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3화 (23/248)
  • 23. 형이 여기서 왜 나와?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방향이 어긋난 분노로 가득 차 있던 공간이 놀라움이 지나 경악으로 얼어붙었다.

    "아, 그러니까, 음. 그러니까 네 말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더듬더듬 내 뱉으려던 백작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둘째 아들, 캘린이 그의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예. 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조만간 여백작의 약혼자가 새로 선택될 것 아닙니까? 죽입시다. 그리고 누군가가 또 선택된다면 또 죽이는 겁니다. 혼란을 혼란으로 덮어버리는 겁니다. 탈린 혼자 매춘부의 배 위에서 뒈졌다면 우리만의 불명예지만 약혼자들이 계속 죽어나간다면 칼마르 백작가 때문에 음모에 휘말린 것이 되겠지요. 우리 역시 희생자 중 하나가 될 겁니다. 지금처럼 구차하게 굴지 않아도 됩니다. 가능성이 아주 낮기는 하지만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궁지에 몰린 사람은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 마련이니까요."

    "미친 것 같은 계획이군."

    플렌스 백작의 감상이었다.

    놀라움이 지나쳐 냉정을 되찾은 그였다.

    백작은 어느새 계획의 가능성에 대해 따져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본 가신들은 기겁을 했다.

    백작과 오랜 시간을 지내온 늙은 가신들은 고개를 기울인 백작의 저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저 모습은 지금 백작 자신에게 내밀어진 사안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중이라는 습관적인 제스처인 것이다.

    "안 됩니다. 백작님. 너무 위험합니다. 만약 비밀이 밝혀지면 우리는 칼마르와 척을 지는 것은 물론이고 죽은 약혼자들의 가문과도 원수가 됩니다. 그러면 끝장입니다. 불확실한 도박에 백작가를 판돈으로 올려놓을 수는 없습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이런 일이 논의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절벽 끄트머리에 서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소문이라도 퍼지면 해명하는 것 만으로도 한 세월일겁니다."

    플렌스 백작은 차갑게 얼굴을 굳히고 있는 둘째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응접실을 주욱 둘러보았다.

    그리고 명령을 내렸다.

    "캘린."

    "예. 백작님."

    캘린은 백작이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시종 한 명이 응접실 구석에 서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플렌스 백작 일행이 머무르고 있는 고급 여관에 속한 자였다.

    캘린은 시종을 향해 걸어갔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시종은 두려움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간신히 한마디 말을 내뱉는 것이 다였다.

    "사, 살려주십시오. 제발."

    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앞에서 검을 꺼내어 시종의 배를 찔렀다.

    그리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검에 찔려 쓰러진 시종의 목을 다시 한 번 찔렀다.

    "이제 이곳에서 나눈 말이 세어나갈 가능성은 없다고 해도 될 것이오. 내가 경들을 믿어도 되겠소?"

    "신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믿음을 배반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저는 여기서 차를 한 잔 마셨을 뿐입니다.."

    황급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며 눈치를 살피는 가신들 너머로 백작과 그의 아들은 음모자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 * *

    재미있게도 주콥의 일가친척들은 모두 주콥을 닮았다.

    얼굴 생김새와 키와 덩치, 머리카락까지 모두.

    늙고 젊음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한 일가붙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주콥처럼 주콥의 부친도, 부친의 형제들도, 주콥의 사촌들도 모두 쾌활하고 붙임성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덕분에 이번 거래는 약간의 실랑이를 거쳐서 서로가 만족할 만한 합의에 금방 도달할 수 있었다.

    심지어 가격은 좀 더 지불하기로 했지만 칼마르 시까지의 배송을 맡길 수 있을 정도였다.

    이것은 노르캅의 촌장인 주콥의 부친 덕분이었다.

    "물량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윌리엄 경. 최소 계약 물량의 4배까지는 우리가 댈 수 있으니까요. 남아도는 것이 종꽃이고 얀얌입니다. 꽃도 아니고 뿌리를 달라고 하는 것이니 우리가 아니더라도 가져올 수 있는 곳은 많지요."

