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36화 (36/248)

36. 말로 때리고 서류로도 때린다.

칼마르 시는 상업 도시로 분류된다.

농업이나 공방도 번성하고 있지만 그래도 기본이 물류 유통이 중심인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칼마르의 유력자에는 상인이 많다.

당장 칼마르의 백작조차도 그 근원을 따라 올라가보면 배로 암염을 나르면서 가세를 키워온 기사 가문에 근거를 둔다고 한다.

약간 과장해서 말한다면,

상인 자체가 칼마르의 귀족이고 유력자인 것이다.

그게 칼마르의 정체성이다.

그런데 바로 그 정체성 때문에 칼마르의 백작에게는 곤란한 문제가 생긴다.

상인들은 기사나 농민, 공인과 달리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상인은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래 상대는 외부에 있고.

아무리 근거지가 칼마르라고 해도 유통을 해서 이익을 남기려면 영지 외부의 어딘가에서 내 물건을 사주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말이다.

자급자족이 중심이 되는 중세 경제 시스템에서 물건을 사줄 만한 상대는 귀족일 수 밖에 없다.

아니면 귀족의 하청을 맡고 있는 상인이거나.

외부의 귀족과 이익을 함께 하는 부하를 신뢰할 수 있을까?

상인들을 외부의 귀족과 결탁한 잠재적인 배반자로 간주하고 감시해도 그럴만하다는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를 대하는 반응이 이렇게 격렬한가 보다.

"윌리엄 경. 대단하시군요. 마스터 요한과 대등하게 겨루는 분은 처음 입니다."

"기사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더군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합디다."

"이렇게 젊으신 분이 그렇게 높은 실력이라니! 앞으로가 더욱 기대됩니다."

"칼마르가 정말 좋은 곳입니다. 이곳에서 일가를 이루십시오!"

칼마르 시의 시청으로 감찰을 위해 갔더니 시의회의 의원들이 모여들어서 한마디라도 나와 나누어 보려고 난리였다.

이 사람들은 경비대 뿐 아니라 영지군과도 별로 좋은 사이가 아닌 모양이다.

어쩌면 경비대와 영지군이 지탱하는 백작이 두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주변의 농촌이나 산촌을 대표하는 의원들도 호기심이 어린 표정이기는 했지만 상단에 속한 의원들처럼 극성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감찰을 나온 백작의 수족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조심스러운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터 요한과 대등하게 싸웠다는 것은 이곳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상을 준 것 같았다.

전에는 단순히 외지에서 온 실력 좋은 용병 기사였다면 지금은 영지의 최고수와 맞먹는 실력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가 몇 단계는 뛴 것이다.

거기다 리네아 여백작과 관련된 소문이 도는 통에 권력의 실세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반면에 나를 어떡하면 잘 이용해 먹을 수 있을까하고 살피는 자들도 있었다.

상당히 노골적인 시선이었지만 그들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아무래도 시골에서 갓 올라온 젊은 기사지망생이라는 이미지가 아직은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자들 중 2명이 붉은 점으로 반짝이는 자들이었다.

노드스톰.

이자는 포목을 주로 다루는 중형 상단의 주인이고,

맷슨.

이 사람은 달라벤 강의 수운으로 각종 상품을 나르는 화물선의 선주였다. 배가 4척이 있는 제법 규모가 있는 상인이다.

개인적으로 알아보니 둘 다 주요 거래처가 글렌 공작과 관계가 있는 상단이라고 했다.

어떤 식으로 글렌 공작에게 멱살을 잡혔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리네아 여백작보다는 글렌 공작에게 충성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증거를 찾기는 힘들 것이 뻔했다.

약삭빠른 상인들이 반역의 증거를 어설프게 남겨 놓았을 리가 없다.

그리고 우리, 나와 여백작은 명백한 증거가 없는 이상 외부의 상단과 연결되었다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이자들을 함부로 때려잡았다가는 칼마르의 상인들 대부분이 복지부동을 하며 리네아 여백작과 거리를 둘 것이기 때문이다.

상인들이 보기에 외부의 상단과 연계해 있는 것은 그 둘만 아니라 자신들도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이 자들은 내가 얼러야 했다.

백작이 발탁하고 신뢰하는 신출내기 측근이 뭔가에 찍혀서 오버하는 거다.

압박하고 암시하면서 불안에 떨게 하다보면 실수가 나온다.

