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1화 (21/248)
  • 21. 모욕을 당한 자는 복수를 꿈꾼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스캔들은 크게 체면이 깎이는 일이다.

    귀족의 약혼자가 바람을 피우다가 살해당하다니!

    그것도 그저그런 귀족이 아니라 상업도시의 지배자인 여백작의 약혼자가!

    물론 남성 귀족의 바람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양해를 하고 지나가는 면이 있다.

    법적으로 여자의 상속권이 존중되고 여성 귀족의 사회 활동에 대해 장려하는 문화가 있다고 해도, 이곳 신성 마르스홀룸 제국은 기사가 지배하는 국가였고, 법치의 기반에는 노골적인 폭력의 위협이 어른거린다.

    가부장적인 문화가 저변에 깔릴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남성 귀족의 일탈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한 쪽 눈을 감아주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여성 귀족의 일탈에는 자비가 없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지.

    여백작의 약혼자가 창녀촌에 가서 시비끝에 살해당하니!

    이것은 정도를 지나친 일탈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심한 일이었다.

    백작가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오물을 던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칼마르 백작가의 영향 아래에서 살아가는 평민조차 모욕감을 느낄 정도의 사건이었다.

    온갖 뜬소문이 나돌았다.

    여백작께서 충격을 받으시고 앓아누우셨다더라.

    여백작께서 분노하셔서 약혼자의 가문인 플렌스 백작가와 한 판 뜨셨다더라.

    이번에 살해당한 탈린이라는 공자는 원래가 바람둥이에다가 단골인 매춘부도 여럿이었다더라.

    탈린이 귀족답지 않게 화대를 내지 않고 가려다가 시비가 붙었다더라.

    탈린은 귀족가의 자제답지 않게 겁쟁이라서 시비가 걸리자 도망부터 쳤다더라.

    입이 달린 자들은 다들 한마디씩 끼어들어서 떠들어댔다. 그리고 소문의 방향은 점점 자극적이고 흥미위주로 흘러갔다.

    그러나 칼마르 백작가의 가신들은 뇌를 거치지 않고 내뱉는 식으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평민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분노한 상태였다.

    "시신에 난 상처로 본다면 검으로 등을 찔렸고, 폐를 관통했습니다. 이게 치명상이었습니다. 팔에 생긴 베인 상처나 허벅지에 생긴 찔린 상처는 저항하거나 도주 중에 생긴 것이고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도주에 실패한 것도 폐를 관통한 상처가 너무 심각해서 얼마 뛰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역시 암살입니까?"

    리네아 여백작의 질문에 수사를 담당했던 경비대의 책임자인 아렉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마도 매춘부와 함께 있었을 때 공격 당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발견되었을 때는 옷을 입고 있었지만 죽은 후에 옷을 입힌 것이 분명합니다. 시체의 상흔과 옷에 남겨진 흔적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공격 당했을 때는 옷을 벗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대놓고 증거를 들이민 셈이군. 암살했다는 것을 알아채라고 하는 짓이야."

    요한이 분기를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리네아 여백작은 냉정을 유지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질문을 이어나갔다.

    "범인은 잡았습니까? 누굽니까?"

    건조한 어조의 질문에 아렉슨은 이마의 땀을 자신도 모르게 닦아내었다.

    "그게. 범인이 탈린 경과 함께 있던 매춘부일 가능성이 큰데 체포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미 도주한 후이고 해당 업소에 온지 얼마 안 되는 자라서 주변에서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린드스톰이 끼어들었다.

    "탈린 경과 함께 있던 매춘부는 경비대에서 확보하지 않았던가?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던 건가?"

    "매춘부가 한 명 더 있었습니다. 잡혀온 자는 탈린 경을 상대하던 중이었고 옆에서 대기하던 자가 범인입니다."

    "그럼 한 번에 두 명을 부른 건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뭐, 이런 쓰레기 새끼가."

    린드스톰의 입에서 상스러운 욕설이 튀어나왔다. 언제나 점잖은 태도를 유지하던 그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탈린은 정식으로 약혼식을 올리기 위해 칼마르에 왔기 때문이다.

    원래는 플렌스 백작가의 사람들과 함께 왔어야 하는데 아름다운 리네아 여백작님을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다며 시종 몇 명을 데리고 먼저 출발했다고 한다.

    그런데 칼마르 시에 도착한 후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리기도 전에 환락가로 놀러 가 버렸으니 플렌스 백작가에서는 자녀 교육을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격앙된 장내의 분위기를 가라앉힌 것은 리네아 여백작이었다.

