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31화 (31/248)

31. 멀리서 온 경쟁자.

여백작의 제안은 자신이 가진 여러가지 문제 중 하나를 그냥 툭 던진 것에 지나지 않았다.

구태여 모건에 대한 일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아니었다.

나는 조만간 여백작의 약혼자로 소개될 터였다.

아마 여백작을 단숨에 사로잡은 젊은 기사 지망생 정도로 포장되겠지만 평민들이나 환호할까?

귀족사회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만 있어도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고 경악에 찬 반응이 나오는 것이 정상이다.

단지, 여백작의 약혼자들이 죽거나, 습격을 당해서 죽기 직전까지 몰리는 일이 연달아 발생했기 때문에 '백작님께서 뭔가 다른 생각이 있으시겠지. 일단은 결혼도 아니고 약혼이잖아.' 하고 묵인하고 넘어가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묵인도 여백작의 결정에 대한 묵인이지 나에 대한 묵인이 아니다.

주변의 귀족들은 물론 가신들조차 나를 백안시 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갑자기 굴러들어온 평민이 귀족 사회에 끼어들겠다고 하는데 무시받는 정도로 끝나면 호의적인 반응이지.

그런데 여백작의 약혼자인 나는 무시당하면 안 되는 입장이다.

내가 무시당하면 여백작이 무시당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여백작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직 약혼만 한, 즉 미혼인 여백작에게 별로 좋은 상황이 아니다.

비록 리네아 여백작은 내게 설명하지 않은 이유 때문에 권위의 손상이 좀 생겨도 감수하겠다는 입장인 것 같은데 그래도 자그만치 작위와 영지를 선불로 받는 것인데 돈값은 해야 하지 않을까?

조만간 작위를 받고 귀족이 되기는 하겠지만 갑자기 툭 튀어나온 평민 출신의 약혼자다.

무시를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능력을 인정받아서?

그것은 세상을 너무 순진하게 보는 것이고.

명성을 쌓아서?

그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지.

가장 빠른 길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만약 반역자 모건의 목을 치면 가신들에게서는 어떤 반응이 나올까?

자신의 목을 한 번쯤 만져보지 않을까?

적어도 신참자라고 무시하고 모욕하기 전에 한 번쯤 더 생각을 하게 할 수는 있겠지.

모건 경은 경비대의 전임 대장이다.

전 백작의 사고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질되어서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색이 경비대의 대장이었던 인물이다.

오랫동안 칼마르 시의 핵심 인물 중 하나로 있었고, 백작의 가신들 중에서도 발언권이 높았던 자다.

그런 그의 영향력이 겨우 1년 현직에서 물러났다고 해서 없어진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아렉슨 같은 자를 눈뜬 장님으로 만들고 경비대를 주물럭거린 것이겠지.

좋아.

모건으로 하자.

이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자라면 내 제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겠다.

"백작님의 의견이 합당하게 들리는군요. 그렇다면 일단 모건 경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리네아 여백작의 눈이 커졌다.

그 모습을 보니 이제야 좀 자기 나이 또래로 보이는군.

그런데, 약혼 반지는 내가 준비해야 하나?

백작에게 어울리는 약혼 반지?

곤란한데. 현금은 다 상단에 넣었는데.

아니지. 신분이 저쪽이 위니까 백작쪽에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도대체 이곳에서는 관습적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어머니 없이 자란 나는 이 세상에 대한 상식의 많은 부분이 결여되어 있었다.

* * *

마을이 불에 탄다.

30여 호가 조금 넘는, 흔히 볼 수 있는 시골 마을이었다.

원래는 불까지 지를 생각은 아니었는데.

에릭은 자신에게까지 날아오는 불티를 살짝 피하면서 인상을 썼다.

정말 불까지 지를 생각은 아니었다.

이 무지렁이들이 낫을 들고 어리버리한 신병을 찍어 버리기 전까지는.

물론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전시 징발을 세 번쯤 당하다보면 악이 받칠 수도 있겠지.

그래도 이렇게 반항을 하면 전시 징발이 아니라 약탈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이 놈들아. 사람이 되어서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종자까지 빼앗가 가면 어쩌란 말이냐. 종자가 없으면 우리는 죽는단 말이다."

