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산적은 그냥 눈속임일 뿐.
전투 중에 고함을 지르면서 명령을 하거나 손짓으로 지시를 하는 자가 있다면 우선적으로 처치해야 한다. 선임 병사나 하사관, 어쩌면 장교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군대가 아니라 산적이라면 더욱 명확하다. 산적 따위에게 체계적인 지휘라인이 있을 리 없으니 저기서 고함을 지르는 녀석은 두목 아니면 부두목급이겠지.
남보다 훨씬 큰 덩치나 제대로 갖춰 입은 가죽옷으로 보아도 그냥 산적A 따위는 아니었다.
들고 있는 무기조차 커다란 도끼.
벌목하기 딱 좋아 보이는 모양새였다.
"주콥! 저 녀석 안면이 있는 놈인가?"
"징글징글한 놈이군요. 소금길이 끝나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산적패의 두목입니다. 알란이라는 놈인데 힘이 장사고 도끼를 잘 씁니다.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지난 상행에서는 통행세로 만족을 못했는지 약탈을 하겠다고 습격을 했었습니다. 그 때 피해가 꽤 컸는데 이번에는 임자를 만났군요."
"피해가 컸다는 습격이 저 놈 소행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소금길이 끝나려면 아직 한참 가야 하는데 의표를 찌른답시고 원정을 온 모양입니다. 멍청한 놈이군요. 산에서 내려온 산적이 무슨 힘을 쓸 수 있다고 여기까지 왔는지. 산에서야 자기 구역이니 날뛸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 낯선 평지에서는 그냥 평범한 도적놈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구역을 벗어나면 안 되는 겁니다."
나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눈 앞에서 고함을 질러대는 놈은 허우대고 그렇고 실력도 제법 있어 보였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내가 상대했던 자들, 강에 검문소를 세웠던 강도 기사 카알이나 소금상인 노릇을 하며 칼마르에 거점을 세웠던 밀염상 브람 등과 비교하면 모든 면에서 한두 등급은 떨어지는 자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자가 장거리 상행에 나선 파웰 상단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고?
자신들에 비하면 몇 배가 넘는 용병들이 호위하는 상행을?
믿을 수 없는데?
의문이 생기면 직접 물어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래서 나는 말안장의 옆에 끼워놓았던 쇠몽둥이를 꺼내 들었다.
칼로 내려치면 어딘가 잘리고 잘리면 피를 흘린다. 그렇게 피를 철철 흘리면 대화를 하기에는 별로 좋은 상태라고 할 수 없다. 쇼크로 죽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몽둥이로 패면 갑자기 죽은 일은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어딘가 부러지는 일은 있겠지만 저렇게 몸이 좋은 친구가 한두군데 부러졌다고 죽을 리는 없으니 마음 놓고 패도 된다.
그래서 준비한 쇠몽둥이를 꺼내든 것이다.
길이는 1,5미터 정도, 속을 비워서 튼튼하게 하고, 손잡이로 쓰는 쪽에는 소가죽을 팽팽하게 당겨서 몇 겹으로 감았다.
웬만한 사람은 이걸로 한대만 맞아도 할 말이 아주 많아지리라고 장담할 수 있다.
나무로 된 몽둥이가 아니라 쇠로 된 것이라서 좀 위험하려나?
뭐, 어차피 내가 맞는 것도 아니니까.
"일단 좀 맞고 시작하자."
나는 말에서 툭 떨어지면서 잠시의 여유도 두지 않고 알란의 몸통을 향해 쇠몽둥이를 휘둘렀다.
알란은 칼이 아니라 웬 시커먼 몽둥이가 자신을 향해 내려치는 것을 보고 다급하게 도끼 자루를 가로로 내밀어서 몽둥이를 막아갔다.
도끼 자루로 내려치는 몽둥이를 막고 그대로 도끼로 내갈길 요량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계획으로 끝나고 말았다.
물푸레 나무로 만든 탄력 있고 단단한 도끼자루가 단 일격에 부러져 나간 것이다.
부러진 도끼자루 사이를 거무튀튀한 쇠몽둥이가 가르고 지나갔다. 쇠몽둥이는 알란의 왼쪽 어깨를 강타했다.
*
알란은 생각했다.
칼이었다면 분명히 잘라졌을 것이다.