    "머리가 좆으로 가득 차서 생각이란 것을 하지 못하고 그런 곳에 갔는지, 아니면 나비가 꽃따라 가듯이 유인당했는지 그것도 아니면 납치를 당한 것이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되어서는 무엇이 진실이었는지가 중요한 것도 아니지요."

    모두가 입을 딱 벌렸다.

    평소의 여백작이 아니었다.

    냉철하고 예법에 충실한 백작가의 잘 키운 후계자 그 자체였는데.

    그런데 그런 분도 저런 단어를 입에 담으실 수 있구나.

    여백작은 가신들의 반응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열이 너무 올라서 이 표정없음이 언제 무너질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공격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협박입니다. 나에게 모욕을 주고, 칼마르 백작가의 평판에 흠집을 내고, 우호 세력을 잘라내는 기분 나쁜 도발입니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반드시 밝혀내야 하겠습니다. 아렉슨 경."

    "예. 백작님."

    "경이 책임을 지고 이 사건에 대한 모든 것을 관장하도록 하세요. 누구든 조사를 방해하거나 왜곡하려고 한다면 즉시 내게 알리세요. 보고서는 아무리 늦어도 한 달 내에 제출하도록 하시구요."

    "예. 백작님. 명하신 대로 이루어지시길."

    리네아 여백작은 회의실을 나올 때까지 무표정을 깨뜨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개인 공간으로 들어가는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주먹을 쥐고 벽을 향해 내질렀다.

    퍽!

    해머로 무른 벽을 치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리고 주먹을 중심으로 벽에 둥글게 균열이 생겼다.

    직경이 1m가 조금 안 되는 균열은 눈썹을 몇 번 깜박일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리네아 여백작을 따라 온 하녀들은 이런 일이 가끔 벌어지는 일인 양 당황하지 않고 곧장 청소에 들어갔다.

    손가락 마디 정도로 자잘하게 부서져 있는 벽돌 더미를 모아서 자루에 넣어서 나르고 먼지를 청소한 후 걸레질까지 깔끔하게 마치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 사이에 여백작의 나이든 시녀는 먼지 묻은 옷을 정리하고 여백작의 손을 다듬었다.

    "미안. 또 벽을 부숴버렸어."

    "전보다 부서진 구멍이 훨씬 커졌네요. 확실히 이 신비로운 힘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요. 그래도 스트레스 해소용 벽을 따로 세워둔 것은 정말 잘 한 일이었던 것 같군요. 부서진 벽은 오늘 중으로 수리하도록 하지요."

    "사라. 나 너무 열이 받아서."

    "잘하셨어요.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화가 안 난다면 여자가 아니죠."

    "응. 정말 화가 났어. 플렌스 백작가는 어디 들이밀 놈이 없어서 그 정도로 여자에 미친 머저리를 보낸 건지. 이것은 가까운 친족이 없는 나를 쉽게 보기 때문에 그랬을 거야. 그리고 그 머저리의 일족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칼마르를 쥐고 흔들려는 선제후들이야. 범인은 그들이겠지. 이 일에 끼어든 놈이나 안 끼어든 놈이나 다 똑같은 놈들이야. 다들 칼마르가 쌓아놓은 부가 탐이 나서 저 지랄들이지."

    "백작님! 말이 거치세요. 아무리 화가 났어도 품위 있는 단어를 쓰셔야 해요."

    "알았어. 사라."

    "어렸을 때부터 시장에 다니시던 것을 못하게 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그런 나쁜 단어는 배우지 않으셨을텐데."

    "에이 그건 아니지. 좋은 통치자가 되려면 평민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아야 한다고 해서 돌아다닌 거잖아. 아빠도 괜찮다고 하셨었고. 그리고 정체를 안 밝히기 위해 얼마나 조심했는데 그래."

    "알지요. 그래도 앞으로는 더욱 조심하셔야 해요. 백작가에 남은 사람이 정말 없어요."

    "알아. 그래도 머리를 쳐 박고 눈을 감고 있다고 해서 있는 위험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눈을 부릅뜨고 앞을 쳐다보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을 거야."

    "우리 아기씨. 완전히 어른이 되셨네."

    "사라 눈에는 아직도 내가 소공녀로 보이는 모양이야. 사라. 나는 어른이 되기 싫어도 어른이 되어야 해. 나는 진정한 칼마르의 백작이 되어야 하니까."

    리네아 여백작의 어머니 때부터 함께 했던 중년의 시녀, 사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칼마르의 백작님이 원하시는 대로 될 겁니다."

    * * *

    파웰 상단이 입은 막대한 피해와는 별개로 그들에게서 받을 돈은 받아야 했다. 다행하게도 파웰 상단의 본단은 이 정도의 피해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태도로 후하게 굴었다.

