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8화 (28/248)

28. 만나다.

퍽!

큭!

퍽! 퍽!

쿵!

사람이 때리고 맞는 소리다.

나지막한 신음.

가끔 누군가가 쓰러지거나 굴러가는 소음.

억눌린 고요함이 오히려 공포스러운 공간이었다.

"4조장."

"예. 대장님."

"나는 너희들을 모두 죽이고 싶다."

"......"

"농담이나 과장이 아니야. 너희들을 죽이고 싶어."

"......"

아렉슨의 무심한 말투에 긴장감은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

아렉슨이 경비대장이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전임 경비대장은 백작의 사고사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그리고 그의 후임은 실력에 따라 아렉슨이 선정되었다.

적어도 아렉슨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여백작의 예비 약혼자가 용병단의 습격에 의해 죽을 뻔한 것이다.

이전 약혼자는 아예 항구 근처의 환락가에서 죽었다.

그리고 두 번 다 경비대는 뒷북을 쳤다.

아렉슨이 이끄는 경비대의 무능에 대해 이야기가 안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다.

아렉슨은 사실 환락가에서의 사건 때 잘렸어도 뭐라고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범인 체포에까지 또 다시 뒷북을 쳐?

그것도 지척에 숨어 있었는데 그냥 지나갔어?

아렉슨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누군가를 죽여야 이 울화가 풀릴 것만 같았다.

물론 왜 이런 꼴이 되었는지 이해는 한다.

이 머저리들이 상황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처럼 굴었을 뿐이다.

순찰이랍시고 평소처럼 적당히 술집을 기웃거리다가 술집의 깡패들과 몇 마디 농담이나 따먹고, 술집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에게 음담패설도 던지고, 그러다가 길가의 노점상의 수레에서 사과라도 하나 집어서 입가심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시간이 되서 돌아온 것 뿐이다.

평소였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평소였다면.

그러나 지금은 평소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전대 칼마르 백작이 죽은 후 이리저리 간을 보던 선제후와 그 주변의 끄나풀들이 본격적으로 찔러보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여백작의 약혼자들에 대한 암살과 파웰 상단에 대한 습격으로 나타난 것이고.

아렉슨은 여백작의 집무실에서 있었던 긴급 회의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게 굴어야 했는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벌개지고 열이 뻗치는 것이 저절로 옆구리에 달린 칼에 손이 갈 정도였다.

회의에서 여백작은 드물게도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언제나 차갑고 냉정하시던 분이 말이다.

*

"선대 백작께서 돌아가신지 벌써 1년이 넘었지요?"

"그렇습니다. 백작님."

리네아 여백작의 혼잣말같은 질문에 마스터 요한이 얼른 대답을 했다.

그러나 여백작은 답변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여백작은 말을 이었다.

"1년이면 눈치를 보면서 이리저리 재던 무리들이 고개를 들기에 충분한 시간이기는 하겠군요."

집무실에 모인 핵심 가신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칼마르 시장 겸 재정관인 멜러,

영지의 군권을 쥐고 있는 마스터 요한,

치안을 맡고 있는 경비대장 아렉슨,

백작 자문위원회의 대표 겸 징세관인 린드스톰,

백작가 내부의 일을 전담하는 사라,

시의회의 의장으로 상단을 대변하는 옌센,

시의회의 서기로 수공업자와 항구 길드를 대변하는 피터슨,

시의회의 감사로 칼마르 주변의 농촌을 대표하는 미켈슨,

법률 고문인 스렌센.

아렉슨만 제외한다면 모두 전대 백작때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칼마르 시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고개를 든 결과가 파웰 상단에 대한 습격일테고. 막시밀리안 공작은 우리를 말려죽이거나 압박해서 길을 들이겠다는 생각이군요. 패트슨 남작은 예상대로 우리를 찌르는 칼이 되기로 한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자를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할까요? 멜러 경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칼마르의 영주인 리네아 여백작은 감정이 섞이지 않은 건조한 어조로 칼마르 시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패트슨 남작 개인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목을 따야겠습니다만, 황제께서 궐위 중인 상황인데다가 그 배후가 막시밀리안 공작입니다. 자칫 언제 끝날지도 모를 선제후들간의 분쟁에 휘말려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선제후들간의 분쟁에 휘말린 올보르그 지역은 지금 용병들의 약탈로 제 기능을 상실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선제후들 대신하여 영지전에 나섰던 그 지역의 영주들 중 일부는 파산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전쟁을 제외한 방법으로 패트슨 남작을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의회 의장인 옌센은 곧장 이의를 제기했다.

"파웰 상단은 그냥 일반적인 상단이 아닙니다. 외부에서는 반쯤 어용 상단으로 취급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뺨을 때린 자에게 제대로 복수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우리를 존중하지 않을 것입니다. 칼마르를 거쳐가는 상단의 안전은 끝장이 나는 겁니다. 패트슨 남작 말고도 돈이 필요한 귀족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더구나 패트슨 남작은 지속적으로 우리를 도발하고 있습니다. 망루 사건을 기억하십시오."

옌센의 말에 여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망루 사건. 그게 있었지. 마스터 요한 혹시 그 이후로 강에서 다시 헛짓을 하겠다고 나선 자는 없지요?"

"물론입니다. 백작님. 달라벤 강의 물길은 안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라죽기 전에 행동하는 것이 맞겠지요. 마스터 요한. 영지군은 전투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여백작의 질문에 마스터 요한은 난처한 얼굴을 했다.

