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작전은 성공했다. 그런데.
"저희는 일꾼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면담을 원한다고 해서 무슨 일인가 했는데 일꾼을 구한다고? 그런 것이라면 재정관이나 행정관을 찾아가도록 하라."
처음 보는 상인의 요청에 기분이 상한 패트슨 남작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부친 때부터 오랫동안 영지의 중요한 가신으로 봉사해온 징세관의 연줄로 찾아온 자가 아니었으면 만나 주지도 않았을 사람이다.
그런데 만나서 하는 말이 재정관이 부리는 서기하고나 의논할 수준의 제안이다.
아무래도 징세관에게도 한소리해야 겠다는 생각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상인의 뒤에 서 있던 사람이 들고 있던 작은 상자를 남작의 앞에 내려놓았다.
묵직한 느낌이었다.
작은 상자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들어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풍기는 느낌이 뭔가 평범하지 않았다.
"이건 뭔가?"
"일단 계약금으로 드리는 겁니다."
상인은 상자의 자물쇠를 열고 그 내부를 드러냈다.
황금이었다.
손가락 크기의 황금 막대기가 가지런히 쌓여 있는 모습이 아름답기만 했다.
"남작님께서 황금을 필요로 하실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영지의 가신들이 칼마르 백작가에 보내야 할 배상금에 대해 논의할 때 분명히 남작님의 책임을 언급할 것입니다. 자신들의 잘못은 생각하지도 않은채 말이지요. 남작님의 힘이 약해지면 그만큼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불충한 자들이니까요. 그 때 남작님께서 이 황금을 던져 주면서 배상금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들이나 제대로 일을 하라고 호통을 쳐주신다면 남작님에 대한 충성심이 새삼 솟아나지 않을까요?"
상인은 황금이 담긴 상자를 패트슨 남작 앞으로 살짝 밀었다.
"이것은 단지 계약금일 뿐입니다. 일의 진행에 따라 계약금의 몇 배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사악한 신의 주구가 내미는 유혹이었다.
그 때, 그것을 받지 말았어야 했는데.
패트슨 남작도 알았다.
일꾼을 구한다고 했지만 그게 단순히 고된 일을 시키는 수준의 일꾼이 아니라는 것 쯤은.
뭔가 위험하고 불법적인 일이 영지에서 벌어질 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달라는 요청임을.
그러나 그것이 전쟁까지 의미하는 줄은 정말 몰랐다.
*
패트슨 남작은 자신을 방문한 자에게 격렬히 항의했다.
"영지민들이 자꾸 행방불명된다는 보고가 들어왔을 때 내가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저희들도 조심했습니다.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 여러 명이 아니라 한 두 명씩. 그렇게 의심을 피했지요. 저희도 일꾼을 꾸준히 공급 받고 싶었습니다."
"그럼 왜 칼마르 백작의 영지까지 가서 그 난리를 피운건가? 다들 영지군이 가서 공격한 것으로 알고 있잖은가?"
패트슨 남작은 진심으로 눈 앞의 거짓말쟁이를 때려 죽이고 싶었다.
처음에는 멀쩡하게 평범한 상인처럼 차리고 나타나더니 다음부터는 대놓고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옷차림으로 드나든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밤에 만나고는 있지만, 만날 때마다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황금이 아니라면 만나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옷차림.
대놓고 나는 비밀 결사 소속이고 반쯤 미친 놈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도대체 이 놈은 어떤 식으로 미친 놈일까?
종교? 신념? 아니면 권력?
"유감스러운 사고가 있었습니다. 저희 형제들이 남작령과 백작령 사이의 경계를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약간의 충돌이 있었는데 그게 좀 크게 번진 것 뿐입니다. 저항이 너무 심했으니까요. 앞으로 그런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앞으로!? 칼마르 백작령에서는 이미 용병대장들이 모병 활동을 시작했단 말이다. 봉사 기간이 남은 영지군에게도 소집령이 내렸다고 한다. 배상금은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아니야. 진짜 전쟁을 해야 할 판이라고!"
"배상금이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아닌 것은 배상금이 너무 적기 때문이 아닐까요?"
패트슨 남작은 말문이 막혔다.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더 많은 황금.
더 많은 영지민.
고개를 끄덕이면 황금이 더 많이 들어온다.
고개만 끄덕이면.
