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3화 (13/248)

13. 나의 가치.

그리고 마틴은 내 의문에 선선히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윌리엄 경. 저는 윌리엄 경이 제 부탁을 받았을 때 그냥 무시하지 않고 승낙 여부를 한 번 정도는 진지하게 고려해 줄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겁니다."

"저를요? 왜요?"

"윌리엄 경은 자신의 가치에 대해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내 가치라구요?"

"그렇습니다. 용병 기사 윌리엄이 가지는 가치 말입니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은 평범한 기사가 겪은 소규모 전투에 국한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살 때에도 훈련은 이가 갈리게 해 봤지만 전투는 고사하고 주먹 싸움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치안이 좋은 선진국에서 사는 사람은 폭력이 낯설 수 밖에 없다.

내가 폭력에 익숙해 진 것은 암염 광산에서 강제노동을 할 때였다. 그리고 달라벤 강에 망루를 세우고 강도 기사로 이름을 날리며 날뛸 때 살인에 익숙해졌다.

그래도 나는 한 사람의 기사에 지나지 않았다. 살인 기계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일반인들보다는 뛰어나지만 같은 살인 기계들 사이에서는 평범한 그런 수준이었다.

그래서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는 개인이 가지는 가치에 대해 무지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양학이 가능할 정도로 날뛰는 것은 내게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하물며 나는 소속된 곳이 없는 프리랜서였다.

경험 많은 선임들이 이런저런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조언은 사실상 마틴이 처음이라고 해야 했다.

"윌리엄 경은 강해요. 그것도 아주 많이. 다른 사람을 압도할 정도로. 수적을 토벌할 때 기사였던 카알을 상대해서 이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기사들끼리도 실력차이가 있을 테니 실력 좋은 기사가 그렇지 않은 기사를 단숨에 제압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은 틀린 것이었습니다. 윌리엄 경. 내가 관여하는 거래의 절반은 항구에서 일어납니다. 그 곳에서 나는 봤습니다. 윌리엄 경이 싸우는 모습을. 나는 항구에서 윌리엄 경이 어떻게 싸우는지 내 눈으로 직접 봤습니다. 거대한 검을 든 자와 전투 망치를 든 자를 단숨에 박살내는 것을 봤습니다. 몰려오는 해적들을, 무기를 들고 살인에 익숙한 자들을 압도적인 위력으로 쓸어버리는 것을 봤습니다. 그 때 생각했지요. 내가 인간이 된 드래곤을 보고 있구나. 물론 진짜 그렇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경의 기세가 대단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윌리엄 경은 칼마르 시에 갓 도착하지 않았습니까? 섬기는 분도 소속된 곳도 없지 않습니까? 윌리엄 경의 선택지는 아주 넓습니다."

열정직인 마틴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틴. 진정하세요. 나를 높게 평가해 주는 것은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들은 많습니다. 당장 이곳 칼마르 시에도 검의 완성자 마스터 요한이 있고, 그의 제자들 역시 만만하지 않을 겁니다. 용병 중에도 검은 도끼 안제이나 쌍검 미하우, 삼연발 미에타 같은 이름을 들어 봤습니다. 좀 떨어진 곳이기는 하지만 플렌스 백작가의 첫 번째 검 대기사 와이즈로 경 역시 이름값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닌 존재까지 생각한다면 더욱 많겠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윌리엄 경의 가치가 높은 겁니다. 경은 이제 막 이름이 알려진 것인데 첫손가락에 꼽는 영지의 실력자나 오랜 기간 동안 이름을 알려온 실력 있는 용병과 같은 선상에서 거론되는 겁니다. 게다가 윌리엄 경은 묶인 곳이 없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계약하실 수가 있습니다. 상단은 그 점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혼란스러워도 상단은 움직여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마틴은 제가 상단의 호위역으로 합류하기를 권유하는 겁니까?"

"예. 그리고 이왕이면 이 두 상단 중 한 곳으로 가시는 것이 나을 겁니다."

마틴은 나에게 온 초청장 중 2개를 분류해서 내밀었다.

