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미니맵은 치트키다.
브란돈은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용병 기사인 윌리엄이 한 말은 어떻게 이해를 해도 에단이 의심스럽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다.
에단은 브란돈이 직접 다음 세대의 간부로 키우는 인물이다.
만약 에단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다면 브란돈 역시 그 책임을 피하지 못하리라.
더구나 지금은 장거리 상행을 하는 중이고 에단은 브란돈의 손발이었다. 이번 장거리 상행의 계획에서 준비, 실행까지 모든 분야에 관여했다는 의미다.
브란돈은 믿을 수 없다는 감정과 만약에 대비해야 한다는 이성이 뒤엉켜서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브란돈은 역시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상인이었다.
파웰 상단의 상두들 중 하나로 올라가기까지 그가 겪은 수많은 일들 중에 이런 정도의 일이 없을 수가 없다.
다 겪어본 일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해결할 수 있다.
브란돈은 호흡 몇 번에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리를 식혔다.
그의 앞에 용병 기사 윌리엄이 있었다.
브란돈은 이 젊은 기사가 브람 상단의 선원들을 글자그대로 박살내는 것을 봤다.
박살.
깨버린다는 의미다.
때려 죽인다는 의미도 있다.
해적 겸 선원 겸 상인인 자들이 얼마나 막 나가는 자들인지는 같은 상인들이 더 잘 안다. 솔직히 말해서 칼마르의 항구에서 상품을 싣고 떠났다가 돌아오지 않은 배들 중에 브람 상단의 몫이 없다고는 절대로 말하지 못한다.
약해 보이면 약탈하고 상대하기가 좀 부담스럽다 싶으면 거래하는 것이 배를 몰고 다니는 상인들의 습성이다.
준비된 해적, 경험 많은 병사, 양심을 포기한 상인.
그게 배로 다니는 상인들을 보는 외부의 시선이다.
그런데 이 젊은 기사는 그런 선원들을 '박살'내 버린 것이다.
너무나 호쾌하고 일방적이어서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거금을 들여서 영입을 했다.
서임조차 받지 못한 일개 용병 기사에게 제시한다고 하기에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액수로 말이다.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번 장거리 상행은 아주 위험할 것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아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호위 용병을 구하는 계약도 힘들게 체결해야 했다. 추가금이 잔뜩 들어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 와중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신참자가 나타났으니 최선을 다해 영입한 것이다. 어차피 이번 상행에서 이익을 남길 것이라고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력은 믿을 수 있다.
그러면 이 사람 자체를 믿을 수 있을까?
적어도 상행에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윌리엄이 충격적인 말을 했을 때 브란돈은 자신이 겪어온 상인의 경험을 통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있었다.
브란돈은 윌리엄이 신뢰할만한 사람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적어도 계약을 두고 장난을 칠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요구했다.
윌리엄은 대답을 피하려고 했지만 브란돈이 볼 때 그 태도는 분명히 인위적이었다.
별로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당신이 설명을 원한다면 해주기는 한다라는 분위기가 베어나왔다.
그 정도를 눈치 못 챈다면 상인 따위는 때려치워야겠지.
그래서 브란돈은 강하게 압박할 수 있었다. 어차피 설명해 줄 테니까.
결국 브란돈은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만약 내가 이 상행의 책임자라면 에단은 칼마르로 돌려보냈을 겁니다. 그와 친하게 지내거나 연줄이 있는 자들과 함께 보내면 더 좋겠군요."
"그렇게 확신을 하십니까?"
"예. 기분이 더러워요. 이 더러운 기분을 풀어서 설명한다면 저 녀석을 그대로 방치하면 내가 다치겠는데? 라는 정도의 기분이군요."
이 세상에는 '신비'가 있다.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또는 이해할 수 없는 힘과 규칙이 존재한다.
'신비'를 이해하고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자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자들을 마법사라고 부르기도 하고, 무녀라고 부르기도 한다.
드루이드라고 부르기도 하고, 성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간이 가질 수 없는 힘을 다루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인간처럼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는 자들이 종종 튀어나왔다. 그런 자들일수록 더 강대한 힘을 사용했다.
그리고 '신비'의 편린에 맞닿은 자들이 있다.
어떤 계기인지조차 모르지만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 힘을 끌어다 쓰는 자들이 있다. 그 능력도 위력도 제각각이고, 뭐 이런 것을? 싶을 정도로 영 이상하고 쓸모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간혹 아주 유용한 자들도 있다.
브란돈 역시 그런 자들과 만난 적이 있다.
가벼운 상처를 고치고, 며칠 전 짐승의 흔적조차 추적하고, 땅 속의 광물을 꿰뚫어 보는 자들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런 자들 중 예언을 하는 노파를 만난 적이 있었다. 막연하고 뜬구름잡는 소리를 해댔지만 지나고 보니 그 노파의 예언은 매우 적중도가 높았다.
그래서 윌리엄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것은 윌리엄의 예지다.
브란돈은 그렇게 이해했다.
브란돈의 행동은 머뭇거림이 없었다.
즉시 에단을 소환해서 그와 동향이라서 친하게 지내던 마부와 함께 칼마르 시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본단의 상두에게 직접 전하도록 하게.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 안돼. 산에서 17번 상황이 발생했으니 즉시 조치해 줄 것을 요청한다고 하면 되네. 긴급한 일이니 최대한 서두르도록."
에단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명령을 복창하고 즉시 상단의 행렬을 떠났다.
상두가 본단을 향해 보내는 소식은 최대한 빨리 보내야 했다. 상두의 명령을 어겼을 때 가해지는 사적 제재는 가혹할 정도다. 심할 때는 죽는 경우조차 나온다.
