문인 스렌센은 중요한 문제를 한 가지 짚어냈다.
"그런데 백작님. 한 가지 문제는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무엇인가?"
"윌리엄 경은 법적으로 아직 평민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사 서임조차 받지 않은 상태입니다. 백작령의 관직을 내리거나 기사 서임을 해야합니다. 남작 작위를 내리는 것은 그 다음 순서입니다. 감찰관은 임시직이니 해당 사항 아닙니다."
"아! 그런가요. 법률 고문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니 해야지요. 모두 들어라! 지금 당장 윌리엄 경의 기사 서임식을 하겠다. 윌리엄 경은 앞으로 나오라."
다시 한번 환호성이 터졌다.
축제였다.
*
그러나 축제 분위기는 이틀을 가지 못했다.
승리했다고 하지만 모두가 참가했던 전쟁도 아니었고 승리도 사실상 내가 홀로 이끌어 낸 것이나 다름없다.
기사 서임이니 승작이니 하는 보상을 누린 사람도 나 한 명 뿐.
물론 상금을 받은 사람은 좀 있었지만
전쟁을 피했다는 기쁨은 있었지만, 오랫동안 흥청망청할 분위기는 아닌 것이다.
칼마르 시는 금방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나였다.
내 입장에서야 남작이 되는 것은 약속받은 보수의 일부였고, 예상도 한 일이다.
하지만 백작령의 유력자들이 보기에는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권력자가 낙하산으로 떨어진 격이라 나에 대해 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나 역시 신참자로서 이리저리 얼굴을 내밀어야 했다.
이것은 사회생활이었다.
게다가 나는 영업활동도 해야 했다.
마틴이 대신 운영하는 내 상단은 나름 강장제 장사가 잘돼서 이익이 괜찮다는 수준을 넘어섰다.
본격적으로 확장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모든 것이 좋았다.
이 혼란기에 이 정도로 상황이 좋게 돌아가는 사람, 별로 없을 거다.
충분히 자축할만하고 즐길만했다.
그러나 나는 불안했다.
지금의 평온이 그다지 길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지만, 원래라면 강도 기사 카알의 토벌에 실패한 후 우후죽순 늘어나는 수적들로 인해 달라벤 강의 통제권을 잃으면서 물류 유통에 혼란이 닥쳐야 할 시기가 바로 코 앞이다.
그러나 똑같은 미래는 이제 없다.
내가 막았으니까.
그래서 더욱 불안했다.
카알 하나를 제거했다고 해서 진짜 미래가 바뀌었을까?
달라벤 강에 난민들이 몰려들고 너도나도 칼 들고 배를 털어내는 일이
사라진 미래가 되는 것인가?
설마. 그럴 리가.
세상의 큰 흐름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히 바뀔 리가 없다.
달라벤 강을 따라 몰려온 난민들은 의외로 멀지 않은 지역 출신이다.
그들은 올보르그 지역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남작령 3개만 지나면 바로 올보르그 지역이고 달라벤 강을 타고 내려오면 며칠 만에 내려올 수도 있다.
그들은 글렌 공작과 홈베르그 공작을 지지하는 귀족들 간의 영지전이 내전 수준으로 발전하면서 약탈을 견딜 수 없게 되자 달라벤 강을 따라 피난을 왔었다.
그때 피난한 난민 중 일부가 칼마르 백작령 주변까지 밀려들어서 엄청난 혼란을 일으켰다.
달라벤 강의 마비 역시 크게 보면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강을 따라 내려오던 난민들이 수적으로 전업하는 경우가 적잖게 발생했기 때문이다.
내가 회귀해서 영향을 미친 곳은 칼마르 시와 그 인근이다.
그렇다면 더 먼 곳은 어떨까?
과연 내 회귀는 어디까지 영향을 미쳤을까?
올보르그 지역에서 벌어진 영지전에 영향을 미쳤을까?
만약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면 난민이 몰려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것은 미리 검토하고 대처해야 할 문제였다.
나는 마스터 요한의 호출에 따라 그를 만나러 왔다.
"윌리엄 경. 오랜만일세"
"패트슨 남작령까지 가서 협상하시느라고 고생하셨습니다. 마스터 요한."
오랜만에 만난 마스터 요한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별거 아니었네. 쉬운 협상이었어. 패트슨 남작을 우리가 쥐고 있었으니까. 협상이 아니라 영지군을 몰고 가서 통고를 한 셈이지. 이게 다 자네 덕분일세."
"별말씀을. 합의 사항은 결정된 겁니까?"
"그래. 백작님께도 보고드렸으니까 곧 다들 알겠군. 패트슨 남작령의 세수 1년분 절반, 개인 재산도 절반. 남작 개인의 몸값과 이번 전쟁의 보상금으로 그 정도면 괜찮겠지?"