또 하나의 갈림길이 내 눈 앞에 놓여졌다.

칼마르 시는 일종의 중계 무역 기지 역할을 한다.

도시 곳곳에 공방이 있어서 자체적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것도 있지만 주력은 역시 운송 과정에 끼어들어서 중간 마진을 먹는 것이다.

좋은 항구와 달라벤 강, 그리고 동맹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든든하게 연결되어 있는 항구 도시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물론 도시의 공방 이외에도 칼마르 백작가에서 지배하는 칼마르 시와 그 주변의 영지에서 생산하는 상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칼마르 시 자체는 거대한 소비 시장이라고 해도 그 주변의 농촌에서는 식량과 목재, 약초 등을 생산한다. 좀 떨어진 산맥의 자락에서는 철과 구리가 난다.

그러나 상품으로 외부에 파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칼마르 시에서 자체적으로 소비하기조차 부족한 양이라서 언제나 공급 부족 상태이기 때문이다.

공방에서 나오는 일부의 상품을 제외한다면 칼마르 자체에서 외부로 매매할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하게 생산되는 것은 암염이 유일하다. 칼마르 시의 외곽에는 거대한 암염 광산들이 있고 암염 광산들에서 나오는 부는 칼마르 시의 반석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암염을 거래하는 상인들은 칼마르 시의 상인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 역시 일반적인 상인과는 궤를 달리한다.

소금 상인 중에는 백작가 소유의 암염 광산에서 소금을 받아다가 파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암염 광산을 소유한 자도 있을 정도다. 남작 정도 되는 귀족조차 부담이 되어서 쉽게 개발하지 못하는 암염 광산을 말이다.

물론 혼자서 전체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지분을 가진 것이기는 했지만 운영까지 도맡았기에 소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바로 그 상단을 방문하는 중이었다. 암염 광산을 소유할 정도로 능력있는 상단인 파웰 상단에 말이다.

"경도 아시겠지만 소금은 곧 금입니다. 하얀 금이지요. 질이 안 좋은 소금은 색깔이 있습니다만 파웰 상단이 소유한 암염 광산에서 나오는 것처럼 품질이 좋은 암염은 흰색입니다. 그래서 외부로 팔려나갈 때 꽤나 좋은 가격을 받습니다. 환금성도 좋아서 사실상 현금 취급입니다."

"골치 아프겠군요. 현금을 나르는 셈이니까요."

"경은 금방 요점을 이해하시는군요. 맞아요. 소금 상인은 짐마차에 현금을 싣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비슷한 것이 아니라 같은 겁니다. 누구나, 세상 물정에 어두운 자조차도 소금 상인의 짐마차에는 현금이 실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파웰 상단의 상두 중 하나인 브란돈은 내게 소금을 담은 나무상자로 가득 쌓인 거대한 창고를 보여주었다. 브란돈과 함께 온 젊은 남자가 나무상자를 열어서 그 안도 보여주었다.

내가 한국에서 보았던 소금 못지 않게 하얀 소금이었다.

그것이 이번에 운송해야 할 암염이었다.

"엄청난 양이군요."

"1년에 4번 장거리 상행을 합니다. 대형 짐마차 백대로 이루어진 행렬은 보는 것만으로도 장관이지요."

"마부부터 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렇기는 한데 정기적으로 다니는 것이라서 일할 사람이 부족해서 곤란을 겪는 일은 없었습니다. 미리미리 준비하니까요. 문제는 호위죠."

"뭔가 새로운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요."

"역시. 마틴 객주가 윌리엄 경은 보통 기사분과는 다를 거라고 하시던데 과연 그렇군요. 이리저리 문제가 생겨서 기존에 고용하던 호위로는 불안한 상황입니다."

황제의 자리가 10년째 공석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지방자치와 자력구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라고 하더라도 누군가 중심을 잡고 실무를 챙기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의 차이는 크다.