    그들은 내줄 돈은 내주고 보상해야 할 것은 보상하고 인사 치를 곳은 인사를 치르면서 실패한 상행의 여파를 최소화 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 역시 받을 돈을 정상적으로 수령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내 활약에 감사하는 의미로 별도의 감사금을 두둑하게 내주기까지 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이 정도로 자금을 모았으니까 더 늦기 전에 내 사업을 진행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 보면 다른 상단에 사업체를 넘기고 빠져 나와야 할 때 제 값을 받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나는 주콥과 함께 칼마르 시 주변에 있는 산촌으로 가려는 참이었다. 양질의 약재를 산지가격으로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항구에 자리잡고 있는 약재 도매상들이 담합이라도 한 것처럼 가격 흥정을 거부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윌리엄 님은 거래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제게 맡기시면 됩니다. 제가 산촌 출신이니까요. 일가 친척이 모두 그곳에 살고 있습니다. 원하시는 약재가 있다면 적당한 가격에 거래해 주실 겁니다. 윌리엄 님은 제 생명의 은인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도매상인들이 담합을 하고 있는 것 같던데, 혹시 폐가 되는 일은 아닐지 걱정이 되어서 말이지."

    주콥은 나와 전투를 겪고 난 후로는 나를 마치 상관처럼 대하고 있었다. 나보다 몇 살이라도 많은 사람이 그러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지나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주콥을 부하로 부리고 있었다.

    이 사람, 용병보다는 상인의 기질이 농후했다.

    "돈 내고 약재를 산다는데 폐는 무슨 폐가 되겠습니까? 오히려 이때다 싶어서 꿍쳐 둔 약재를 다 끄집어 낼 겁니다. 윌리엄 님이 도매상들보다는 가격을 더 쳐 주실 것 아닙니까?"

    "그건 당연하지. 못 보던 사람이 갑자기 새로 거래를 트자고 하는데 오랫동안 거래를 해온 상인들과 같은 가격을 원하면 도둑놈 심보겠지. 나는 그저 중간에 있는 누군가가 내 목줄을 쥐는 상황이 싫은 것뿐이야."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중간에서 잘 다리를 놓아드리겠습니다."

    "나는 주콥, 자네만 믿네."

    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을 거야.

    이런 중세풍의 세상은 하나의 거래 시스템이 자리잡으면 다른 시도 자체를 아예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서 말이지.

    만약 내가 평범한 기사A였다면 그냥 적당한 도매상과 거래를 텄을 거다. 그러나 이제는 나름 명성이 생겼기에 조금 더 이익을 추구해 보기로 한 것이다.

    도매상에게 원료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내 목줄을 도매상이 쥐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기도 해서 더 그랬다.

    그러나 만약 내 시도에 저항이 너무 심하면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각오하고 있다.

    아무래도 나는 외지인이니까 말이다.

    둘이 같이 탄 마차는 성문을 앞에 두고 천천히 움직였다.

    물류로 먹고 사는 상업도시답게 우리의 좌우로 많은 사람들이 나가기도 하고 들어오기도 하면서 물 흐르듯이 움직였다.

    그 때 뭔가가 내 감각을 건드렸다.

    이상한 기분.

    어두운 방 안에서 모기가 벽에 앉아 있는 것을 느낀 것 같은 기분.

    불을 켜고 확인을 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내 눈에 마차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여행자가 보였다.

    잠시 후면 성문을 나갈 사람이었다.

    몸 전체를 두른 펑퍼짐한 로브와 후드,

    등에 진 배낭,

    손에 쥔 지팡이.

    그냥 평범한 여행자였다.

    평범한 여행자치고는 상당한 미인이고 몸매도 그럴 듯했지만 말이다.

    그런 점만 제외한다면 칼마르 시 밖의 어느 가까운 촌락에 살고 있는 사람이 용무차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모습. 딱 그런 분위기의 사람이었다.

    뭐가 내 신경을 건드린 것일까?

    나는 천천히 기어가는 마차를 앞질러 걸어가는 여행자의 모습을 가만히 뜯어보았다.

    그 때, 내 시선이라도 느꼈는지 걸어가던 여행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여자였다.

    "평범하게 생겼는데요?"

    "응?"

    "윌리엄 님이 너무 뚫어지게 바라봐서 미인이라도 발견하셨나 했지요. 그냥 평범하게 생긴 여자군요."

    "그래. 그렇군."

    그런데 나는 왜 여행자가 상당한 미인일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몸매는 왜 근사하다고 생각했지?

    펑퍼짐한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생각 한 걸까?

    상태창.

    나는 마음 속으로 상태창을 불렀다.

    그리고 미니맵에 손가락을 얹었다.

    어!

    붉은 점이 눈 앞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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