기사들이야 언제든 준비되어 있는 전투기계지만 일반 병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문제는 예산이었다.

정기적으로 급료를 지급하는 정예병까지 충분한 숫자를 양성하기에는 칼마르 시라고 해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의 프로페셔널이자 단기 계약직인 용병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안 됩니다. 용병을 고용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빨라도 3개월, 제대로 준비한다면 6개월은 주셔야 합니다. 그것도 매우 서두른 것입니다."

"만약 소수의 인원으로 치고 빠진다면?"

"며칠 내로 가능합니다만, 전략적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영지에 불을 지르고 병사 몇 명을 죽였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의 의지를 보여 줄 수는 있겠지요. 그러면 협상의 여지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멜러 경."

"예. 백작님."

"군비는 충분합니까?"

"비축한 예산이 있어서 1년 정도는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당분간은 추가 징세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만약 추가 징세가 필요한 상황이 되면 린드스톰 경과 의논하여 보고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회의가 길어져봐야 좋을 것이 없겠지요. 나는 경들을 믿습니다. 그리고 아렉슨 경은 잠깐 남아주겠습니까?"

그때까지도 여백작은 오히려 평소보다도 더 냉정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가신들이 모두 떠나고 집무실에는 아렉슨과 시녀장인 사라만이 남자 가면을 벗어 던졌다.

"아렉슨 경."

"예. 백작님."

냉기가 철철 흘러넘치는 어조였다.

아니, 꽉꽉 눌러대서 폭발하기 직전의 열기같은 어조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렉슨은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하고 여백작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여백작은 아렉슨을 노려보며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시녀장인 사라가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나서야 침묵이 깨졌다.

"나는 내 약혼자들의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미망인이 된 기분이 듭니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죽을 뻔 했지요. 모두 내 영지에서 말입니다."

아렉슨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꽉 쥔 주먹이 보였다.

"그런데 영지의 주인인 내가, 내 약혼자들을 누가 공격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연히 여관에 방문했던 용병 기사가 습격자들을 다 때려잡고 난 후에야 경비대가 도착했다면서요? 어디 멀리 있었으면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내성에서도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고급 여관 아니었습니까? 도대체 경비대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겁니까?"

아렉슨은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앞으로 잘하겠다는 말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른 가신들까지 있는 자리에서 질책을 하지 않아서 체면까지 박살이 나는 일은 면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빠른 시일내로 뭐든 보여주지 못한다면 지금 이 자리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리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아렉슨 경. 선친께서 내게 해주신 말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다른 자들은 싸우게 내버려 둬라. 너는 장사를 해라. 너의 사람들을 배불리 먹여라. 나는 선친의 말을 따르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내가 모욕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모욕을 당하면 싸울 수 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경비대가 제 할 일을 제대로 해 주세요."

여백작은 그 말을 끝으로 집무실에서 나가버렸다.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티가 역력한 모습으로.

*

아렉슨은 분기를 가라앉혔다.

이게 화를 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은 자신이 더 잘 안다.

눈 앞에서 멍이 든 채 굴러다니는 멍청이들을 몇 대 더 쥐어 팬다고 해서 사건의 배후가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냥 분풀이였다.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자신이 무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에게는 두 가지 갈래길이 주어진다.

자신의 무능함을 외면하고 어떻게든 일을 진행하려고 하는 길.

이 경우는 대개 파국으로 끝난다.

아니면 무능함을 인정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길.

아렉슨은 후자를 선택했다.

재수없는 시의회의 임시 조사관으로 임명되자마자 단 몇 시간만에 숨어 있던 용병들을 잡아낸 기사를 만나러 가기로 한 것이다.

어떤 종류의 지혜가 되었던지 들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아렉슨이 듣기로는 이 용병 기사는 상단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특이한 경우였다.

이름이 좀 있는 용병 기사라면 의뢰를 받아서 활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렉슨의 적지 않은 경험에서도 동업이나 이사로 영입되는 것이라면 모를까 용병 기사가 직접 자기 상단을 꾸리는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용병 기사의 상점은 항구 외곽의 약재 시장 한 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황금색과 붉은색, 검은색까지 어우러진 인상적인 외양의 상점이었다.

상점 밖에 세워놓은 간판은 더욱 인상적이었고.

고개숙인 남자의 자존심을 위해!!

우리는 해결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박하군."

하지만 먹어 보고 싶기는 해.

자신의 생각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휘휘 저었던 아렉슨은 더 큰 당혹감에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상점 옆에 붙어 있는 다점에서 상상 외의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백작님께서 여기는 왜?

*

아니, 칼마르의 여백작이 여기는 왜 온 거야?

나는 리네아 여백작과 눈이 마주친 순간 선택해야 했다.

아는 척을 할 것인가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고 그냥 손님으로 대할 것인가?

그런데 아무래도 선택지는 정해진 것 같았다.

눈을 마주친 순간 움찔했잖아.

눈치가 빠른 자라면 내가 뭔가 알아챘다는 것을 느꼈겠지.

이를 때 의뭉을 떨면 믿을 수 없는 자로 낙인 찍힌다.

나는 한숨을 쉬고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칼마르의 백작이신 리네아 공을 뵙습니다. 윌리엄 버로스라고 합니다.

"나를 어떻게 알아 봤지?"

평민 아가씨의 옷을 입고 있는 리네아 백작과 나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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