어깨 어딘가에서 잘라져서 팔은 바닥에 떨어지고 자신은 외팔이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태가 외팔이가 되는 것과 다를 것이 있을까 싶었다.
쇠몽둥이에게 한 대 맞은 어깨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얇은 얼음판을 밟을 때의 소리, 아니면 모래를 밟는 소리?
그것은 뼈가 명쾌하게 딱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아니라 뼈가 가루가 되는 소리였다.
알란은 엄청난 격통에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채찍으로 등을 맞아 반쯤 죽어나갈 때도 신음 소리 하나 흘리지 않던 자신이 애새끼처럼 비명을 지르다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문제는 통증뿐이 아니었다.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단 한대를 맞았을 뿐인데 왼팔이 시커멓게 죽어가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대로 놔두면 팔병신이 될 거야."
눈 앞의 용병이 당연한 이야기를 했다.
당신이 이야기 해주지 않아도 알아!
알란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도 손잡이가 부러진 도끼를 오른손에 든 채 간신히 버티고 섰다.
몇 명 되지 않지만 그래도 도망치지 않고 옆에 남아준 부하들이 있었다. 그는 부하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서 있는 것이 다였다.
아무래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눈 앞에서 쇠몽둥이를 들고 서 있는 놈은 자신이 상대할 자가 아니었다.
그 때 동아줄이 내려왔다.
"의사를 불러주지. 내 질문에 답변을 한다면."
알란의 시선이 바닥을 파고든 쇠몽둥이에게로 향했다. 잠시 갈등하던 그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는 부러진 도끼를 땅에 떨어뜨렸다.
"······뭐지?"
"지난 상행에서 습격했다는 산적이 너희들이라고 하던데 지금 이게 다가 아니지?"
"답을 하지 않겠다."
"그렇군. 역시 이게 전부가 아니었어. 너희들 말고 진짜가 따로 있었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소리냐!"
"바보냐? 답변을 거부했으니까 답변이 명확한 거지. 어쨌든 답변을 거부했으니까 약속대로 의사는 불러주지 않겠다. 알아서 스스로를 돌보도록. 그리고 너는 에단과 함께 칼마르로 가서 아는 바를 다 토해내야 할 거야. 네 뒤에 누가 있는지까지 모두 다."
"알면 감당할 수 있을까?"
"그거야 칼마르의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내 일은 너를 칼마르에 넘겨주면 끝이야."
"안 갈 거다."
"뭐?"
"칼마르에 가지 않을 거다."
"이 놈이 무슨 헛소리야?"
*
전통적으로 말 안 듣는 놈에게는 매가 약이었다.
나는 땅에 박아놓았던 쇠몽둥이를 잡았다.
그리고 그 때 알 수 있었다.
저 산적 두목이 왜 저 따위로 지껄였는지.
그에게 지원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말을 탄 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쇠몽둥이를 통해 느껴지는 진동은 그 규모가 작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
말을 탄 일단의 무리가 접근하고 있음을 눈치챈 사람들은 윌리엄 말고도 여럿이었다.
"어? 대장님 이거······"
"젠장. 순찰을 도는 놈들이 아니야. 비슷하기는 한데 틀려. 다들 산적 따위는 내버려두고 당장 짐마차로 돌아오라고 해! 그리고 미하우는 아직도 자기 마차에서 졸고 있나?"
이번 상행의 경호를 맡은 용병대장 바텍은 그의 예민한 감각에 걸리는 진동을 느끼며 고함을 질렀다.
그의 고함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용병대의 기수가 퇴각을 알리는 호각를 불기 시작했다. 그의 옆에 있던 부사수는 징을 쳤다.
삑~ 삑~ 징징징~ 삑~ 삑~ 징징징~
갑작스러운 집결 신호에 산적들을 때려잡고 있던 용병들이 다급하게 모여들었다.
"말했지! 조는 것이 아니라 명상하는 것이라고. 정확히는 내가 겪은 전투를 복기하고 가상의 상대와 상상으로 겨뤄본다고 몇 번을 이야기해야 하나? 그렇게 말했는데 또 잔다고 하고. 자네까지 그러면 다들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용병 하나가 어느 사이에 나타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나타났다.
그는 용병대장 바텍의 뒤에서 궁시렁거리기 시작했다.
