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마틴과 계약했다. 두 번.
내가 지금 있는 곳도 예외가 아니었다.
덩치는 곰같은 남자들이 얼굴을 맞대고 남에게 들릴세라 나지막하게 수군거린다고 하고는 있지만 그게 어디 수군거리는 건가.
대놓고 고함만 안 지르는 것이지.
내 귀에는 잘만 들렸다.
"라스머스 백작가의 조르겐 공자? 내게는 조르겐 공자는 말 할 것도 없이 라스머스 백작가 자체가 낯선데? 자네는 혹시 아나?"
"왈롱 지방에 있는 소도시의 영주야. 백작가라고 하기에는 좀 체급이 떨어지는 편이라던데."
"그게 낫지. 백작님의 부군으로 명망있는 가문의 공자가 온다면 오히려 문제야."
"그건 그렇지. 그리고 조르겐 공자는 백작님과 동갑이라고 하더군."
"좀 어리시군. 가신들이 신경쓸 것이 많겠어."
"그런데 설마 이번에는 별 일이 없겠지?"
"그래야지. 이번에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정말 큰 일이야."
"내가 듣기로는 그래서 가신들이 후보자들 중에서 좀 더 어린 분으로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있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서로 교환하며 불안감을 덜어내고 있었다.
여백작의 약혼자가 살해당한 일은 죽음이 흔해진 시대에 살고 있는 그들에게도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도 아는 것이다.
이 사건이 어쩌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래서 소문으로만 듣고 있었던 전쟁의 불길이
이곳 칼마르에도 옮겨 붙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현실로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마틴은 내가 반쯤 격리된 공간의 테이블을 차지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습을 드러냈다.
미리 약속을 잡았고 이곳이 마틴의 여관임을 감안해도 약간 빠른 감이 있었다.
그만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겠지.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윌리엄 경."
"별 말씀을요. 지금 막 왔습니다. 게다가 이곳에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듣다보니까 재미있더군요."
마틴은 웅성거리는 테이블의 분위기를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거 참. 자기 일이 아니라고 말을 너무 함부로들 합니다. 그래도 칼마르의 지배자이신 분인데. 이번 일은 함부로 입에 담을 만한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라스머스 백작가도 알고보면 칼마르와 연관이 있는 집안입니다. 아무렇게나 데려온 곳이 아니에요."
"그렇습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군요. 그리고 이 곳 칼마르가 원체 개방적인 곳이라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대놓고 하는 면이 있기는 합니다. 그런 것치고는 백작님에 대한 충성은 확실하더군요."
"아무래도 칼마르의 역사와 함께 하는 집안이니까요."
"우리의 사업을 위해서도 별 일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럼 잠시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요."
우리는 마틴의 개인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부터는 비즈니스의 시간이었다.
원료를 구하기 위해 원행을 다녀왔고,
칼마르의 공방을 이용하여 시제품까지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판매.
한 때는 잘 나가는 영업맨이었지만 몇 년 동안 검과 함께 뒹굴었더니 뭔가 내 영혼의 본질적인 부분이 변한 것 같았다.
영업까지는 도저히 무리였다.
그래서 지분을 나누고 판매를 맡아줄 사람을 구했더니 마틴이 손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래서 현재 나와 마틴은 동업 중이다.
나중 일, 그러니까 지분 판매까지 생각한다면 마틴과 손을 잡는 것이 최선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다음 즈음은 되는 선택이었다.
"갔던 일은 잘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예. 기대했던 딱 그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시제품도 만들 수 있었지요."
"오~ 이것이 바로 그 것이군요."
"예. 남자에게 참 좋은 그 것이지요."
나는 성인 손가락 크기의 녹색 유리병을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모두 10개. 한 달 분이다.