    "어르신께서도 아시겠지만 이렇게 직접 산지인 노르캅까지 와서 종꽃과 얀얌의 뿌리를 구하는 것은 수급에 문제가 생기는 일을 최대한 막아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대충 무슨 뜻인지 압니다. 도매상에게 휘둘리기 싫다는 말씀이겠지요. 우리같이 산에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품을 사 가는 사람이 여럿이면 좋은 일이지요. 산촌을 돌면서 약초를 매입하는 자들이 요즘 들어서 점점 목이 뻣뻣해지고 있었는데 좋은 경고가 되었으면 싶습니다."

    "제가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어서 생각만 많았지 제대로 일을 진행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르신을 만나서 모든 문제가 확 해결되어 버리니까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주콥을 만난 것이 큰 행운이었던 모양입니다."

    "별 말씀을. 오히려 주콥이 윌리엄 경을 만난 것이 행운이었겠지요. 경 덕분에 몸 성히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으니 가족 모두가 경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주콥의 부친과 나는 서로에게 감사와 덕담을 나누면서 우리가 한 배에 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중이었다. 산촌에서 직접 담근 다래주는 덤이었다.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을 때 예고도 없이 마을 회관의 문이 벌컥 열렸다.

    산골 특유의 시원하다못해 시린 바람과 함께 호리호리한 체격의 사람 하나가 잔치상으로 난입해 왔다.

    "촌장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노르캅의 약초는 저희가 모두 수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어떻게 지금까지 거래한 저희를 제껴놓고 쌩판 타지인에게 물량을 넘겨주시려고 합니까?"

    "할타. 무례하구나.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그렇지 외부에서 오신 손님까지 계시는데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지."

    "아니, 촌장님. 제가 여기서 어떻게 더 예의를 차릴 수 있습니까? 저도 상인들에게 약속한 물량이 있단 말입니다."

    "아, 거, 막내 처남 물량은 안 건드렸다니까!"

    "매형. 정말요?"

    "너네가 필요한 것은 꽃하고 잎이잖아. 윌리엄 경이 필요하신 것은 뿌리란다. 뿌리."

    "뿌리는 왜요?"

    "그걸 내가 알리?"

    "아! 매형 말로 하쇼! 말로!"

    그렇지.

    농촌에 사는 사람들, 알고보면 다들 일가친척이지.

    산골은 더 심하고.

    그러니 도매상의 약초 수집꾼으로 일하는 사람과 산골 마을의 촌장이 처남, 매부 지간인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어차피 다 같은 마을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할타 형.

    형이 여기서 왜 나와?

    여기가 형 고향이었어?

    약탈과 방화로 흔적도 남지 않았다는 고향이 여기였던거야?

    나는 속에서 떠오르는 말을 안으로 삼켰다.

    나는 그를 알지만 저 곳에서 매형과 투닥거리는 사람은 나를 모른다.

    나와 함께 보낸 시간이 그에게 없는 것이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고.

    생각해보면 달라벤 강은 칼마르 시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곳이었다.

    달라벤 강에 망루를 세우고 칼마르 시에 빨대를 꽂았지만 내 부하들은 결국 칼마르 시에 한 발은 걸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애초에 칼마르 시의 회유에 약할 수 밖에 없었다.

    욕도 잘하고, 뛰기도 잘 뛰고, 무엇보다 장물애비와 흥정도 잘 했던 과거의 부하도 마찬가지였다.

    고향마을의 약탈에 그렇게 분노했으면서도 여백작의 이름으로 사면장이 내려오자 토벌군의 길잡이로 편을 바꿨지.

    뭐, 당신만 그런 것은 아니었으니까.

    짜게 식은 눈으로 둘의 만담을 보고 있으려니,

    그제서야 내 시선을 의식한 듯 둘은 투닥임을 멈추고 멋적은 웃음을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윌리엄 경. 이 놈이 예의가 없이 커서 좀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나쁜 놈은 아닙니다. 노르캅의 약초는 이 놈하고 이 놈 친구가 대부분 모아들입니다. 지금은 칼마르의 약초 도매상을 위해 일하고 있지만 알아두면 나중에 쓸모가 있을 겁니다."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할타라고 합니다. 이곳 토박이입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할타의 뒤통수를 보니 그날이 생각났다.

    우리가 박살나던 날이.

    *

    "강도기사 윌리엄! 당장 항복하라. 항복하면 명예롭게 죽을 기회를 주겠다."