"상상이든 뭐든 눈감고 앉아 있는 거잖아. 그럼 앉아서 자는 거지. 그건 그렇고 자네도 알겠지?"
"말 탄 놈들이 오는군. 적어도 30명은 넘겠는데?"
"자네가 느끼기에도 순찰 돌던 애들은 아니지?"
"이상해. 아니라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하기에도 자신할 수 없는데. 그래도 순찰 돌던 애들이 섞인 것은 확실한 것 같네. 바텍 대장."
"씨발. 어쩌면 이거, 그거 같지?"
"그게 뭔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아나."
"뻔히 아는 놈이. 소금길의 순찰 기마대가 칼을 거꾸로 들었다는 이야기를 내 입으로 해야 하나? 부정타게스리."
"뭐, 언젠가는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했지. 패터슨 그 작자가 워낙 음흉한 구석이 많아서 말이야. 그래도 용병대에서 예상한 것보다는 행동이 빠른데? 백작님께서 약혼하신다는 말에 튀어나왔나? 어쨌든 이번에는 내 몫이 좀 있을 것 같군."
쌍검 미하우의 등과 허리에는 길고 짧은 칼들이 걸려 있었다.
많은 사람의 피를 먹은 칼들이었다.
그 중에는 기사의 피도 여럿 있었다. 기사를 자처하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제대로 된 귀족가문에서 기사로 교육받고 서임까지 받은 제대로 된 기사의 피를 먹은 것이다.
용병대의 의뢰 수행 중 적으로 만나 벌어진 일이니 책임을 물을 상황은 아니었지만 귀족가의 원한은 단단히 살 정도로 중요한 기사들이었다. 명분과 상관없이 복수를 하겠다며 달려온 자들 또한 열 손가락은 넘었다.
그러나 미하우는 그 모든 어려움을 이 두 자루의 칼로 극복해왔다.
이번에도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저 친구 제법 하는데."
"이미 실적이 있는 자야. 얼치기 기사 정도는 우습게 볼 만한 자들을 여럿 잡았지. 객주 마틴의 줄을 타고 내려온 자답게 실력은 믿을 만해."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저 친구 집단 전투에도 일가견이 있어 보여. 기마병과 함께 산적들을 요리하는 것 좀 봐. 주콥이 데리고 있는 용병들이 쓸만한 기병이라고는 하지만 초보까지 배려해 줄 정도는 아니지. 저 친구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전쟁터에서 좀 구른 티가 나는데?"
"그럼 다행이지. 지금 우리는 쓸만한 손이 많이 필요해."
쌍검 미하우의 말에 바텍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반응을 보이며 멀리서 보이기 시작하는 흙먼지로 시선을 돌렸다.
소금길은 각 영지의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큰 도로를 의미한다.
처음 시작부터가 소금을 나르기 위해 길을 확장하고 관리했기에 소금길이라는 명칭이 붙었지만, 처음의 목적과 달리 지금은 온갖 물품이 소금길을 타고 움직인다.
소금길이 지나가는 영지의 입장에서는 전보다 더 중요해진 셈이다.
그래서 마차가 길을 따라 빠르게 움직이도록 길을 포장을 하기도 하고, 홍수가 나서 망가진 길을 빠르게 보수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영지마다 10~30명 정도의 말 탄 병사들을 동원해서 정기적으로 순찰을 돌고 강도를 퇴치하도록 하고 있었다.
연달아 이어진 산맥이 소금길을 막기 전까지의 구간에서 소금길은 정말 세심하게 보살핌을 받는 도로였다.
그런 소금길에서 무장한 기병이 40명 가까이 몰려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먼지가 가까이 다가오자 말을 타고 몰려오는 자들이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몇몇은 얼굴을 다 가리는 투구를 쓰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얼굴의 일부만 가리는 식이었기 때문에 알아볼 만한 사람은 충분히 알아볼 정도가 되었다.
말을 타고 오는 자들 중 몇은 분명히 바텍의 기억에 있는 자였다.
"맞군. 패터슨 남작이 거느린 병사로군."
"얼굴을 다 드러내놓고 있잖아? 패터슨 남작, 그 새끼가 미친 건가? 여기 있는 사람들의 입을 다 막을 수 없는 것이 뻔한데 얼굴을 까고 약탈을 하려고 들어? 이거 뒷감당이 가능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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