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누가 당신의 계획을 방해했을까?
패트슨 남작령은 칼마르 백작령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3개의 남작령 중 하나다.
신성 마르스홀롬 제국의 1/3을 가로지른 후 칼마르 백작령을 종착지로 삼는 달라벤 강은 아주 짧은 구간만 패트슨 남작령을 살짝 걸치고 지나가기 때문에 패트슨 남작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러나 룬드 산맥 초입에서 끝나는 소금길의 상당 부분은 패트슨 남작령을 거쳐간다.
막대한 현금과 상품이 패트슨 남작령을 지나가는 것이다.
돈이 흐르면 사람도 흐르는 법.
칼마르 백작령과 패트슨 남작령은 당연하다는듯이 오래 전부터 깊은 관계를 나누어 왔다. 양 영지의 유력자들 뿐 아니라 평민 사이에서도 혼인과 금전 거래는 마치 한 영지에 속한 사람들처럼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패트슨 남작이 저지른 약탈과 파괴는 칼마르 백작령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약탈당한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이웃마을이니까 서로 간에 친척이 많은 편이지요. 이번에 죽은 자경대원들 중에는 내 사촌도 있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길잡이 중 하나는 혀를 끌끌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였다.
"그리고 친척들 말을 들어보니 없어진 사람도 몇 있다는데 끌고 간 것인지 아니면 어디 으슥한 곳에서 죽여서 못 찾는 건지 모를 일이지요. 이게 사람을 희망고문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나섰다는 말이었다. 혹시 없어진 사람들의 흔적이라도 찾을까 해서 말이다.
그는 정기적으로 칼마르 시에서 패트슨 남작령의 성하마을까지 왕복하며 각종 방물을 파는 행상이었다.
주로 칼마르 시의 공방에서 빗과 거울, 화장품 등의 물건을 받아다가 영주성 아래에 위치한 성하마을까지 가서 정기장에 내다 팔고 남는 것은 근처 마을을 돌며 행상까지 하는 자였다.
그와 함께 대기하는 자는 허가받은 사냥꾼으로 종종 패트슨 남작령도 월경한다고 했다. 물론 불법이지만 양 영지의 경계선 근처에 사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적당히 눈을 감고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모두 패트슨 남작령의 지리에 밝고 체력도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럼 충성심은?
글쎄, 사람 마음 속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믿을 수 있겠냐만은, 그 대신 두둑하게 챙겨준 착수금과 약속한 성공보수금은 믿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패트슨 남작을 실어나를 준비를 마친 후, 길잡이를 앞세우고 같이 온 기사 3명과 함께 곧장 패트슨 남작령의 경계를 넘었다.
처음에는 사냥꾼이 길안내를 했다.
사냥꾼만이 아는 산길을 타고 빠르게 이동한지 3일 만에 멀리 영주성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그 다음은 방물장수가 이어받았다.
그의 안내로 영주성 근처까지 별 문제없이 접근할 수 있었다.
남작령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규모가 큰 영주성이었다.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길을 잃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 정도라면 일반적인 남작의 수입으로는 절대로 건설 할 수 없고 유지도 어렵다.
몇 대에 걸쳐서 소금길에서 떨어지는 이익이 엄청났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간덩이가 부을 수도 있겠다.
나는 마스터 요한이 넘겨준 지도와 문서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것은 패트슨 남작의 영주성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잘 정리된 여러 장의 평면도였다.
그리고 패트슨 남작이 주로 이용하는 거처와 집무실, 취미 공간 등에 대해 정리된 문서도 첨부되어 있었다.
이런 것을 보면 칼마르 백작가가 역사와 저력이 있는 가문이라는 것이 한 눈에 드러난다. 이거 한두해 투자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
분명히 남작가의 사용인들 중 칼마르 백작가의 손이 닿은 자가 있다.
길잡이들이 탈출할 때 쓸 도구를 조립하는 동안 기사들에게 우리가 할 일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계획한 대로 내가 단독으로 영주성 내부에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나올 때 불을 지르고 나올테니까 그에 맞추어 미리 준비한 대로 하시면 됩니다. 만약, 화재가 안 났는데도 시끄러워지면 내가 실패했다고 간주하고 약속된 장소로 퇴각한 후 내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십시오. 하루가 지나도 오지 않으면 귀환도 실패한 것이니까 미련 갖지 마시고 백작령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기사들은 모두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냈다.