"종자가 있어도 별 차이는 없을 거야. 노인장. 우리 뒤로 오는 용병 부대만 넷이야. 이 마을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군 그래."

"싸우고 빼앗고 죽이고. 너희들은 모두 미친 놈들이야. 지옥에도 못 갈 거다. 죽어서도 영원히 떠돌며 고통받, 컥!"

에릭은 자신의 발 아래에서 저주를 퍼붓던 마을 촌장의 명치를 발끝으로 질러버렸다.

짧은 비명과 함께 앞으로 엎어진 촌장은 숨도 제대로 못 쉬며 경련했다.

"멀쩡한 놈은 용병이 되지 않아. 노인장. 그리고 말이 심하군. 아무리 그래도 지옥은 가야지. 야! 꼬마."

"예."

"팔은 괜찮냐?"

"아, 예. 아직 아프기는 한데 피는 멈췄습니다."

조금 전에 촌장이 휘두른 낫에 팔이 찔려서 죽을 것처럼 울어대던 어린애였다.

어린애.

아마 14살은 넘었을 거라고 했다.

세금을 내고 부역에 동원되는 나이가 14세부터다.

14세부터는 어른인 것이다.

그러니까 용병 모병에 응한 거겠지.

그러나 피가 배어나온 붕대를 감고 있는 이 녀석은 아무리 봐도 어린애로 보였다.

나이를 속였나?

"모슨. 네 꼬챙이 꼬마에게 줘 봐."

"예. 대장님."

꼬마 신병은 모슨이 건넨 찌르기 전용의 검을 들고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찔러."

"예?"

"임마. 찌르라고! 아까 너를 낫으로 찍었던 놈이잖아. 안 찔러? 그럼 내가 너를 찔러 줄까?"

신병은 점점 고조되는 에릭의 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강요와 윽박지름 속에서 신병은 얼떨결에 쥐고 있던 검을 찔렀다.

"아악!"

"설 찔렀잖아! 다시 찔러! 똑바로 보고 찌르란 말이다! 그래 그렇게. 한 번 더!"

처음 한 번이 어려웠지 일단 사람의 몸에 검을 찔러넣자 다시 찌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신병은 촌장을 죽였다.

그리고 울었다.

"새끼가 울기는. 모슨 이 녀석 헛간에 던져주고 와."

헛간이라고 부른 곳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전에는 마을 창고였고, 지금은 지옥이었다.

모슨은 들락거리는 용병들 사이에 신병을 끼워넣었다.

여자들의 비명과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대충 선임병들에게 맡기고 왔습니다."

"그 놈들 아직도 그러고 있나?"

"예."

"도대체가 이 놈들은 적당히라는 것을 몰라. 발정난 짐승 새끼도 아니고."

"에릭 대장이 애들을 엄격하게 관리하니까 그런 거요. 그러니까 이렇게 어쩌다 풀어주면 미쳐 날뛰는 거지."

"계속 풀어두면 금방 죽어 버려. 통제가 안 되는 군은 도적떼와 다를 바가 없으니까. 적과 만나는 순간 도망부터 칠 생각에 엉덩이를 뒤로 뺀다. 명령에는 귀를 막고 도망칠 길을 찾느라 두리번두리번. 정말 가관이지."

"알죠. 알아요. 에릭 대장. 나도 거기 있었는데 모를까. 그래도 불만이 심한 놈이 몇 있긴 합니다."

"조만간 가지치기를 해야겠군. 그리고 떠날 때 처리는 확실하게 해. 귀찮은 일은 질색이야."

모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갑자기 손을 들어 에릭의 뒤를 가리켰다.

"에릭 대장. 뒤쪽."

멀리서 먼지를 일으키며 몇 마리의 말이 달려오고 있었다.

강철 흉갑을 입은 기병 몇과 헐렁한 로브를 뒤집어 쓴 자가 말 위에 있었다.

휘날리는 깃발은 에릭의 용병단인 카날 용병단이 든 깃발 2개 중 하나와  동일한 문양이었다.

글렌 공작.

그를 나타내는 문양이었다.

*

"나는 글렌 공작님의 밑에서 그 분의 일을 돕는 사람이요."