그걸 잘 잡아 채면 뭔가 수가 나올 거다.

물론 평화시라면 통하지 않을 수단이다.

그냥 무시하고 장사하면 그만이거든.

지나치다 싶으면 백작 주변에 호소하고.

그러나 지금은 제국 곳곳에서 혼란이 벌어지고 있고 누구도 그 혼란을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예민한 자들은 난세의 피냄새를 맡고 벌써부터 준비하고 있다.

이럴 때, 의심받는다?

과연 주변에 사람이 남아날까?

상단에 속한 사람 중 누군가가 변심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단언할 수 있다.

어쨌든 그들이 살아가야 할 곳은 칼마르니까.

나는 복잡한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시의회의 의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의원들은 악수를 하고 이름을 알려주면서 자신이 어디를 대표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시시콜콜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맷슨이 내게 접근했다.

그는 정말 놀랍다는 표정을 하며 나를 띄워주려고 노력했다.

지나친 행동이었다.

목적이 있다는 의미겠지.

"그 대단한 마스터 요한을 찍어 누르다니! 새로운 영웅이 칼마르에서 탄생한 것 같습니다."

"별 말씀을. 한참을 두드려 맞다가 간신히 비겼을 뿐인데요. 엄밀히 말하면 제가 진 겁니다."

"아니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마스터 요한은 이제 50살이 넘었습니다. 곧 육체가 시들게 될 겁니다. 반면에 윌리엄 경은 이제 20초반이 아닙니까? 칼마르를 지키는 자들의 차세대 지도자는 윌리엄 경이 될 겁니다."

"저런! 듣는 귀가 많습니다. 저는 백작님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과한 평가는 오히려 제게 독입니다."

"정말 겸손하시군요. 저 뿐 아닙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습니까? 글렌 공작께서도 같은 생각을 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순간, 맷슨이 얼어 붙었다.

그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예? 무, 무슨 말씀이니신지."

훅 하고 들어간 내 공격이 너무 잘 맞았나 보다.

명색이 상인이고 선주라는 사람이 아무리 당황해도 그렇지 말을 하다가 혀를 씹다니.

"별 것 아닙니다. 글렌 공작과는 친분이 여전하신가 싶어서 말입니다."

"예? 글렌 공작님께는 매년 생신때 선물을 드리는 정도일 뿐 특별한 관계는 없습니다. 저 같은 상인과 교분을 나누기에는 그 분은 너무 높으신 분이라서. 아마, 아마, 윌리엄 경이 시골에서 올라와서 귀족간의 사귐에 대해 어두운 것 같군요."

맷슨은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그리고 그 변명을, 그 이전에 훅하고 들어간 내 공격을, 가까이 있는 의원들이 모두 보고 들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맷슨 선주께서 다시 저를 만날 때, 그 이야기를 좀 더 나눴으면 합니다. 저는 시청에서 관리하는 창고를 점검해야 해서. 이만."

맷슨을 내버려두고 시청 관리들의 안내를 받아 떠나는 내 뒤로 시의원들의 시선이 정신없이 오고 갔다.

입으로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눈과 얼굴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에 못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의원이 아닌 선주로 호칭된 맷슨은 죽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칼마르 시의 시청은 시의회 건물과 나란히 있다.

그래서 시의회의 의원들에게 인사를 빙자한 폭탄을 투척하고 곧장 시청의 업무를 감찰하러 넘어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시의회는 물론이고 시청까지 백작이 직접 관여하는 감찰이라는 것을 받아 본적이 없어서 약간의 혼란이 있었다.

시의 행정이라는 것이 백작의 관여가 거의 없이 알아서 돌아가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시의회는 칼마르 시와 그 주변의 이익집단들을 관리하기 위해 대표를 파견받아서 모아 놓은 것이고, 시청은 그런 이익집단에서 파견된 실무자들이 모여서 실무를 보는 곳이었다.

무슨 입법권이니 행정권이니 하며 따질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런 시대도 아니고.

백작이 말하면 그것이 곧 법이다.

물론 관습법이 있어서 기준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관습법이라는 것이 대개 그렇듯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힘센 사람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는 것이라서 시 행정의 대부분은 이익 집단 간의 타협과 조절이 중심이었다.

물론 그런 것 말고 현대인이 흔히 생각하는 행정,

그러니까 도시관리를 하고 치안을 관리하고 시민의 주거와 복지를 챙기고 세금을 거두고 집행하는 부서도 있기는 있다.

