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4화 (14/248)

14. 파웰 상단에는 배신자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상행을 취소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위약금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사소한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상행에 따른 이익 역시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상행은 이루어져야만 하고 칼마르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과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윌리엄 경에게도 초빙 요청을 했던 것입니다. 대우는 최상으로 해드리겠습니다. 용병 대우가 아니라 정식으로 서임을 받은 기사의 대우를 기준으로 해서 그 세 배를 해드리겠습니다."

무리해서라도 계약을 따내야 하는 상인의 제안이었다. 옆에 있던 젊은 남자가 놀라는 티를 숨기지 못할 정도로 파격적인 제안이기도 했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후한 제안이군요. 게다가 마틴 객주님께서 주선해 주신 일이니 믿을 수 있겠지요. 감사한 마음으로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에야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저 역시 윌리엄 경이 해적들을 상대로 위용을 보이는 것을 직접 봤습니다. 윌리엄 경 같은 분이 함께 해주다니 정말 든든합니다."

"별 말씀을.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아직 소개를 못 받았습니다만."

"에단이라고 제가 따로 가르치고 있는 젊은 상인입니다. 장차 상단의 기둥이 되어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에단입니다. 이번 상행에는 저도 따라갑니다.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예. 저도 반갑습니다. 저 역시 잘 부탁 드리지요."

그래, 잘 부탁해야지.

내가 너의 머리를 박살낼지도 모르는데.

이거 진짜.

이런 경우가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눈 앞에서 보니 기분이 또 새롭네.

빨간 점이라니.

미치겠군. 전투 중도 아닌데 빨간 점이라.

그럼 이 놈이 나를 적대시한다는 이야기인데.

혹시, 배반자?

나는 에단과 인사를 나누며 시야의 일부를 차지한 미니맵을 곁눈질했다.

최대로 확대해 놓은 미니맵의 중앙에는 빨간색의 점이 깜박이고 있었다.

에단이 위치한 자리였다.

미니맵이 주어진 것에 정말 감사하는 중이었다.

실제 상황에서 미니맵은 상상을 불허하는 치트키였다.

우리 편과 적을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게 해준다.

적이 붉은 색으로 표시된다.

원래 붉은 색이 경고라든가 위험을 나타내지 않던가?

이 곳도 지구와 다르지 않았다.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색이 가지는 의미가 변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겠지만, 피가 붉은 색인 이상 위험은 붉은 색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 추론은 샌드호그의 촌장과 그의 부하들을 통해 검증되었다.

그들을 미니맵에서 처음 보았을 때 그들은 붉은 색의 점으로 표시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처리했을 때 붉은 점은 사라졌다.

카알과 그의 부하들 역시 붉은 점으로 표시되었었다. 그리고 내가 속한 토벌단 중에는 붉은 점이 없었다. 내가 마음 놓고 목책을 들이 박은 것은 뒤가 안전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사망한 자들뿐 아니라 순순히 포로가 되어서 저항할 의지를 상실한 한 자들까지도 붉은 점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었다. 포로가 되었음에도 탈주할 의지가 충분만 자들은 여전히 붉은 색이었다.

그렇다면 붉은 점은 단순히 적이라는 의미일 뿐 아니라 적대할 의지가 충분히 있는 자라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엄밀하게 따지자면 적대할 의지라는 것은 매우 애매모호한 관념이다.

적대할 의지라니! 아니면 적대할 의사?

어떻게 표현을 하든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단어다.

이게 죽일 정도로 적대할 의지라는 것인지, 다치게 하는 정도는 상관이 없다는 정도인지, 아니면 그냥 저 놈은 나의 적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정도인지 어떻게 아느냐 말이다.

그래도 붉은 점이 가지는 정확한 의미는 천천히 사례를 쌓아가다 보면 알게 될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다.

아직도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을까 불안스럽기까지 한 상태창을 얻게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필요한 것은 사용 경험이겠지.

그렇다면 이번에 발견한 붉은 점, 에단이 내게 가진 의지의 정확한 의미는 어떤 것일지 탐구해보기로 하자.

장거리 상행이다. 시간은 많고 탐구할 사례 역시 에단이 유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저 녀석 왜 나를 적대하지?

그리고 과연 저 녀석 하나뿐일까?

내가 가진 의문은 곧 절반의 해답을 구할 수 있었다.

적대의 의미를 알 수는 없었지만 에단 같은 놈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마부가 둘, 상인도 둘, 용병은 셋.

