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두 번째 약혼자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 지렁이는 꿈틀임이 너무 심하다.
검이 부서지다니!
부러진 것이 아니라 부서진 것이다.
피와 뼈로 가득 찬 고기덩어리를 단숨에 양단할 수 있는 공격이 가로 막혔다.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도 않은 귀족 도련님이 내민 칼에 자신의 검이 막히다니!
귀족 도련님은 칼 자루와 칼등을 양 손으로 잡고 가로로 내밀었다. 칼의 품질에 확신이 없다면 할 수 없는 방법이다. 단 한 번의 충격에 부러져 나가는 칼도 드물지 않으니까.
과연 귀족 도련님의 칼은 멀쩡했다.
귀족 도련님이 연약한 팔은 멀쩡하지 않았지만.
반면에 비싼 돈을 주고 구한 자신의 검은 날이 나가버렸다. 어디든 한 번만 더 후려치면 뚝 하고 부러지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하게 깨져 나갔다.
재수 옴 붙은 날이었다.
불량품을 팔아? 대장장이 놈. 반드시 죽일테다.
그리고 뱀같은 놈.
나를 속였어.
뭐가 별 볼일 없는 귀족 나부랭이야.
호위로 붙은 기사 놈부터가 신비까지 쓸 줄 아는 놈이라니.
도대체가 몇이 죽은 거야!
밖에 남긴 놈 말고는 다 죽었잖아!
은퇴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탕 한다는 계획이 심하게 어그러지는 상황이었다.
검은 갑옷의 용병은 새로 꺼내든 워해머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분노를 담아 휘둘렀다.
깡! 깡!
쇳덩어리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려퍼졌다.
라스머스 백작가의 둘째, 조르겐은 반쯤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상대의 공격을 연달아 쳐냈다.
너무 빨랐다.
보고 막을 수 없었다.
느끼고 막아야 했다.
만약 이름도 밝히지 않으려던 떠돌이 기사에게 도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보고 막을 수 없는 단계에서 이미 스파이크에 몇 군데고 찍혀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눈으로도 따라가지 못하는 공격을 어떻게든 막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거기까지였다.
칼을 놓쳤다.
손에 쥔 칼은 죽어도 놓지 않는 것이라고 배웠지만,
손아귀가 찢어지고 손가락이 골절되는 상황에서는 배움을 실천할 수 없었다.
수련 기간이 너무 짧은 것이 문제였다.
몸을 전투에 맞게 완성을 하기는 커녕 제대로 시작하지도 하지 못한 상태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놓친 칼은 벽에 꽂혔고, 워해머의 스파이크는 그의 머리에 꽂힐 판이었다.
조르겐은 양팔로 머리를 감싸며 고통 또는 죽음에 대비했다.
캉!
빌어먹을!
검은 갑옷의 용병은 속으로 욕설을 뱉어내며 옆으로 빠졌다.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온 검은 꽤나 위협적이었다.
가죽 건틀릿에 달린 징으로나마 쳐내지 않았다면 귀족 청소년의 머리에 워해머를 박아넣기 전에 자신의 머리에 검이 박혔으리라.
검은 갑옷의 용병은 목표물이 자신의 손아귀에서 다시 한 번 벗어났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
지긋지긋할 정도 질척거리던 경호 기사를 치웠던 것처럼 새로 나타난 적 역시 치워버리면 그만이다.
보호자가 사라진 애송이는 한입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방금 깜찍한 짓을 하기는 했지만 그게 두 번이나 가능하겠나.
조르겐은 아직 그의 사정거리 내에 있었다.
검은 갑옷의 용병은 일단 새로운 적을 향해 정신을 곤두세웠다.
새로운 적은 그제서야 복도에서 응접실로 통하는 입구를 막고 섰다.
물론 빈 손이었다.
가지고 있던 검은 투창처럼 이미 던진 후였으니까.
*
"검둥아. 내 검 니가 가져갔냐?"
나는 태연한 척 검은 갑옷의 용병을 도발하며 하며 빠르게 응접실을 흝었다.
가지고 있던 검을 투척한 후라서 내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단검 한 자루가 다였다.
어쩔 수 없었다.
