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6화 (26/248)

26. 그래도 미니맵은 쓸만하다.

이전 생에서.

그러니까 5년 전에 시작되어 처형으로 끝났던 이 세계에서의 생존은 내게 큰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

처음 1년이야 중세 시골마을에서의 힐링 라이프였다고 하지만 그다음 1년은 암염광산에서의 강제 노동, 그리고 다음 3년은 수적과 산적으로 연달아 업종 전환을 하며 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지금은 담담하게 회상할 수 있지만

엘리트 영업맨이던 내가

사람 죽이고 물건 빼앗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니!

당시 내 영혼의 일부가 고장이 나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아니, 이유가 없을 수가 없지.

그래도 나름 교육받은 선진국의 현대인 출신인데 무턱대고 칼들고 강도질하러 나설 리는 없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유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빙의하기 전의 나는 납득하지 못했을 거다.

내가 어떤 마굴에서 굴렀을지 상상이 가지 않을 테니까.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에게 동정심을 품고 있다.

현대인의 감성을 가지고 중세의 세상에 던져졌던 당시의 내게, 당신은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고 싶다.

현대인은 분업화 된 세상에서 살아간다.

고기를 먹기는 하지만 자기 손으로 돼지를 잡기는 커녕 닭 한마리 목 비트는 것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수두룩하다.

그러니 아무리 폭력이 난무하는 중세 판타지에 떨어졌다고 해도 대번에 칼 들고 사람을 푹찍할 수있는 것이 아니다.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그거 각오한다고 해서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

그런 것이 아예 선천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

그래도 말이지.

암염광산에서 간신히 도망쳐서 길바닥에서 죽어가다가 구원을 받았다면,

전쟁통에 연달아 약탈당한 마을의 꼬라지가 소말리아는 천국으로 보일 정도였다면,

털어 먹을 이웃마을도 비슷한 처지였다면,

아이 싯팔 하고 눈을 질끈 감는 수 밖에.

양심에는 대충 반창고 하나 붙여주고 말이지.

나는 그렇게 칼을 든 삶에 익숙해졌다.

물론 사람을 죽이거나 물건을 빼앗는 일은 거의 없었다.

숫자로 위력과시를 좀 하고 무기도 드러내고 가끔 협박도 했지만 좋은 말로 협상을 한 후 통행세를 받고 보낸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군사 훈련도 받아 보지 못한 난민 떼거리를 데리고 하드코어 모드로 강도질을 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고,

우리가 아무리 궁지에 몰렸어도 사람이 죽어나가고 물류가 막히면 정색을 하고 달려들 칼마르 백작가에 대한 두려움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나만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칼마르 백작가의 입장에서 이런 혼란기에 도적떼가 통행로에 터잡고 앉아서 개평을 좀 떼는 것은 눈을 감고 지나갈 수 있는 일이다.

과하게만 하지 않는다면.

그러나 물류의 흐름 자체를 막는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은 칼마르 백작가의 목을 조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정도를 지나쳤던 수적들을 정리한 바가 있다.

그런데 다른 놈들은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해할 생각자체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급격하게 불어난 전직 난민, 현직 산적들은 통행세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너무 많은 숫자가 독이 되었다.

그들은 눈 앞에 지나가는 마차와 상품이 뿌리는 유혹을 견뎌내지 못하고 통째로 털어댔다.

나는 곧 파국이 닥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 때 등장한 이중스파이가 이 놈이다.

고프리 노르게.

칼마르 시의 시의원.

보험회사인 브룸연합의 이사.

칼마르 백작가의 가신 집안 중 하나인 노르게 남작가의 젊은 당주.

시골 남작의 장원기사 집안 출신의 기사지망생 신분이었던 나와는 비교할 수없는 엘리트다.

비슷한 것은 나이 정도.

나보다 몇 살 연상이었을 거다.

2년 전의 그는

한 손에는 여백작의 사면장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어디서 나온지도 모를 황금을 들고

통행로의 유지를 위해 우리를 위협하고 달랬다.