처음에는 내가 단독으로 영주성 내부로 들어간다는 것에 대해 기사들이 극렬하게 반대했지만 일단 실력으로 한 번 눌러주고, 다음에는 몰래 돌아다니기에는 차라리 한 명이 낫다는 설득에 다들 불만을 가지면서도 동의해 주었다.
내가 성공한다면 이들은 남아 있는 경계병들을 정리하고 탈출로를 확보해 줄 것이다.
소음을 막기 위해 사슴가죽으로 밑창을 댄 신을 신고, 몸에 딱 맞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던지는 단검인 비도 12개 한 묶음을 두 개의 전용가죽칼꽂이에 정돈한 후 하나는 허벅지에, 하나는 팔에 감았다.
그리고 근접전용 단검 5개를 몸에 곳곳에 고정했다.
이것으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출발이다.
전쟁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병사들의 경계는 생각보다 성실한 편이었다. 술 먹고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자는 추태는 부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단지 그 뿐이었다.
후방 특유의 느슨하고 늘어진 분위는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아직 전쟁이 시작된 것도 아니니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병사들을 닥달해서 이 정도로나마 기강을 잡아놓은 것이 오히려 놀라운 것이겠지.
나는 건물과 벽에 있는 어둠을 따라 이동했다.
달빛 아래 사이사이 불타오르는 화톳불과 일렁거리는 그림자는 어둠 속에 있는 나와는 다른 세상에 있는 듯 했다.
벽을 딛고 오를 때의 나지막한 소음만이 두 세상의 격리를 간헐적으로 이어줄 뿐이다.
3층의 창가에 매달려 나무로 만든 덧창을 슬쩍 당기고 단검을 넣어 시건장치를 재껴버렸다.
그리고 창틀을 타고 뱀처럼 슬쩍 기어들어갔다.
확실히 밤눈이 좋아졌다.
반달이 있는 밤이라서 보통 사람이라도 밖은 그럭저럭 다닐만 하지만 실내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별 불편을 못 느꼈다. 야시경과는 비교할 수없는 수준이지만 이 정도라면 움직이고 싸우는데 별 불편을 느끼지 못할 정도다.
육체의 능력을 최대한 사용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한 가지 또 배운 것이다.
내가 들어간 실내는 빈 방이었다.
가구 몇 개가 예쁘게 놓여 있고 깔끔하게 관리는 되어 있지만 사람은 없었다.
미니맵 상에도 사람이 없는 것으로 나오지만, 혹시 모르기에 언제나 조심하고 만약을 대비하고 있다.
창문에 탈출용 로프를 묶어서 내릴 준비를 했다.
혼자라면 이 정도 높이에서 뛰는 것이 무리가 아니지만 사람 하나를 더 들고 뛰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제대로 탈출로를 확보해야 한다.
혹시나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나가야 한다면 무게를 대충 가늠해보고 패트슨 남작을 집어 던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전적으로 패트슨 남작의 몸무게에 달린 문제다.
경비를 서는 자들은 저택 입구와 계단 입구에 몰려 있었다.
2층과 1층에는 복도에도 지키는 자가 있지만, 3층에는 침실의 입구에만 2명의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다행이다.
혹시 침실에 사람이 없으면 남작을 찾기 위해 저택 전체를 뒤져봐야 했는데 수고를 덜었다.
그런데 침실에 한 명 더 있네?
패트슨 남작이 상처를 한 후 아직 정식으로 재혼을 안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애인이라도 함께 있는 건가?
나는 미니맵을 끄고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첫 번째 목표까지 30미터를 천천히 걸어갔다.
사슴가죽올 밑창을 댄 신발은 아무런 소음을 내지 않았다.
침실 입구에서 패트슨 남작을 지키는 자들은 2명의 기사였다.
중무장까지는 아니지만 투구를 포함해서 갑옷을 제대로 갖추어 입고 무기도 모두 패용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복도의 한 편에서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 지며 무기를 잡아가는 기사들을 향해 비도를 연달아 던졌다.
던질 줄 아는 자가 제대로 던지면 200미터도 날아가는 것이 비도다.