백대가 넘는 마차와 3백에 달하는 인원. 거기다 따라온다는 자들도 거의 2백에 달한다고 한다.

그들 사이에 적대할 의지가 있는 자, 좀 세게 말한다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나를 죽일 의지가 있는 자가 7명인 것이다.

적은 수는 아니다.

그렇지만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아미 알고 있는 위험은 위험이 아니니까.

역시 미니맵은 사기였다.

이것만 있다면 암살 같은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배신한 부하라든가 다른 세력에서 심어놓은 세작도 단숨에 파악이 가능하다.

나는 닥쳐올 위험을 걱정하기 보다는 장거리 상행의 준비를 위해 무기를 좀 더 갖추고 갑옷을 손질 하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쓸 만한 도구들을 장만할 필요도 있고 말이다. 어쨌든 멀리 여행을 떠나는 셈인데 갖춰야 할 것이 적지는 않을 듯 했다.

거대한 교역 도시답게 쓸만한 대장장이와 가죽 장인을 구하는 것은 간단했다. 이럴 때의 문제는 돈이겠지만 달라벤 강의 토벌단에서 나온 돈과 파웰 상단에서 나온 선금 덕분에 돈도 풍족했다.

자급자족을 위주로 하는 시골의 조그만 장원에서 지냈고, 돈은커녕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는 곳에서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 그나마 돈을 좀 만졌을 때는 돈을 쓸 시간도 쓸 수 있는 장소도 없는 곳에서 싸움이나 하면서 굴러야 했고.

그러다가 이렇게 돈을 지불하기만 하면 곧장 서비스를 살 수 있는 대도시를 만나니 두뇌 속 어느 구석에서 죽어가던 현대인의 감성이 다시 살아났다.

자본주의자의 감성말이다.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지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좀 과하게 많은 무기와 예쁜 쓰레기로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가 되었다. 그제서야 뭔가 충족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일종의 치료였다.

소비를 통한 영혼의 치료.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행위였다.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정신이 맑아졌다.

양심의 거리낌과 전투의 피로감도 조금은 가신 듯 했다.

죽음의 충격은 아니었지만.

지금도 가끔 목이 잘릴 때의 기억에 흠칫하고 깬다니까.

시기에 딱 맞게 파웰 상단에서 연락이 왔다.

파웰 상단의 정기적인 장거리 상행이 시작된 것이다.

백여 대에 달하는 짐마차는 암염을 담은 나무상자로 짐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길게 늘어선 짐마차의 행렬은 그 자체로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파웰 상단의 장거리 상행에 동행하는 여러 상인들의 마차가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강도나 산적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파웰 상단과 같이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파웰 상단이 운용하는 용병들이 추가적인 사례금을 받고 같이 지켜주는 것이다. 그것은 1년에 4번 정기적으로 상행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관행이었다.

나는 행렬의 중앙에 배치되었다.

함께 배치된 10명의 용병과 함께 만약의 경우 자유스럽게 움직이며 지원하는 역할이었다. 용병은 모두 말을 가진 자들이었다.

기마용병은 상당히 드문 존재다.

짐말을 끌고 다니는 자는 종종 있지만 이렇게 전투가 가능할 정도로 준비된 기마용병은 영지전에서나 보거나 중대형 용병단의 간부들 중에서나 간혹 볼 뿐이다.

물론 기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정찰이나 기습에는 꽤 쓸모가 있는데다가 실력도 일반 용병과는 꽤나 차이가 난다.

기마용병까지 있다니.

역시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장거리 상행을 해온 상단답다는 느낌이었다.

"윌리엄 경은 이번에 처음으로 상행에 참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일 자체가 처음입니다. 그래서 좀 걱정하고 있지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저희를 믿으시면 됩니다. 모르는 것은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저희 늑대발 용병단은 정기적으로 파웰 상단의 상행에 참가하고 있거든요. 1년 4번의 상행 중 적어도 3번은 참가할 정도라서 가끔은 용병이 아니라 상단의 사병이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지요."

나와 함께 배치된 용병들은 모두가 한 용병단에 소속된 자들이었다. 몇몇은 휴식이나 요양을 위해 칼마르 시에 남았고, 용병단의 나머지 전원은 상행에 참가 중이었다.

그러니까 이들은 기마용병을 전문으로 하는 소규모 용병단인 것이다.