"엄청난 액수겠군요. 그런데 왜 액수를 구체적으로 정하시지 않고 그런 식으로. 아! 명분을 남겨놓으신 거군요."
"그래. 조금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서 불안하더군. 얼마 동안만이라도 패트슨 남작령으로 영지군을 밀어넣을 수 있는 명분을 쥐고 싶었다네."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길래?"
마스터 요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패트슨 남작이 묘한 소리를 하더라고. 이상한 놈들이 영지를 드나들었던 모양인데 우리 쪽 촌락을 공격한 것도 그들이라고 하고 말이지. 이 놈이 가끔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기는 해도 거짓말을 할 놈은 아니거든."
"글쎄요. 제가 본 패트슨 남작은 소문과 달리 용렬한 면이 있었습니다만."
"사실 이번에 오랜만에 봤더니 사람이 변하기는 했더군. 원래 음흉할 정도로 속도 감추고 인내심도 강한 놈이었는데 왜 그렇게 망가졌는지 모르겠어."
"사람이라는 것이 궁지에 몰리면 본성이 나오는 법입니다. 원래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기겠지요."
마스터 요한은 나와 이야기를 하다말고 목걸이 하나를 꺼내서 탁자 위에 놓았다.
내가 말라깽이에게서 챙겼던 목걸이와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이 목걸이는 뭡니까?"
"패트슨 남작이 증거라면서 내놓은 걸세. 본 적이 있나?"
"예. 남작의 성에 침입했을 때 웬 수상한 놈이 있길래 처리하면서 저도 증거삼아 가져왔습니다."
"어디 가서 내보이지 말게. 귀찮아질 수 있으니까."
"아시는 겁니까?"
"그래. 내가 왕년에 대륙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많이 봤지 않은가. 이것도 그 당시에 본 것들 중 하나지. 마사우라고 하던가? 평등과 형제애를 내건 비밀 결사에서 사용하는 표식이야. 이쪽 지역에 있을 리가 없는 놈들인데 갑자기 튀어나와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지. 이런 놈들은 비밀 결사 말고도 밀교, 지하 종교, 이런저런 명목의 공개단체들까지 다양하게 있다네. 겉보기에는 멀쩡해도 미친놈들이 적지 않으니까 자네는 되도록 이런 종류의 인간들과는 상종하지 않는 것이 좋아."
미친놈들과는 상종할 일이 없으면 좋긴 하다.
그러나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
안전운전한다고 해서 무사고 운전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자들,
패트슨 남작의 영지에 들락거리던 놈들.
어쩌면 이자들은 애쉬남작의 암염 광산에도 손을 뻗었는지 모르겠다.
그 말라깽이를 잡았을 때의 느낌이,
내 입안을 검사하고 근육을 만지작 거리던 그 빌어먹을 감촉과 너무 흡사했다.
"그러면 이제 무기 생산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세. 새로 장인들과 계약을 맺었다면서?"
"예. 기본급 이외에도 성과급을 지급하는 것으로 해서 급하게 계약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올보르그 지역에서의 영지전이 심상치가 않아서 서둘렀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영지전이 아니라 거의 내전 수준이라는데, 그러면 난민 문제가 분명히 발생할 겁니다. 대책이 필요합니다."
"음. 대책이라."
그러나 난민에 대한 대책은 논의하기도 전에 끝났다.
백작의 시종이 급하게 우리를 부르는 리네아 여백작의 호출을 알려왔기 때문이었다.
리네아 여백작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가 백작령으로 쳐들어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시녀장 사라 부인 역시 비슷한 표정이었다.
"글렌 공작이 에릭 칼마르를 우리에게 던질 모양입니다."
"음! 그 망나니 녀석 말입니까?"
에릭 칼마르?
누구지?
기억에 없는 자다.
그러나 칼마르라는 성을 보니 대충 어떤 자인지는 알겠다.
아마 리네아 여백작을 제외한다면 가장 가까운 칼마르의 일가붙이일 거다.
"내게 비밀리에 전언을 보낸 사람에 의하면 에릭 칼마르는 내가 미혼이라서 계승자의 자격이 없음을 지적한 후 자신의 정통성이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칼마르 시의 유력자들에게 호소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무슨 헛소리를!"
"이것은 글렌 공작이 우리에게 보내는 협박입니다. 내 권위에 상처를 내고 칼마르 시를 흔들어 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글렌 공작의 손을 들면 에릭 칼마르는 버림 당하겠지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칼마르의 백작은 언제나 중립입니다. 나는 협박에 굴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윌리엄 경. 계약을 이행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목숨을 걸 때가 되었다.
다음날 바로 칼마르의 백작 리네아는 영지의 유력자와 가신을 모두 소집했다.
그리고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선언했다.
"나와 윌리엄 경은 곧 약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폭탄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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