우리들끼리 서로 죽이게 만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난민 마을은 반드시 불에 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의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다.

*

고프리의 손가락은 여전히 길고 하얀 색이었다.

손톱에 색칠을 하고 반지를 끼워주면 여자 손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고운 손이었다.

그 손이 서류를 잡고 내게 내밀었다.

"읽어보십시오. 윌리엄 경. 원하던 보고서입니다. 생포된 용병들의 심문 결과가 담긴 내용입니다."

나는 서류를 받아 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온갖 개소리가 섞인 곳에서 유용한 정보를 추려내야 했다.

게다가 진짜 쓸만한 정보는 이곳에 기록되어 있지도 않을 것이 뻔했다.

칼마르 시 경비대와 시의회와의 알력은 외지인 출신인 나조차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했으니까 말이다.

"별로 쓸모는 없을 겁니다. 저도 이미 읽어보았지만 무식한 용병들이 고문에 질려서 되는대로 뱉어내는 헛소리가 대부분입니다. 언급되는 장소와 사람은 이미 경비대가 조사했다고 하더군요."

고프리는 내가 빠르게 보고서를 넘기는 중간에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전달해 주었다.

나는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의 호의에 답했다.

"이곳에 연고가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부딪쳐보는 것 뿐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곳에나 들이 박을 수는 없으니까 최소한의 정보를 요청한 것 뿐입니다."

"고문을 통한 정보를 신뢰하시는 겁니까?"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고문은 원하는 답을 얻어내는 수단이지 진실을 밝히는 수단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왜 보고서를 읽는 겁니까?"

고프리의 어조에는 당혹감이 배어 있었다.

"고문을 당하는 와중에 가짜 정보를 꾸며낼 정도로 용병들이 훈련받은 자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어디선가 들었거나 기억에 남는 이름이나 장소, 뭔가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냥 기억 속 어딘가에 처박아둔 몇 마디의 대화. 고문을 하면 그런 것들이 파편화 되어서 나온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 쓰레기 정보를 찬찬히 조사하다보면 뭔가 튀어나올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윌리엄 경. 혹시 보험조사에 관심이 있습니까?"

나는 보고서에서 눈을 뗐다.

내 앞에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바라보는 헤드헌터가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미니맵을 불러왔다.

이미 시의회의 사무실에 들어올 때 한 번 확인한 후였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역시 붉은 점은 없었다.

고프리 의원은 칼마르 시에 또는 내게 적대적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적대적인 의지를 가진 자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저 제안은 내게 호의를 가지고 하는 것이라는 말인데.

왜?

이제 본지 얼마 되지 않은 기사지망생에게 하는 제안치고는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험조사라니.

그거 지구에서도 경찰이나 검찰쪽 일 하다가 경력직으로 들어가는 나름 짬밥이 필요한 고인물용 직장 아니었나?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부족한 내게 제안할 내용은 아니었다.

"보험조사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정식으로 기사로 서임을 받고 대영주 휘하에서 종군하기를 원한다면 안 맞는 제안이었겠지만 이곳 칼마르에 정착하기를 원한다면 보험조사관으로 자리를 잡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일단 보수가 꽤 괜찮습니다. 의외로 높은 분들과 만날 일도 많아서 능력을 보이면 기사 서임도 무난합니다. 장점이자 단점이 전투에 나갈 일이 없다는 것인데 그것도 의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브룸연합은 자력구제를 배제하지 않으니까요."

확실히 내게 호의를 가진 제안이었다.

그러나 고프리 의원과 지나치게 가깝게 얽매이는 것은 사절이다.

이 인간.

사람을 수단으로 쓰거든.

이익에 따라 언제든 나를 담궈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지금이야 호의적이지만 나중에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일이다.

고프리 의원은 선제후와 접점까지 있으니까.

그는 언제고 리네아 여백작과 그의 선제후 사이에서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계속 칼마르 시에 머무르고 이곳에 사업체를 일군다면.

그렇게 되면 그의 선택에 따라 내가 저 인간의 뒤통수를 후려쳐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 때를 위해서도 너무 멀지 않게, 그리고 너무 가깝지 않게.

