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2화 (22/248)

22. 나, 그녀, 그들의 사정

나는 마차에서 일어났다.

로브를 입은 여자는 어느 순간 내 눈에서 사라진 후였다.

나는 왼손을 허리의 검에 대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흝어보았다.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감각.

내가 느꼈던 그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반투명한 미니맵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니맵에 나타나 있던 붉은 점도 사라져 있었다.

이런!

나는 당황한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다시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줄줄이 늘어 서 있는 마차들.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들.

오전 8시30분의 잠실역을 방불케하는 성문 근처의 혼잡함.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윌리엄 님? 무슨 일입니까?"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

"고함이라도 칠까요?"

"아니야. 내가 잘 못 본 것 같아.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주콥."

나는 X를 건드려서 상태창을 끄면서 자리에 앉았다.

상태창은 내가 속한 곳을 칼마르 시로 인식한 것 같다

그래서 칼마르 시에 적대적이고 위협적인 존재를 발견하자 미니맵에 표시한 것일 테고.

내가 이상하게 느꼈던 여자는 칼마르를 지켜보는 여러 세력 중 하나에 속한 존재였을 거다.

어쩌면 특별한 임무를 띠고 왔다가 돌아가는 스파이나 공작원 같은 존재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자신을 주시하는 나를 발견한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숨겼다.

심지어 미니맵에게서까지.

이게 가능한 일인가?

나는 내게 주어진 상태창이 신적인 존재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 시선 뿐 아니라 상태창으로부터도 자신을 숨긴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래.

인정해야 했다.

상태창은 만능이 아니다.

글자그대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형식일 뿐이다.

상태창을 지나치게 의지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리고 방금 나는 그 위험성 중 하나를 발견했다.

누군가는 상태창을 속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 상태창에 나타나는 정보들 중 일부는,

아마도 다른 사람에 대한 정보는,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했다.

젠장. 이거 진짜 신적인 존재가 준 것이 맞나?

나는 명제 하나가 무너진 기분에 투덜거리며 계속 떠오르는 이런저런 가설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껏 5년 돌아오게 해주고,

상태창까지 불량이라니.

이건 뭐.

······아닙니다. 언제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상태창도 잘 쓰고 있구요.

돌아와서 갖게 된 튼튼한 몸도 마음에 듭니다.

저를 이 곳에 보내신 분.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투덜댄 겁니다. 의미 없이요.

그러니까 뭔가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의외로 엉! 하는 것 같은 일을 겪을 때 그냥 홀리 쉿! 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렇다고 그게 진짜 신성한 똥덩어리를 어떻게 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잘 아시겠지만 이건 인간이 가진 언어적인 습관일 뿐이에요.

진지하게 받아들이실 필요가 전혀 없어요.

그냥, 이렇게, 이대로 지내게 해 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산촌으로 가는 길은 아직 출발도 하기 전이었다.

*

그녀는 성벽 위에 서 있었다.

높은 성벽 위에 다시 더 높게 쌓아 올린 전망탑에 기대고 서서 멀리 길을 따라 움직이는 마차를 보고 있었다.

꼬물꼬물 기어가는 애벌레처럼 구불구불 나아가는 마차에 그가 있었다.

어떻게 발견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방심한 그녀를 느꼈다.

그녀도 그가 자신을 발견했다는 것을 느꼈고 곧장 모습을 숨겼다.

처음에는 모습을 숨겼음에도 그가 자신을 발견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에 암기통을 손에 쥐고 불안에 떨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마음을 놓고 천천히 움직이면서 그에게서 멀어질 수 있었다.

그녀의 신비는 이번에도 그녀를 보호해줬다.

존재감을 지우는 것.

그것이 그녀의 신비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바로 옆에 있어도 그녀를 알아채지 못한다.

그녀가 움직이고 말을 걸어야 바로 옆에 그녀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계면쩍어 하면서도 고개를 갸웃한다.