"이미 설명드렸듯이 약효가 너무 강해서 매일 먹는 것은 권하지 않습니다. 젊은 사람도 밤일이 과하면 건강에 손상이 오는 법인데 나이 든 사람이 이 약의 도움을 얻는다고 해봐야 일시적일 뿐입니다. 이 약의 진정한 가치는 건강을 되찾아 주는 것에 있습니다. 개인 차이가 있겠지만 이삼일에 한 개씩 한 달 이상 꾸준히 먹는 것이 적합합니다. 오래지 않아서 효과를 보게 될 겁니다. 우선은 피로가 가시고, 활기가 넘치게 됩니다. 좀 더 지나면 피부에 광택이 돌고 눈이 맑아 집니다. 아주 오랫동안 장복하면 새치가 검게 변하고 새로이 자손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말했다.
"모든 것이 다 우리 집안의 선조님들이 직접 경험하신 일입니다."
"음 . 과연."
마틴은 홀린 듯한 얼굴로 유리병을 어루만졌다.
그런데 마틴 이 사람, 귀가 너무 얇은데.
믿고 맡겨도 될까?
하지만 바꾸기에는 이미 늦었다.
딱히 아는 사람도 없고, 지금 인연이 닿는 사람도 없고.
내가 레시피를 제공하고 기초 자금과 원료의 공급을 맡았다.
마틴은 공방을 수배하고 판매를 맡고 그에 따른 운영자금까지 맡기로 한 동업이었다.
계약서에 싸인하고 자금도 이미 집행된 후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제부터는 믿고 맡겨야지.
그래도 한 가지는 참견을 하자.
"마틴님. 그런데 시험 생산할 분량의 견적이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도착한 약초 손질이 끝나서 곧 생산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일단 판매를 시작해 볼만한 분량이기는 합니다. 상점에 진열하고 창고에도 약간 쌓아놓을 정도는 될 겁니다."
"그렇다면 칼마르 시의 유력 인사 100명에게 10병씩 돌립시다."
인플루언서 체험단 마케팅을 하자구요.
유명인이 직접 먹어봤더니 효과가 좋더라라는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은 못 찾겠어요.
"음. 전부터 느낀 것인데 역시 윌리엄 경은 일반적인 기사분들과는 다르군요. 많이 달라요."
"그렇습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그래도 한 때 영업을 뛰던 가락이 있어서 그렇다고 할 수도 없고 말이지.
그렇다고 사람 죽이는 법을 훈련하다 보면 아이디어도 떠오른다고 하기도 이상하잖아?
"만약 윌리엄 경이 상인이 되었다면 어떤 모습일지 도저히 상상이 가지를 않는군요. 확실한 것은 일개 객주인 저 같은 사람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의 거상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하하. 저 그렇게 머리 안 좋습니다."
나 머리 안 좋아요.
지력도 NORMAL이에요.
내가 난처하게 웃고 있을 때 여관 한 쪽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뭔가 부수어지는 소리, 고함. 비명.
비명은 다른 사람들도 들을 수 있겠군.
순간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나갑시다."
우리는 응접실에서 뛰어나갔다.
두꺼운 문을 열고 나가니 고함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전투의 소음이었다.
"아니, 이게 무슨!"
"객실 쪽입니다. 처음의 비명은 식당 쪽이었고."
"성 내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경비대는 뭘 하고 있는 것인지!"
마틴은 치안을 맡은 경비대에 관한 불평을 내뱉으며 객실쪽으로 움직였다. 나 역시 마틴보다 앞서서 객실로 향했다.
식당에서 객실로 이어지는 문가에 두 명의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마틴은 그들을 보자 굳은 얼굴로 말했다.
"라스머스 백작가의 사람들이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라스머스 백작가가 왜 여기서 튀어나오나?
마틴의 여관이 고급 여관이라고는 하지만 상인이나 하급 귀족이 머무는 곳이지 백작 같은 고위 귀족이 머물만한 곳이 아니다.