그것이 좋겠다.

"섬길 만한 주군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아쉽지만 의원님의 호의는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두기만 하겠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그래도 생각이 바뀐다면 다른 곳보다 내게 먼저 연락을 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미소와 함께 보고서를 다탁에 내려놓았다.

고프리 의원의 시선이 내가 보고서에 줄을 친 몇 곳의 장소와 인물에 주목했다.

"그러니까 이 자들이 윌리엄 경의 촉에 걸려든 자들이라는 겁니까?"

"아마도? 그러나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직접 보고 대화를 나눠봐야 뭐든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비대의 병력을 붙여드릴 수는 없고, 의회는 자체 병력이 없어서 이게 문제군요. 의원 개인이 거느리는 경호원은 좀 있습니다만."

"괜찮습니다. 혼자서 다니지 않습니다. 후한 보수 덕분에 이미 용병을 경호원으로 고용했습니다."

*

내 경호원으로 나선 용병은 주콥과 그의 동료들이었다.

모두들 남는 것이 시간뿐이라면서 내 요청에 기꺼이 동행해 주었다.

게다가 당분간 파웰 상단의 장거리 상행이 없으리라는 내용이 공유되어서 내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다행이었다.

검은 늑대 그라프가 속했던 용병단은 예상대로 업력이 제법 긴 곳이었다.

붉은 드라멘 용병단.

초창기 멤버의 대부분이 드라멘 시 출신이라서 붙었다는 이름이다. 지금은 드라멘 시 출신이 거의 안 남아 있다고 하지만 같은 이름 아래에서 10년이 넘게 전쟁터를 누벼왔다고 한다.

그라프는 서열 3위쯤 되는 자였고, 용병단장과 부단장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경비대가 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용병단 멤버 대부분은 체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쯤되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이 자들은 암살을 본업으로 하는 자들이 아니야. 전쟁터가 이들의 일터지. 정찰이나 경계, 집단전 따위는 익숙하겠지만 기사가 지키는 귀족을 급습해서 죽이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지."

"그렇습니다. 윌리엄 경. 저도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사가 지키는 곳에 용병을 밀어넣다니 그냥 죽으라고 등을 떠미는 것과 다를 것이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외곽을 감시하라고 남겨놓았던 용병들 역시 별도의 지시 없이 방치가 되어서 결국 경비대에게 거의 다 잡히고 말았습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내가 아는 옛날 말 중에 죽여서 입을 막는다는 말이 있지. 또는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든가."

"그거 무시무시한 말이군요."

"그래서 나는 좀 궁금해. 이게 정말 입을 막은 것인지 아니면 무슨 문제라도 생겨서 일이 틀어진 것인지. 용병단장이나 부단장을 직접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

그래서 고문으로 얻어낸 장소와 인물들을 조사하며 돌아다닌 것이다.

물론 경비대가 이미 조사하고 지나간 후라서 이렇다 할 결과를 얻지는 못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그럴 듯하게 폼을 잡았지만 내가 전문적으로 수사기법을 배운 것도 아니고, 과학 수사를 위한 도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체포된 용병들을 직접 심문하면서 감을 잡은 것도 아니었다.

직접 심문하라고 해도 경비대에서 한 것보다 잘 했을 것 같지도 않다.

내가 믿는 것은 따로 있었다.

미니맵이었다.

미니맵을 속여 먹을 수 있는 자도 있는 것도 같고, 뭔가 멍텅구리 같은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지금 이것 만큼 믿을 수 있는 것도 없다.

나 또는 내가 속한 세력에 적대적인 자가 표시된다. 그냥 적대적인 것도 아니다. 죽여도 무방할 정도로 적대적인 자라야 한다.

그렇다면 붉은 드라멘 용병단은 어떨까?

그곳의 단장과 부단장이라며?

용병대를 싸그리 잃어버린 자들이 가진 분노와 적대감이 어느 정도 일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미니맵에 아주 빨간 점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중이었다.

역시나.

내 기대는 빗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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