그 황금을 이용하면 칼마르 백작과의 전쟁을 피할 수도 있지 않을까?
혹시 막시밀리안 공작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면 배상금의 액수가 줄어들지 않을까?
그러나 패트슨 남작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침실 밖에서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침실문이 열린 것이다.
온통 검은 색으로 된 옷을 입은 자였다.
그의 뒤에는 남작을 지켜야할 기사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두건 사이의 눈빛이 위험하게 보인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양 손에서 무엇인가가 벼락처럼 튀어나왔다.
빛나는 무언가가 일직선으로 쭉 뻗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선이 로브를 입은 남자에 닿는 순간 로브가 확 펼쳐지며 오른편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깡마르고 딱딱한 남자가 서 있었다.
마치 삐쩍 마른 나무가 비비꼬여서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
내가 던진 두 개의 비도는 로브에 휩싸여 옆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비도가 가서 박혀야 할 자리에는 웬 말라깽이 키다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와 좀 떨어져 있던 패트슨 남작은 겁이라도 먹었는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직 큰 소리는 안 냈지만 남작이 고함이라도 지르기 시작하면 일이 골치가 아파질 것은 뻔했다.
빠르게 이 말라깽이 키다리를 처리하고 남작을 인질로 삼아 탈출해야 했다.
생각보다 행동이 더 빨랐다.
두 걸음 만에 말라깽이를 손으로 잡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서며 오른쪽 손의 단검으로 말라깽이의 가슴을 찔러갔다.
말라깽이의 반응은 딱 잘 훈련받은 병사, 그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는 빈 손으로나마 아슬아슬하게 단검을 밖으로 쳐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페이크.
진짜는 왼손의 단검이다.
단검으로 무릎을 찌르고
연달아 베었다.
말라깽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다시 양쪽 허벅지를 긋고
오금을 자른 후
무릎을 끌어안고 당겼다.
말라깽이가 뒤로 넘어가려는 순간
그대로 붙어서
목 옆의 경동맥 어림을 오른손의 단검으로 연달아 쑤셨다.
구멍마다 피가 뿜어졌다.
앗!
하는 사이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수상한 말라깽이는 검붉은 피를 뿜어내며 바닥에 누웠다.
아직 생명이 꺼지지 않았지만
목과 허벅지의 동맥을 끊어 놓았으니 살아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기분나쁜 느낌은 뭐지?
말라깽이를 만졌을 때 느꼈던 딱딱함.
마치 마르고 두꺼운 육포를 만지는 것 같은 느낌.
낯설지 않았다.
가축을 품평하듯 입안을 까 뒤집고, 근육을 눌러보던 그 딱딱한 손가락.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사람은 더 이상 소금광산에서 볼 수 없었다.
PTSD가 오는 것 같았다.
다 잊은 줄 알았던 그 때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얼굴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침입자다! 침입자다!"
패트슨 남작이 작은 상자를 들어서 유리창으로 던졌다.
와장창!
조용한 밤중이라 패트슨 남작의 고함소리와 유리창 깨지는 소리는 상당히 멀리 퍼졌다.
그제서야 근처에 패트슨 남작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했다..
나는 패트슨 남작을 납치하러 왔었지.
"귀찮게!"
짜증스럽게 내뱉으며 패트슨 남작의 턱을 가볍게 올려쳤다.
패트슨 남작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이제 패트슨 남작을 들고 뛰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나는 패트슨 남작 대신 죽어가는 말라깽이에게 다가갔다.
빠르게 그의 로브와 소지품을 뒤졌다.
특별히 주목할만한 것이 나오지는 않았다.
목에 걸린 목걸이를 제외한다면.
그의 목걸이를 챙긴 후에야 패트슨 남작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약간 늦었을까?
더 늦으면 곤란했다.
나는 침실의 커튼에 불을 놓은 후 패트슨 남작을 들쳐 멨다.
약간 비만이라서 그런지 묵직했지만 움직이기에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곧장 복도로 나와서 달렸다.
방금 들어온 곳,
밧줄로 탈출로를 미리 만들어 놓은 곳을 향해 달렸다.
"저기 있다!"
"남작님!"
"막아!"
그러나 길이 막혀 버렸다.
2층에서 계단을 막 올라온 기사와 병사들이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야 했다.