그 충격량이 얼굴에 가서 부딪쳤으니 결과는 뻔했다.
얼굴 한 복판에 비도를 맞은 기사 2명은 거의 동시에 무너졌다.
즉사였다.
금속으로 된 갑옷이 나무바닥에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와 함께 문을 부수며 침실 안으로 진입했다.
안에는 2명의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넙데데하고 둥근 얼굴을 한 살짝 비만기가 보이는 남자,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검은 로브에 두건까지 쓰고 있는 자였다.
저 넓적한 얼굴을 한 녀석이 패트슨 남작일 거고,
그럼 이 놈은 뭐지?
애인이 아니라 웬 수상한 놈과 함께 있네?
*
패트슨 남작은 머리가 아파왔다.
처음 계획은 분명히 이게 아니었는데!
패트슨 남작가는 대대로 막시밀리안 공작가의 파벌에 속해 왔다.
물론 바로 옆에 칼마르 백작가가 있지만 그곳은 언제나 어떤 파벌에도 들지 않겠다고 공언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가까이 하기에는 위험한 곳이었다.
패트슨 남작령이 칼마르 백작령에 의지하는 바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곳은 현금과 소금과 상품이 1년 내내 흐르는 곳이다.
한 해 농사 지어서 가을에 잠깐 풍요를 느끼는 패트슨 남작령과는 다른 종류의 땅인 것이다.
패트슨 남작령의 사람들은 현금이 필요하면 칼마르 시로 날품팔이를 떠나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었다.
그래서 역대 패트슨 남작가의 가주들은 일부러 칼마르 백작가와 적당히 거리를 유지했다. 자칫 독립성을 잃고 잡아먹힐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궐위한지 10년,
상식은 더 이상 상식이 아니었다.
막시밀리안 공작은 칼마르 백작을 자신의 파벌에 넣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의도가 먹혀들지 않자 압박으로 노선을 틀었고 패트슨 남작가는 행동대장 노릇을 했다.
물론 패트슨 남작가도 나름대로의 속내가 있었다.
막시밀리안 공작을 등에 업고 칼마르 백작가를 압박하여 결혼 동맹을 이끌어낸다는 계획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처음에 세운 이 계획은 이미 틀어질대로 틀어져서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부인을 잃고 홀아비가 된 김에 혼인 동맹이 어떠냐고 슬쩍 속내를 드러냈다가, 마스터 요한이 때려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바람에 체면만 상했다.
시기가 안 좋았나?
카알을 시켜서 달라벤 강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계획 역시 무산되었다.
일단 카알이 자리만 잡으면, 그 다음은 따로 손을 쓸 것도 없이 저절로 모든 일이 굴러가리라고 확신했건만, 눈덩이가 구르기도 전에 토벌당한 것이다.
심지어 뒤에서 손을 썼는데도!
소금길에서 벗어난 상단을 털던 산적들은 또 어떻고.
왜 자기 앞마당을 떠나서 소금길로 뛰어드는 미친 짓을 하나?
누가 시키기라도 했나?
거기에 영지의 기사와 병사까지 말려들어가서 누가 어떤 짓을 하는지 세상이 다 알게 되었다.
이제 소금길에서 상단을 털어먹는 짓은 끝장이 났다.
동시에 칼마르 백작과의 관계도 끝장이 났고.
칼마르 백작가에서 조만간 처들어오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이길 도리가 없으니 막대한 배상금을 무는 것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게다가 막시밀리안 공작은 중재를 요청한 자신보다는 칼마르 백작의 환심을 더 사고 싶어했다.
하필 시기도 묘하게 글렌 공작 계열과 친한 칼마르의 유력자들이 여럿 실각을 해서 막시밀리안 공작은 상당한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막시밀리안 공작이 중재를 한다고 해도 영지전에서 져서 막대한 배상금을 무는 것 못지 않게 한쪽으로 기울어진 중재안이 나올 것이 불보듯 뻔했다.
언제나 은인자중하며,
음흉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몸을 사리고,
눈 앞의 이익보다는 장기적인 이익을 생각하며 계획을 세우고 영지를 운영해 왔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계획을 따라다니면서 방해라도 한 것일까?
꼭 뭔가에 씐 것만 같았다.
그 때 그들이 접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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