칼마르 시가 꽤나 규모가 있는 상업도시다 보니까 이런 용병단까지 유지가 가능한 모양이었다.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용병단의 단장인 주쿱이었다. 동시에 정찰조의 조장이기도 했다.

전형적인 경기병의 무장을 갖춘 그는 중년의 노련한 전사였다.

"용병단 전체가 말을 타는 것은 처음 봅니다."

"드문 일이기는 하죠. 그래도 모두가 말을 타니까 파웰 상단의 사병이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자주 상행에 참가할 수 있는 겁니다. 상단 직속의 사병들이 정찰을 나가지 못할 때 우리가 대신 나가니까요. 덕분에 이런저런 편의를 제공받고는 합니다만 그만큼 위험하기도 해서 말이죠."

"위험하다고요?"

"요즘 좀 그렇습니다. 원래는 갑자기 튀어나오는 마물 같은 것이나 신경을 쓰면 됐는데 요 몇 년간 점점 분위기가 안 좋아지고 있어요. 지난 번 상행 때 네 명이나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쉬려고 했는데 브란돈 상두가 하도 강하게 이야기를 해서 의리로 참가한 것이지요. 그리고 브란돈 상두가 이번에 굉장한 분을 세 분이나 초빙했다고, 걱정할 것 없다고 큰소리를 쳐서 참가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조금 안심이 되기는 합니다. 그런데 초빙한 분들이 어떤 분들이신지 알 수 있을까요?"

주쿱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의미의 미소가 떠올랐다.

실력은 있지만 아직 사회 경험은 미숙한 후배를 보는 표정이었다.

"일단 쌍검 미하우가 참가했습니다. 파웰 상단과 계약을 맺은 검은 곰 용병단의 간부인데 상행에 참가하는 일이 거의 없는 사람입니다. 평소에는 수련만 하면서 자기 집에서 나오지도 않지요. 기사로 오라는 귀족들이 여럿 있다는데 자유스러운 생활이 좋아서 용병으로 남아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마법사 피요트르 님이 계십니다. 불마법에서는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라는 평판을 가진 분이시지요. 그리고 윌리엄 경이 있습니다."

"예?"

"예. 윌리엄 경. 강도기사 카알을 이겼고, 얼마 전에는 기사급의 실력자를 둘이나 단숨에 쓰러뜨린 떠오르는 신성. 바로 제 앞에 계시군요."

"저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십니다."

"윌리엄 경은 스스로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소문의 절반만 되도 브란돈이 기를 쓰고 초빙할 실력이에요. 그러니까 헐값에 자신을 내놓지 마십시오. 윌리엄 경이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한다면 상인들은 우리들같이 애매한 실력의 용병들에게 윌리엄 경의 예를 들면서 가차없이 후려치거든요. 그러니까 아주 비싸게 받으세요."

주쿱은 웃으면서 충고했다.

당연한 말이다.

업계 톱이 이유를 막론하고 보수를 깎아서 받으면 그 아래로는 정당한 대우를 못 받고 한참 아래로 내려가면 보수를 아예 받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법이다. 보수를 깎아서 받은 이유 따위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보수를 깎았다는 사실만 중요하다.

주콥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은 세상 소문에도 밝은 법이다.

"주콥 조장. 혹시 에단이라는 사람에 대해 압니까?"

"에단? 브란돈이 데리고 다니는 에단 말인가요?"

"예. 맞습니다."

"그 사람 출신이 칼마르가 아닐 겁니다. 패트슨 남작령이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아요. 성격이야 그냥 상인 성격이고, 숫자 계산이 빨라요. 그래서 브란돈이 돈계산을 맡겼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여기서 미니맵 이야기를 꺼내면 미친 놈 확정인 것이다.

믿어줘도 문제가 된다.

분명히 내 머리를 열어보자고 덤비는 마법사가 나온다는 것에 새끼 손가락 정도는 걸 용의가 있다.

그러니까 누명을 씌우기로 하자.

"제가 늘 그런 것은 아닌데 눈치랄까 감각이 정말 좋습니다. 그리고 어쩌다 그런 감각이 사람에 대해 팍 꽂히는 수가 있어요. 그럴 때는 예측한 것이 대부분 맞더군요. 그래서 물어본 겁니다. 좀 그래서요."

"윌리엄 경. 좀 더 듣고 싶군요."

"저 역시 듣고 싶습니다."

굳은 표정의 브란돈이 거기에 있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