    "죽는 게 명예롭기는 씨팔. 엿이나 먹어라!"

    토벌군과 대치하자마자 투석기로 일방적으로 얻어맞다 보니 머리까지 멍한 것이 바보라도 된 기분이었다.

    망루를 둘러싼 목책은 박살이 났고, 나는 살아남은 부하들과 함께 수채의 외곽으로 밀려나서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수채 중앙에 있던 망루에 올라가서 저항하던 부하들은 고립되어 버렸다. 사다리는 투석기로 날린 바위에 정통으로 맞아서 박살이 났다. 게다가 화살도 떨어져서 망루를 허물어서 돌을 던져야 할 판이었다.

    적당히를 모르는 새끼들.

    도적을 흉내낸 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소꿉장난하고 있는 곳을 때려 잡겠다고 투석기까지 끌고 오다니.

    과연 칼마르의 여백작이 부자도 보통 부자가 아니라는 소문은 헛소문이 아니었다.

    "망루에 있는 너희 도적놈들! 손들고 내려와라. 순순히 내려오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그러나 계속 그 위에서 저항한다면 투석기로 망루를 부숴버리겠다. 투석기의 바위가 너희들 머리 위에 떨어지기 전에 항복해라!"

    투항을 권유하는 소음과는 별개로 잘 무장한 토벌군이 천천히 진군해서 수채를 점거했다.

    망루에 고립된 부하들을 위해 해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대장. 물러납시다. 이젠 방법이 없수."

    "망루에 아직 남아 있는데?"

    "그냥 저 놈들 운이 저기까지유."

    "아오. 젠장."

    내가 머리를 쥐어 뜯는 동안 망루 위의 녀석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더니 누런 팬티를 내걸었다.

    아마 백기라고 저걸 내걸었을거다.

    우리에게는 흰옷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니까.

    제발 토벌군이 저게 백기라는 것을 알아먹어야 할텐데.

    다행이 토벌군은 누런 팬티도 백기로 인정해줬다.

    나는 밧줄을 타고 하나씩 내려오는 부하들을 뒤로하고 후퇴를 결정했다.

    후퇴라고 하니까 뭔가 갈 데가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토벌군이 몰려온 달라벤 강에서 우리가 갈 곳은 없었다.

    다른 수적들도 공평하게 박살이 나는 중이었거든.

    귀족들과 손을 잡은 몇몇 수적들은 오히려 토벌군에 합류했고.

    그래서 산으로 갔다.

    우리에게 익숙한 강변의 갈대밭이 아니라 나무와 언덕 사이로 우리의 몸을 숨기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산에서도 토벌군을 피할 수는 없었다.

    작은 방패를 들고 짧은 도를 든 적이 나를 향해 돌격해 왔다.

    그의 뒤에는 긴 창을 가진 자가 내 몸을 노리며 기회를 엿보았다.

    방패가 부딪쳐 오는 순간 내 완갑으로 방패를 막으며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내 옆구리를 찔러오는 짧은 도 역시 아슬아슬하게 피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멀리서 던지듯 날아오는 창날은 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휙!

    오싹하는 기분에 옆으로 몸을 던졌지만 뺨을 긁고 지나가는 창날은 피하지 못했다. 얼굴을 뚫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몸을 산비탈에서 대굴대굴 굴리며 이렇게 죽는 것인가 하는 순간 가까운 거리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창을 들고 연달아 나를 찔러오던 적이 화살에 맞아서 넘어가자 방패를 든 자는 피리를 불면서 뒤로 물러섰다.

    "대장 빨리!"

    산에서도 평지처럼 잘 뛸 수 있다는 할타였다.

    나는 앞서서 뛰어가는 할타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달렸다.

    뺨의 상처같은 것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날은 그렇게 살아날 수 있었다.

    *

    그 때의 뒤통수가 바로 앞에 있는 것이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과거와 현재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웃는 가면을 깨지 않을 수 있었다.

    장사 하자. 먹고 살자.

    주문을 한 번 외우고 과거든 현재든 다 저 멀리 내 마음 어디 구석지고 어두운 곳에 밀어넣어버렸다.

    그리고 칼마르 시로 돌아와 보니 여백작의 새로운 약혼자가 정해졌다는 소문이 칼마르 시를 휩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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