고위 귀족은 같은 귀족의 저택에 초대를 받아서 묵는 것이 기본이다. 이 도시에 연줄이 없는 자는 칼마르 백작의 저택에 있는 손님 숙소에 머무르면 된다.
그게 귀족간의 예의다.
주인 입장에서도 누가 내 구역에 들어와 있는지 파악은 해야 할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격에 맞지 않게 상인들의 근거지에 라스머스 백작가의 사람들이 있다고?
이게 몸을 숨기겠다는 의도가 아니면 뭔데?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 고함 소리, 다시 비명 소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만했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믿어지지 않았다.
칼마르 시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내 기억에는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칼마르의 백작은 내가 죽을 때까지도 처녀였단 말이다.
이 놈의 약혼자 무리들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어!
"윌리엄 경."
마틴이 나를 불렀다.
뭘 부탁하려는지는 알겠는데, 상관없는 자들의 일에 끼어드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라스머스 백작이라니 그게 누군데?
"내가 가진 지분을 모두 포기하겠소. 조르겐 공자를 구해주시오."
"이미 늦었을지도 모릅니다."
"상관없소. 구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오."
마틴의 속사정도 꽤나 꼬여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객실로 향했다.
기사 지망생답게 언제나 약식으로나마 갑옷을 갖춰입고, 호신용 무기를 들고 다녔으니 망정이지.
그래도 즐겨쓰던 쇠몽둥이가 아쉽기는 했다.
나는 호신용의 검을 허리에 찬 채 객실로 통하는 입구로 들어섰다.
대번에 찔러오는 검이 두 자루.
내 것과 마찬가지로 짧은 검이었다.
길이는 팔길이 정도.
팔을 뻗으면 검 너머의 적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짧은 길이였다.
나는 검의 궤적에 맞추어 몸을 비틀며 양 쪽의 적을 붙잡아 당겼다.
가볍게 딸려오는 적의 머리를 서로 부딪친 후 바닥에 던져 버렸다.
투구를 쓴 덕분에 머리가 깨지지는 않았지만 둘 다 목이 부러져 버렸다.
통일성 없이 제멋대로 입은 가죽갑옷.
낡았지만 손질은 잘 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슴에는 동일한 문양이 있었다.
용병이다.
그것도 문양을 따로 새길 정도로 오랫동안 살아남은 용병단 소속.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다.
저 안에는 그런 용병단의 주축이 있다는 소리니까.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역시나 계단 위쪽에도 지키고 있는 용병이 하나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무력하게 죽어간 민간인들이 쓰러져 있었다.
흐르는 피가 계단을 타고 신발을 적셨다.
손도끼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좁은 공간.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그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회전하는 도끼의 머리, 자루, 핏방물이 비산되는 도끼날까지.
모두 내 눈에 들어왔다.
손을 펴서 앞으로 내미는 순간 손바닥으로 도끼 머리의 옆면이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그리고 도끼 자루가 지나간다.
손을 움켜쥐었다.
도끼 자루가 손아귀에 착 달라붙었다.
이 도끼는 이제 내꺼다.
휙!
계단 위의 용병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인식하지도 못한 채 뒤로 넘어갔다.
그의 이마에는 그의 도끼가 박혀 있었다.
내 손에는 주변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피가 묻었다.
아직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라스머스 백작은 꽤나 괜찮은 호위를 그의 아들에게 붙여준 모양이다.
나는 검을 뽑았다.
객실 입구는 아직 뚫리지 않았다.
"오~ 도련님."
시녀는 반쯤 울면서 그의 주인을 찾았다.
그녀의 앞에는 이미 죽어버린 경호 기사가 두 눈을 부릅뜨고 누워 있었다.
그리고 청년과 청소년의 그 사이 어디 즈음에 있는 라스머스 백작의 아들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용병은 부서진 자신의 검을 뒤로 던져 버리고 새로운 무기를 꺼내들었다.
"겁쟁이인 줄 알았는데 한 수가 있었군. 꼬마."
검은 용병은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보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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