그것은 어린 그녀가 폭력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쩌다가 접한 그녀만의 신비였다.

그리고 그 신비는 그녀에게 일용할 양식을, 그리고 가족을 주었다.

그녀는 암살단의 일원이 된 것이다.

아크후

형제들의 모임이라는 뜻을 가진 고대어가 그 암살단의 이름이다.

오래된 역사를 가진 암살단.

어쩌면 가장 오래된 국가보다도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곳.

그리고 대륙 곳곳에 거점을 두고 대귀족과도 거래할 정도로 인정받는 조직이었다.

이번 의뢰주는 제국의 선제후 중 하나인 글렌 공작이었다.

효율적이지만 인간미가 없는 자.

어쩌면 형제들과 가장 많이 닮은 귀족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형제들이 글렌 공작과 거래하는 것을 편하게 생각하는지도.

이번에 대지로 돌려보낸 목표물은 글렌 공작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다.

유쾌하고 말도 많고 노래도 잘 부르고.

아무 생각없이 인생을 즐기는 귀족가의 막내 아들, 그 자체인 자였다.

그러나 자비를 구하며 죽어가는 모습은 여타의 다른 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며칠 전에 그녀는 헐떡이는 짐승의 등에 단검을 찔렀다.

아주 깊이.

그러나 짐승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아니, 모든 생명이 그러하던가?

그녀는 비틀대며 일어난 목표물을 향해 단검을 그어댔다.

손을 내밀며 방어해보려던 목표물은 결국 허벅지에 칼침을 맞고서야 다시 쓰러져서 생명을 구걸했다.

구걸한다고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

구걸로는 빵 한 조각도 얻기 힘들었는데?

그러니 생명은 구걸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여. 사랑 받고 자란 짐승이여.

나는 너에게 생명을 주지 않겠다.

목표물의 생명은 형제들이 들어와서 뒷작업을 마무리짓자 곧 스러졌다.

벌거벗고 죽은 자에게 다시 옷을 입히다니!

쓸데없는 일을 한다 싶었지만 그게 의뢰주의 요구 중 하나였으니 성실하게 이행할 수 밖에.

그녀는 모든 작업이 마무리가 된 후 그때까지도 옷을 입지 못하고 있던 매춘부에게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아크후.

벌벌 떨고 있던 매춘부의 귓가에 속삭여준 단어였다.

그 단어는 매춘부에게 만약 네가 입을 다물고 있다면 네 가족은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들렸을 것이다.

그녀가 그 장소에서 걸어 나온 후 며칠 동안,

큰 소란이 있었다.

성문은 닫혔고, 경비병이 사방에 깔렸다.

환락가에 터잡고 살던 자들이 두들겨 맞으며 끌려갔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자는 일단 잡아가두었다.

그 중에는 그녀의 속삭임을 들었던 매춘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녀에게 같이 가자고 하는 자는 없었다.

소란이 가라앉고 성문이 열렸을 때

그녀는 경비대가 보이는 건물 사이의 그늘에서 일어났다.

도시를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도시를 떠나는 그 때에.

의미없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자신을 찾아낸 사람과 맞부딪친 것이다.

그녀의 등에 성벽의 한기가 스며들었다.

그가 탄 마차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온 후에도

그녀는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

처음에는 충격이었다.

다음에는 분노였다.

그래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안을 내놓았다.

"캘린. 네가 가야겠다."

플렌스 백작은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어조로 명령했다.

절대 반론은 안 받겠다는 태도가 역력했다.

가신들은 감히 입을 열지 못할 정도로 거친 분위기였다.

그러나 플렌스 백작의 둘째인 캘린은 백작의 명령 이면에 숨은 뜻을 알기에 동의 할 수 없었다.

"탈린이 말도 안되는 사고를 치고 뒤졌는데 제가 가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캘린!"

"가서 멍청한 놈의 시신이나 수습하고 여백작에게 사죄하라고 저를 보내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플렌스 백작은 입을 열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은 있다.