게다가 선제후들간의 신경전과 대리전은 필연적으로 치안의 불안을 불러왔다. 사소한 다툼이나 견제에 불과하던 초기와 달리 지금은 대놓고 엿을 먹으라는 식으로 지르는 경우가 상당했다. 서로 간에 감정의 골이 패이고 복수가 복수를 불러왔다.

이게 나중에는 전면적인 내전으로까지 발전한다.

현재는 그 여파가 물류가 흐르는 길까지 미치는 중이었다.

"칼마르는 기본적으로 중립입니다. 높으신 분들끼리의 갈등은 높으신 분들끼리의 문제니까 우리는 돈이나 벌겠다는 입장이지요. 그것은 칼마르 백작가가 대대로 지켜온 원칙이기도 합니다. 지난 10년 동안도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잘 지켜져 왔습니다. 주변의 귀족분들도 칼마르 백작가의 입장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요 1년 사이에 분위기가 급격하게 안 좋아졌습니다."

"선대 백작님이 서거하신 후로군요."

"그렇습니다. 윌리엄 경도 참전하셨던 달라벤 강의 수적 문제도 근래에 생긴 일이었지요. 다행히 덕분에 잘 해결되었지만 상단주께서는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뭔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한 조만간 비슷한 놈이 또 튀어나올 것이라고 예견하시더군요. 그도 그럴 것이 저희는 달라벤 강에서 근래에 생겼던 문제를 이미 몇 년 전부터 상행을 하면서 겪고 있었거든요. 초기에는 토벌을 하기도 했는데 매번 그 때뿐이어서 결국 적당한 타협을 하고 말았지요. 그런데 최근에는 통행세가 문제가 아니라 아예 약탈을 목적으로 덤벼드는 산적 패거리까지 등장해서 접전이 있기도 했습니다."

파웰 상단의 상두인 브란돈은 숨길 것이 없다는 태도로 상단의 속사정을 적나라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 정도로 속을 까뒤집어서 보여준다는 것은 정말 다급하다는 의미인데?

"그런데 문제는 약탈을 하러 습격해 온 자들이 진짜 산적인지 아니면 다른 귀족가의 사병인지 확신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산적이라면 기존의 호위로도 충분합니다. 파웰 상단과 장기 계약 중인 용병단의 실력이 그리 나쁘지는 않으니까요. 쌍검 미하우가 간부로 포진해 있는 곳입니다. 산적은 정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자들이 산적이 아니라 강도질을 하러 온 귀족가의 사병이라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갑니다."

"그렇다면 상행을 포기하면 되지 않습니까? 아무리 계약에 따른 위약금이 있다고 해도 상품을 잃고 사람까지 죽거나 다친다고 가정한다면 그냥 상행을 포기하는 것이 더 이익 아닙니까?"

"이익을 생각한다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상행을 강행하시려는 겁니까? 지금 하시는 말씀이나 해놓은 준비를 본다면 정상적으로 상행을 하시려는 것 아닙니까?"

"그게 참. 여러 가지 사정이 있습니다."

*

브란돈은 한숨을 쉬었다. 그 역시 상행을 멈추는 것이 이익임을 안다. 그러나 파웰 상단이 상행을 멈춘다면 얕잡아 보일 것이다.

파웰 상단이 아니라 칼마르 백작가가.

파웰 상단은 단순한 상단이 아니었다. 칼마르 백작가만 보유한 주변의 암염 광산에서 일부라지만 지분까지 가지고 있는 곳이다. 격이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칼마르 백작가와는 혈연으로 엮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외부에서 보기에 파웰 상단은 칼마르 백작가의 일부였다. 선대 백작은 파웰 상단을 가신 비슷하게 취급하기도 했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들은 파웰 상단이 칼마르 백작가의 판단에 따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상행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만약 폭력을 이유로 상행을 멈춘다면 그들은 폭력이 통한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어디까지 갈까?

약탈을 시도한 산적들이 귀족의 줄을 잡고 있고 그 귀족은 선제후 중 하나의 줄을 잡고 있다면 폭력에 약점을 드러낸 칼마르를 향해 무슨 짓을 할까?

부란돈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점을 천천히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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