이들은 백작 직속이다.

치안은 경비대가 하고, 세금은 징세관인 린드스톰이 맡는다.

나머지 일은 모두 칼마르 시의 시장인 멜러가 세습직인 일단의 서기들을 데리고 운영해 나간다.

치안과 세금은 백작이 꽉 쥐고 있는 모양이지만 나머지는 멜러와 서기들이 알아서 해 왔다고 한다.

그러니 내가 백작의 감찰관이라는 명목으로 왔을 때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면이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단 한가지만 요구했다.

창고 현황.

칼마르 시에서 관리하는 창고들의 내역을 담은 문서 말이다.

나는 그 문서를 들고 12개의 대형 창고와 25개의 잡다한 창고를 랜덤으로 뒤졌다.

대부분이 곡물 창고이고 일부는 건축 자재와 각종 주괴를 보관한 곳이다.

과연 창고 현황에 기록된 대로 창고의 내용물이 그대로 있는지 비교해 나갔다.

창고입출고 기록장이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은 곳.

창고 현황과 실제 내역이 맞지 않는 곳.

창고 건물 자체의 관리가 부실한 곳.

랜덤으로 뒤졌음에도 지적이 안 나온 창고가 없었다.

즉, 시에서 관리하는 모든 창고가 어떤 문제가 되었던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나는 시장인 멜러에게 지적사항을 명시하고 시정을 요구했다.

특히, 횡령의 의혹이 있는 창고는 반드시 원상복구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이와 관련된 보고서를 백작에게 직접 제출할 것을 요청했다.

이것은 멜러에게 만회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멜러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반드시 모든 창고가 완벽하게 정비되어 있을 것이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장담했다.

그의 장담에 서기들 중 일부는 창백한 안색에서 더욱 핏기가 빠지기도 했다.

나는 영지군에 이어 여기서도 내 존재감을 드러냈다.

영지의 오래 묵은 권력자들이 내 말에 땀을 흘리고 고개를 수그리게 만들었다.

리네아 여백작이 내가 이렇게까지 의뢰를 잘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줘야 할텐데.

사실 리네아 여백작이 내게 원한 것은 간단하다.

살아 남는 것.

가짜 약혼자 역할을 하면서 5년간 죽지 않고 살아남으면 OK라는 것이 리네아 여백작의 조건이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이렇게 주변을 들쑤시면서 돌아다니는 이유도 간단하다.

가짜 약혼자가 되기 위한 서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저 녀석, 백작님 주변에서 튀려고 그렇게 용을 쓰더니 어떻게 로또가 맞아 버렸구나

라는 백그라운드 말이다.

생각해 보라.

갑자기 어디서 흘러들어온지도 모를, 별로 잘생기지도 않은 놈을 갑자기 약혼자로 삼고, 작위와 영지까지 주는 것은 대놓고 이것은 짜고치는 연극이라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 없지 않을까?

그게 아니면 백작이 사랑으로 정신이 나갔다고 고백하는 셈이고.

둘 다 백작의 목표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상황이다.

그래서 칼마르 시를 순회하면서 나름 용을 써서 어그로를 끌어야 하는 것이 내 입장이었다.

기사들을 일격에 날려버리고, 마스터 요한과 치고 받은 것이 그래서였다.

그런 것 치고는 마스터 요한이나 나나 제 정신을 잃고 날뛰었으니. 그것 참.

나중에 버크에게 강장제나 듬뿍 안겨줘야겠다.

상호간에 약간의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나는 마스터 요한에 필적하는 실력자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시의회의 의원들과 시청의 관리들에게도 리네아 여백작의 대행자로 제대로 권력을 휘드르는 모습을 보여줬다.

외부에서 보기에도 능력 있고 야망 있고 욕심 있는 젊은 기사로 보일 거다.

그러면 주변에서 만만하게 보지 못하도록 이번에는 무섭고 냉혈한 같은 모습도 보여줘야겠다.

그를 위한 제물은 경비대로 하자.

소금 장수를 때려잡을 때 노획했던 대형 망치도 준비해 가면 괜찮을 것 같다.

마침 부숴버릴 것도 있고 하니 말이다.

하루종인 말로 때리고, 서류와 씨름하다보니 다시 몸을 움직이고 싶어졌다.

경비대를 감찰하는 내일이 기대된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