그러나 지금 에단은 상단의 사적 제재를 걱정할 상태가 아니었다. 그가 얼굴이 하얗게 변한 것은 긴장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 두려움의 원인은 '산에서 17번 상황'이라는 브란돈의 언급이었다.
원래 상두가 본단을 향해 보내는 암호는 에단 정도의 위치라고 해도 알 수가 없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에단은 17번 상황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칼마르 백작가에서 일하는 누군가가 암호책을 보내준 것이다.
이 암호는 숫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숫자는 17번 상황, 1번 상황, 22번 상황 등 마음대로 만들면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숫자끼리의 합이다. 17번 이면 1+7 이니까 8이 된다. 22번 이면 2+2 가 되니까 4가 된다.
그렇게 나온 한자리 숫자는 이미 정해진 단어와 결합하여 암호표 상의 단어를 가리키게 된다. 이번 명령에서는 산이 된다. 즉 암호표에서 [산-8]에 해당하는 단어가 이번 명령의 핵심인 것이다.
상두들은 200개 정도 되는 암어표의 단어를 다 외우고 있다고 한다. 에단 역시 암호표를 보고 통째로 외웠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덕분에 에단은 브란돈이 본단에 전한 암호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배신자'라는 단어였다.
"마차를 돌려."
"에단? 무슨 일이야? 브란돈님 명령은 본단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면서?"
"들통이 났어."
"무슨 말이야?"
"본단의 파웰 상단에게 전할 암호를 풀어내면 '배신자'라는 단어가 돼."
"맙소사."
"거기다 우리 둘을 함께 보냈어. 눈치를 챈 거야. 다만 아직 확신은 없는 거겠지. 그러니까 고문이나 처형까지는 안 간 거야. 하지만 이대로 본단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무조건 감옥행이야. 살아서 나올 수 있을지나 모르겠군."
"미치겠네. 나는 칼마르에 가족이 있다고!"
"진정해. 일단 산으로 가자. 준비하고 있던 산적 쪽으로 가서 상황을 알려야 해!"
*
배반자 둘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에단이 이동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칼마르로 돌아가던 붉은 색의 점은 사람들의 눈을 피할 정도가 되자 방향을 정반대로 바꾸어서 칼마르가 아니라 상단의 진행 방향을 앞서서 움직이고 있었다. 제법 빠른 속력이었다.
"혹시 말입니다. 상단이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에 조심해야 할 곳이 있습니까? 지난 번에 습격을 당했다던가?"
주콥 조장은 내 의문을 간단하게 풀어주었다.
"당분간은 없습니다. 한 열흘 정도는 소금길을 지나니까요. 소금길은 도로 유지비조로 통행세를 납부하기 때문에 길 주변의 영주들이 신경을 써서 관리합니다. 과장이 많이 섞인 말이기는 하지만 혼자 다니는 상인도 안전하게 다닐 수 있다고들 하지요."
"그렇다면 소금길이 끝나면 문제가 시작되겠군요,"
"예. 소금길이 끝나고 일반 도로가 시작되는 바로 그곳에 파웰 상단의 골칫거리가 자리잡고 있지요. 이번에는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만약에 그 산적들이 소금길에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토벌당하겠죠. 소금길에서 걷는 수익이 제법 쏠쏠해서 소금길 주변의 영주가 절대로 내버려두지 않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금길은 칼마르에서 주변 도시까지 소금을 운반하다 보니 만들어진 길이다. 돈이 움직이는 길이니 영주들이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고 한다.
치안이 어지러워지면 다른 길로 소금을 운반할테고 그럼 소금 운반이 뿌리는 돈도 사라지니까.
경험 많은 용병조차 소금길은 안전하다고, 주변의 영주들은 소금길의 안정에 민감하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앞으로는?
글쎄. 그것은 산적을 향해 달려가는 저 붉은 점과 산적이 결정할 문제겠지.
어쩌면 소금길을 관리하는 영주도 함께.
에단이 돌아온 것은 불과 4일 후였다.
물론 혼자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다닥다닥 겹쳐서 숫자를 세기 곤란할 정도로 많은 붉은 점과 함께였다.
한 백 개는 되려나?
아마도 소금길이 끝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산적들일 듯싶었다.
파웰 상단이 오는 것을 기다리기 보다는 먼저 와서 덮치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파웰 상단의 짐마차들은 아직도 소금길 위였다. 4일 동안 이동한 거리라고 해봐야 50km를 좀 넘을까? 정말 느린 속도였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다.
수백 대의 짐마차가 줄지어 이동하고, 그 뒤를 또 수백의 사람들과 마차, 가축들이 따라간다.
일반적으로 보기 힘든 대규모의 이동이다. 군대가 이동할 때가 아니면 이런 모습을 보기 힘들다. 이동하는 속도가 느릴 수 밖에 없다.
기다리다가 지쳐서 먼저 찾으러 나올 판인데 파웰 상단이 눈치를 챈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테니 얼마나 마음을 졸이면서 달려왔을까.
파웰 상단이 미친 척하고 운송을 포기하고 그냥 돌아가버리면 나가리가 나는 것 아닌가 말이다. 파웰 상단이 운반하는 암염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그 꼴을 앉아서 보고 있지는 않으리라고 생각은 했다.
그래도 이렇게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달려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정말 절실한 모양인데?
나는 이제 움직이지 않는 붉은 점을 보면서 브란돈을 찾았다.
산적과 한 패인 용병들을 미리 처리하고 야습에도 대비해야 하려면 브란돈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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