"자신의 이름도 말하지 못하는 자가 나는 왜 찾아온 거요?"

에릭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별로 엮이고 싶지 않은 자였다.

글렌 공작 밑에는 비밀스럽거나 지저분한 일을 처리하는 자들이 있다.

아니, 대귀족치고 그런 비밀스러운 조직이 없는 자가 없다.

그러나 글렌 공작은 다른 대귀족과는 좀 달랐다.

그는 이 비밀스러운 조직을 반쯤 공개한 것이다.

물론 대놓고 그런 조직이 있다고 알린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비밀스러운 조직이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작전의 결과를 소문내고,

결정적으로 조직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글렌 공작을 두려워했다.

그의 비밀스러운 조직에 의해 횡액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심지어 사라지기까지 하는 사람이 계속 나타났다.

사람들은 입을 조심하고 좀 더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글렌 공작의 입장에서는 영지를 다스리는 일이 무척이나 쉬워진 것이다.

글렌 공작은 자신의 영지에서 일어난 일이 자신의 적들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라며 자신의 비밀스러운 조직을 외부에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에릭은 글렌 공작의 의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에릭 칼마르. 당신의 이름이 필요하오."

"이런. 좆같은. 왜 당신이 내게 왔는지 알겠네. 그게 내 이름이 맞기는 한데 쓸모는 없을거요. 칼마르 백작가에 뭐 수작을 부리려면 나는 아니요. 나는 방계의 방계라서 그 쪽 사람들은 내 얼굴도 몰라. 그런 내 이름으로 뭘 하겠다는 거요?"

에릭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평온하게 말을 이어갔다.

"1년 전에 칼마르의 백작이 죽었소."

"그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그리고 리네아 공녀는 아직 미혼이오. 백작위는 아직 공석이지."

에릭은 가볍게 고소를 지었다.

"나도 귀족 나부랭이의 끄트머리 어디메즈음 있으니 무슨 소리를 하는 줄은 알겠는데 꿈 깨쇼. 리네아 공녀의 계승권에 도전할 만한 자는 없어. 계승법인지 귀족법인지로 명분을 만들어보려는 모양인데 그거 약혼만 하고 있어도 문제가 없어. 조만간 결혼할 것이라는데 미혼이 뭔 문제가 되나? 게다가 약혼을 한 사람끼리는 그냥 증인을 3명 세우고 결혼 서약만 해도 결혼이 성립된단 말이오. 가능한 이야기를 하쇼. 게다가 나는 칼마르 백작가에 있는 그 꼴통 무공광 집단과는 별로 알고 지내고 싶지도 않으니 그만 돌아가도록 하시오.

"약혼자는 죽었소."

천막을 나가려던 에릭이 멈춰 섰다.

"공녀의 약혼자가?"

"창녀의 배 위에서 죽었지."

"훗. 누구 작품인지 공녀의 뺨을 세게 갈겨 버렸군."

"그리고 또 죽일거요."

그 말에 에릭은 몸을 돌렸다.

그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공녀의 약혼자를?"

"그렇소. 공녀는 계속 미혼으로 있게 될 거요."

에릭은 리네아 칼마르가 전대 백작의 계승권자로 법적, 정치적 정당성을 가지고 백작위를 장악했음을 알고 있었다.

리네아 칼마르를 공녀가 아니라 백작이라고 부르는 것이 예법에 맞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는 일관되게 공녀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칼라르 시와 그 주변의 영역을 지배하는 백작에게 귀족가의 영애를 부르는 호칭인 공녀를 쓰는 것으로 그의 불만을, 그리고 진심을 보인 것이다.

누가 대귀족의 작위를 싫어 하겠나?

아무리 방계의 방계라지만 그래도 억지로나마 명분을 내세울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친척인데.

인생을 걸고 달려들어도 미친 짓은 아니지 않을까?

아니, 미친 짓이라고 해도 시도해보는 것이 후회와 미련으로 남은 인생을 보내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기껏해야 칼밥 먹는 용병따라지 아닌가.

그래서 에릭 칼마르는 자신의 용병대를 끌고 칼마르 시로 향했다.

그리고 여정의 중간에 여백작의 새로운 약혼자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윌리엄 버로스.

벼락 귀족이 된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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