거리가 멀다고 그냥 내버려뒀다면 조르겐인지 주르겐인지 하는 애송이의 머리에 콕 하고 구멍이 날 판이었으니까.
그러면 그 구멍으로 이것저것 흐르는 것이 많았겠지.
그러니 검이라도 던져봐야 하지 않겠나 말이다.
간신히 시간은 번 것 같은데,
눈 앞의 검둥이가 만만하지 않아 보인다.
경호를 맡았던 기사는 한쪽에 쓰러져 있는 것이 이미 끝난 것 같고.
나는 천천히 응접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막고 있던 용병을 처리한 후,
계단을 오르자마자 내가 맞닥뜨린 광경은 사실 별로 유쾌한 모습은 아니었다.
피는 양탄자에 질척거릴 정도였고, 복도의 벽은 물론 심지어 천장에도 튀어 있었다.
복도에 널부러진 시신들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예상외였다.
복도에 쓰러져 있는 시신의 대부분이 용병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습격한 용병 집단의 공격에 라스머스 백작가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객실에 묵고 있던 무고한 손님들까지 한꺼번에 죽어나갔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가다가 몰살당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의외로 용병의 피해가 더 커 보였다.
라스머스 백작이 그의 아들에게 붙여준 경호가 꽤나 괜찮았다는 의미다.
전쟁터에서 오랫동안 굴러먹었을 것이 뻔한 용병단이 마지막 의뢰에서 몰살당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경호는 마지막 여력까지 다 소모해버렸다.
지금 남은 자는 라스머스 백작의 아들이라는 조르겐과 그의 시녀 뿐이었다.
나는 응접실로 들어오면서 의무를 다한 기사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계약에 따른 의뢰를 수행해야 할 차례였다.
나는 응접실로 들어간 후 천천히 검은 갑옷의 용병에게 다가갔다.
그 때였다.
"그라프. 그게 내 이름이다."
응접실과 연결된 개인실로 천천히 물러서던 조르겐을 향해 곁눈질을 하던 검은 갑옷의 용병이 뜬금없이 한마디 던졌다.
"그래. 검둥아. 그런데 내 검은?"
대답은 워해머의 뾰족한 부분, 스파이크였다.
날카로운 스파이크가 내 머리통을 노리고 공기를 갈랐다.
크게 한 걸음 걸으면서 그리고 팔을 펴면서 내려찍는 워해머의 공격은 상상 이상으로 먼 거리까지 닿았다.
검둥이의 키가 크고 팔도 길어서 그런 면도 있었다.
나는 공간을 접듯이 순식간에 다가오는 검둥이의 움직임에 슬쩍 뒤로 물러서면서 단검이라도 던질 만한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연달아 몰아쳐오는 워해머의 공격에 연신 뒤로 물러서야 했다.
순식간에 벽까지 밀려버렸다.
특실에 딸린 응접실이라지만 귀족가의 대저택도 아니고 고급 여관의 응접실일 뿐이다.
연무장도 무도회장도 아니다.
두 명이 목숨을 걸고 싸우기에는 그렇게 여유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나는 워해머의 공격이 스쳐지나가는 순간 오히려 앞으로 나가면서 워해머를 든 검둥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다른 손에는 허벅지에 차고 있던 단검을 꺼내 쥐었다.
검둥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워해머를 든 손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뭐 이런 힘이.
내 힘에 놀라는 검둥이의 눈이 볼만했다.
그의 속마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조금은 여유가 있어 보였던 검둥이의 태도가 확 변했다.
검둥이는 단검을 쥔 내 손을 잡고 늘어졌다.
내 힘을 못이기고 내가 휘두르는 대로 끌려다녔지만 절대로 내 손을 놓지 않고 내게 딱 붙어 있으려고 했다.
결국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고 몸을 비비적대기 시작했다.
정말 역겨웠다.
가까이 붙은 검둥이에게서 이빨 썪는 냄새가 났다.
코가 썩는 것 같았다.
아이 싯팔!
나는 분노를 담아 신발 뒤축으로 있는 힘껏 검둥이의 발등을 내리 찧었다.
뭔가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고통을 못이기고 웅크리는 검둥이의 턱을 무릎으로 올려쳤다.
깔끔하게 들어간 한 방이었다.
그런데 이 놈, 진짜 튼튼하네.