그러나 그 말을 입밖으로 낼 정도로 염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냥, 가신이나 아니면 눈치빠른 둘째라도 나서서 물꼬를 터 주었으면 하는 바램은 있었다.

그러나 부친의 속을 뻔히 들여다보고 있는 둘째는 플렌스 백작의 의도를 따라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미련을 버리십시오. 백작님. 칼마르의 여백작이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다행입니다. 칼마르의 여백작이 받은 모욕에 열이 받은 그녀의 기사가 지금 당장 이곳의 문을 부수고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칼마르까지 가서 탈린 대신 캘린은 어떻습니까라고 한다면 그 자리에서 우리를 향해 장갑이 몇 개나 날아올 것 같습니까? 장갑에 파묻혀 숨이나 쉴 것 같습니까? 제 실력으로는 마스터 요한의 제자는 커녕 경비 서는 기사조차 상대하지 못합니다. 포기하십시다. 다 끝난 일입니다."

"애초에 너를 보냈어야 했다. 막시밀리안 공작이 무슨 말을 하든지 신경쓰지 말고 너를 보냈어야 했어."

플렌스 백작은 씹어버릴 듯이 말을 했다.

그 말에는 캘린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기사로는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얼굴이 좀 반반하고 여자를 잘 꼬신다는 이유로 여백작의 남편감으로 내밀다니.

이 늙은이들이 정말.

막시밀리안 공작이든 자신의 부친이든 여백작을 만만하게 봐도 정도가 있지.

병신같은 후계자가 영지를 이어받아도 가신들이 유능하면 영지는 그럭저럭 굴러간다.

하물며 10년에 걸친 황제공위기간 동안 상업도시인 칼마르가 선제후들 사이에서 교묘하게 중립을 지키며 이익만 챙겨먹을 수 있도록 한 자가 지금 여백작의 선친이다.

그리고 통치는 홀로 할 수 없는 법.

지난 10년간의 줄타기가 가신들의 도움없이 이루어졌을리가 없다.

아무리 백작이 갑자기 죽고 제대로 준비가 안 된 여백작이 통치자가 되어서 뭔가 찔러볼 만한 상황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 능력 있는 가신들이 어디로 간 것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여백작은 이제 겨우 18살.

실무를 익히고 경험을 쌓아나가야 할 나이이지 통치를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당연히 통치는 가신들의 몫이지 않을까?

여백작을 목표로 바람둥이 기질이 농후한 탈린을 보내는 것 보다는 여백작의 가신들과 칼마르 시의 운영과 정치에 대해 논의 할 수 있는 나 같은 사람, 캘린을 여백작의 남편감으로 내세우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나이는 좀 많긴 하겠지만.

막시밀리안 공작의 소망을 위해서도 말이다.

그러나 캘린은 속에 있는 말을 삼켰다.

그는 자신의 속에 있는 말을 꺼낼 정도로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가문의 주인은 그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백작이 죽는다면 그의 형이 될 것이다.

답답했다.

"이미 늦었습니다. 기회는 지나갔고 우리에게 또 다른 기회는 없을 겁니다."

"그래도 뭔가 방법을 만들어야 해. 우리가 막시밀리안 공작의 손을 잡기로 했으니까. 그 동안 우리는 확실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덕분에 파벌 내에서의 우리의 처지가 별로 좋은 편이 아니라는 것은 너도 알 거다.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않으면 곤란해."

"우리가 막시밀리안 공작의 손을 잡은 것을 조만간 모두가 알게 될 겁니다. 칼마르와의 연결은 더 멀어진다고 해야 겠지요. 뭔가 진짜 큰 일이라도 벌어지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 더 이상의 기회는 없습니다."

"큰 일이라고?"

"예. 진짜 큰 일 말입니다. 이를테면 여백작의 새로운 약혼자도 암살당한다던가 하는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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