달리는 속도는 늦추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향해 달리면서 연달아 비도를 던졌다.
비도를 던질 때마다 병사들이 무너졌다.
등불이 복도를 밝히고 있다지만 지금은 밤이다.
간신히 어둠을 몰아낼 정도의 밝기로는 비도처럼 빠르게 날아가는 것을 보고 막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병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을 인솔한 기사 하나가 앞에 나섰지만 그 역시 갑옷 덕분에 자신도 모르게 2개를 튕겨낸 것이 다였다.
그는 목에 비도를 꽂고 쓰러졌다.
그의 뒤에서 단창을 들고 있던 병사 2명은 상관과 동료들이 순식간에 쓰러져버리자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나 등을 돌리는 순간 그들의 뒤통수에 비도가 박혔다.
순식간에 한 세트의 비도를 다 사용했다.
앞에는 더 이상 서 있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계속 달렸다.
처음 들어왔던 방은 내가 해 놓은 그대로였다.
곧장 덧창을 열고 밧줄을 잡고 내려갔다.
두 번 밧줄을 놓았다 잡으면서 내려오니, 그냥 뛰어내리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내려올 수 있었다.
아직 외부는 괜찮았다.
잠깐 정신을 놨던 것을 생각하면 원래 계획과 그다지 어긋나지 않았다.
오히려 외부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들조차 영주성 내부로 뛰어들어가는 통에 곳곳에 빈틈이 생긴 것이 뻔히 보였다.
내가 남작의 침실에서 건물 밖까지 나오기까지 정말 짧은 시간이었는데 벌써 남작의 침실에서 불길과 연기가 솟기 시작했다.
방에 화재가 나면 커튼을 타고 순식간에 번져서 탈출조차 어렵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대로였다.
신호는 제대로 보낸 셈이었다.
나는 불타기 시작하는 건물을 뒤로 하고 뛰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탈출의 시간이었다.
같이 온 기사들은 자기 몫의 일을 확실히 해주었다.
건물에 불이 나고 경비병들이 안으로 몰려가며 경계를 서던 자들이 혼란에 빠지자 남아 있던 자들을 조용하게 처리한 것이다.
그들은 내가 영주성의 외곽에 도착했을 때 이미 성벽의 한귀퉁이를 장악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들은 내가 들쳐 멘 남자를 보자마자 급하게 나부터 내려보내려고 했다.
추격은 아직 없었다.
그러나 멀리 나팔 소리가 급박하게 울리고 영주성내에서 병사들이 다시 우르르 몰려나오는 꼴을 보니 남작이 잡혀간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서둘러야 했다.
"이쪽입니다."
대기하고 있던 방물장수 길잡이가 다시 우리를 안내해서 산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꽁꽁 묶은 패트슨 남작을 지게에 잘 올려서 한 번 더 묶었다.
그리고 나는 지게를 지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만약 추격이 있었다면 기사들이 남아서 발목잡기를 했어야 했지만 다행이 추격이 없었기에 우리 모두는 사냥꾼 길잡이를 따라 열심히 뛰기만 했다.
돌아가는 길은 올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지게가 내 생각보다 훨씬 편해서 짐을 진 것 같지도 않았다.
꽁꽁 묶인 채 덜컹거리는 지게 가지에 얹혀 온 사람은 생각이 좀 다르겠지만 말이다.
남작령과 백작령의 경계에 도착했을 떄 영지군의 일부와 용병대 하나가 출동해서 진지를 만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뒤를 맡기고 마차에 올라 곧장 칼마르 백작에게 향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
"윌리엄 경은 홀로 패트슨 남작령의 군세와 맞서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칼마르의 백작으로서 윌리엄 경의 공훈을 상찬하지 않을 수 없다. 공을 세운 자에게 어울리는 상을 주고 죄를 지은 자에게 걸맞는 벌을 주어야 세상의 이치가 제대로 돌아가는 법이다. 고로, 나 칼마르의 백작 리네아는 윌리엄 경에게 남작위를 수여하고자 한다."
작전의 성공을 축하하고 구체적인 설명을 듣기 위해 모였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발표였다.
그들에게 장황한 미사여구는 기억에 남지도 않았다.
그들의 머리에 와서 콱 박힌 것은 마지막 한 문장 뿐이었다.
윌리엄 경에게 남작위를 수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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