이 정도면 의식을 잃고 넘어갔어야 정상인데.
어쨌든 어서 마무리를 해야 했다.
그래서 비틀비틀 뒤로 물러서는 검둥이를 향해 다시 달려들려는 순간.
검둥이의 가슴에서 칼 끝이 돋아 나왔다.
가죽으로 된 갑옷을 가르고 삐죽이 모습을 드러낸 칼끝에 피가 맺히더니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검둥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뭐, 어쩌라고?
검둥이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대로 앞으로 엎어졌다.
검은 갑옷을 입었던 용병의 뒤에는 조르겐이 있었다.
그는 찢어지고 부러진 손으로 그의 칼을 잡고 있었다.
그것으로 복수를 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초과해서 계약을 이행했다.
*
칼마르 여백작의 새로운 약혼자에 대한 습격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그리고 불명예스럽게 죽었다고 알려진 전 약혼자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
혹시 탈린도 세간에 퍼진 소문처럼 화대에 대한 시비끝에 죽은 것이 아니라 암살당한 것은 아니었을까?
당연한 의문이었다. 약혼자가 연달아 죽거나 습격을 받으면 있을 수 있는 의문이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한 의문이 꼬리를 물고 튀어 나왔다.
도대체 왜 여백작님의 약혼자들을 죽이려고 하는 거지?
그 질문은 칼마르의 여백작인 리네아 공녀에 대한 유언비어를 불러왔다.
얼른 결혼을 하지 않으면 작위 상속권을 잃어 버린다고 하더라.
이미 늦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미혼인 상태라면 언제든지 작위가 박탈될 수 있다더라.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이야기.
그리고 귀족법과 상속법에 대해 어두운 일반인들의 오해와 무지는 리네아 공녀에 대한 권위와 정당성에 대해서도 불안을 불러 일으켰다.
이런 종류의 일은 주절주절 설명하는 것 보다는 단순명료한 해결책이 가장 좋다.
그냥 결혼하면 된다.
빠르게 결혼하면 다 해결되는 문제다.
그런데 그 단순명료한 해결책이 지지부진이라서 문제였다.
새로운 약혼자로 사실상 내정되어 있던 조르겐이 공개적으로 약혼을 거부하고 부친의 영지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일신의 안위조차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자가 칼마르 같이 중요한 상업도시를 지배하는 여백작의 남편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변이었다.
너무도 정론이라서 반론이 아예 불가능했다.
뒤에서 서로 말을 맞추고 이익을 조율하던 여백작의 가신들과 라스머스 백작은 조르겐을 제대로 설득도 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해야 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조르겐의 의지가 진심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암살 위협을 한 번 받더니 겁이 나서 도망친 것이라고 비웃었지만 나는 조르겐이 반쯤 박살난 손으로 어떻게 그라프를 죽였는지 보았기 때문에 그의 진심을 믿을 수 있었다.
조르겐은 그렇게 칼마르를 떠났고, 나는 마틴과의 계약을 성공적으로 이행했다.
오히려 초과해서 이행한 셈이다. 조르겐이 목숨을 건졌으니까.
그리고 마틴의 의뢰를 성공적으로 이행한 것이 여러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준 모양이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인플루언서 체험단 마케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지켜보던 와중에 칼마르 시의회에서 내게 의뢰를 맡겨온 것이다.
검은 늑대 그라프가 속한 용병단 중 남은 자들을 추적해서 체포하고 의뢰인을 알아내는 일이었다.
이미 칼마르의 경비대가 문제 해결을 위해 뛰고 있었지만 경비대와 모종의 알력이 있는 시의회는 일종의 압박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해결되면 더 좋고.
그래서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명성이 높고 이미 이 일에 관련이 있는 내게 의뢰를 한 것이다.
나는 사업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는데.
이러다가 아예 용병으로 나서는 것은 아닌가?
그건 또 별로 내키지 않는데.
나는 그다지 내키지않은 마음으로 시의회에서 내게 보낸 의뢰서를 천천히 검토했다.
내용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흥미를 끄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의뢰서의 하단에 자리잡고 있는 익숙한 이름.
그 이름에 시선이 갔다.
칼마르 시의회 의원 고프리 노르게.
내 목을 자른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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