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귀족의 의무
귀족의 집무실이라고 보기에는 제대로 된 장식품조차 없는 삭막한 공간이었다.
가구조차 장식 없이 최대한 기능성만 살려서 만들어서 그런지 차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없고 모든 물건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가구 위에는 먼지조차 하나 보이지 않았다.
탁자의 한쪽에 놓여 있는 화분이 이 공간의 유일한 일탈일 정도였다.
이 집무실의 주인은 효율의 추종자이고 결벽증의 소유자임이 분명했다.
집무실에는 창백한 안색의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몇 명의 남자들이 서 있었다. 서 있는 자들은 더욱 창백한 안색이었다. 당장 쓰러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그 동안 칼마르에 들인 노력은 허사로 돌아간 셈이군."
앉아 있는 남자의 무덤덤한 어조는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대답은 곧장 튀어나왔다.
"그렇습니만, 그래도 아직 손이 닿은 자들이 남아 있으니 소식 정도 듣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비집고 들어가기가 너무 힘들었는데 그 시간을 다 날리다니. 필요한 항구이기는 한데 칼마르 시 자체는 정말 골치덩어리군. 항구도시치고는 너무 폐쇄적이야. 같은 항구도시인데도 비스뷔와는 분위기 자체가 다른 것 같아."
"아무래도 주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에서 큰 차이가 나는 것이겠지요."
"그렇겠지. 비스뷔는 자치 도시니까. 오랫동안 통치해온 자가 있는 칼마르는 다를 수 밖에 없겠지. 그런데 칼마르의 후계자는 아직도 미혼인가?"
"예. 아직 미혼입니다. 구혼자가 몇 있기는 한데 무시하는 모양입니다."
"칼마르의 통치자니까 웬만한 자로는 눈에 안 차겠지. 아무리 급해도 격에는 맞아야 가신들도 납득을 할 테니까."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말에 스스로 납득을 했다.
창백한 안색의 중년 사내는 보고서를 계속 넘겼다.
보고서의 종류가 달라질 때마다 서 있는 사내들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안심하는 자와 불안에 휩싸인 자가 계속 변했다.
중년 사내는 갑자기 보고서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크리스토퍼가 자신의 무기를 빼앗기고 일격에 죽었다고?"
"그렇습니다. 교차 확인된 사항입니다."
"보고서에 나오는 '커다란 전투 망치' 이것, 크리스토퍼가 가지고 다니던 그 망치 맞나? 언젠가 숲오우거를 일격에 때려잡을 거라면서 특별 의뢰했다던 그것 말일세."
"예. 그렇습니다."
"말이 안 되는데. 크리스토퍼가 먼저 일격을 날리고 그것을 정확하게 맞추기까지 했잖은가. 크리스토퍼가 내게도 그 망치의 위력을 보여 준 적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막을 만한 게 아니었어. 그런데 그것을 검으로 막았다고?"
"그래도 그것이 사실입니다. 망치를 막은 검이 부서지기는 했지만 별 타격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검으로 막은 것 자체는 사실이라고 봐야 합니다. 목격한 자들에게서 교차확인까지 한 것이니 사실관계는 명확하다고 봅니다."
중년 사내는 입을 꾹 다물고 보고서를 계속 넘겼다. 점점 빨라지는 그의 손은 마지막 보고서를 내려 놓았다.
"혼자서 기사급의 숙련된 전사를 2명이나 상대해서 일격에 쓰러뜨린 후 그대로 돌격해서 30명이 넘는 선원들을 일방적으로 휩쓸어 버렸다니. 갑자기 어디서 이런 놈이 튀어나왔지?"
"알아보는 중입니다."
"구체적으로 알아봐. 이 정도면 이름있는 가문에서 천재를 데려다가 집중적으로 키워내도 쉽지 않아. 어느 가문인지, 누구에게 사사받았는지, 칼마르에는 왜 가 있는 것인지, 갑자기 왜 튀어나와서 칼마르 편을 든 것인지. 작은 소문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알아와."
"혹시, 영입하실 의향이 있으신 것인지."
"왜? 크리스토퍼가 걸리나?"
"아무래도 크리스토퍼가 인망은 많았던지라."
"할 일은 하늘에 닿을 정도로 많고 가야 할 길은 지금까지 온 길의 몇 배는 될 거야.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삐끗할 때 입을 손해는 상상이 안가. 그러니 인재는 보이는 대로 끌고 와야 해. 하지만 쓰고 버릴지, 계속 같이 갈지는 아직 몰라. 그러니까 일단은 그 자에 대한 것부터 알아오게."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알아오겠습니다."
중년 사내, 글렌 공작은 부하들이 모두 나간 집무실에서 인상을 쓰고 앉아 있었다.
되도록 좋은 주군이고 싶었지만 가끔은 밑에 놈들이 도를 넘을 때가 있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런 때였다.
물론 임무 중에 순직한 부하에 대해 책임감과 슬픔을 느낀다. 그러나 가문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적이라도 포용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부하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쓸만한 인재를 아예 처음부터 포기한다?
아무래도 물갈이가 필요할 듯싶었다.
좀 더 명령에 순종하는 자들로.
자신의 생각보다 가주의 명령을 우선시하는 자들로.
지금 보고하러 온 자처럼 말이다.
새로운 보고자가 공작의 앞에 섰다.
"가주님. 칼마르에서의 전언입니다."
"뭔가?"
"칼마르의 계승자, 리네아 칼마르 공녀가 약혼식을 올린다고 합니다."
"약혼을? 결혼이 아니라? 시간이 급할 텐데?"
의아해하는 글렌 공작의 말에 보고자는 설명을 이어갔다.
"약혼도 하지 않고 결혼부터 할 수는 없다라는 반발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먼저 약혼을 하고 몇 개월 후 결혼식을 올린다는 계획이랍니다."
"상대는 누군가?"
"플렌스 백작가의 삼남 탈린입니다. 나이는 20살이고 실력 있는 기사로 알려졌습니다. 상당한 미남이고 연애 편력이 화려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플렌스 백작가라면 막시밀리안 쪽 파벌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중립에 더 가까운 편이지. 그래도 이런 식이면 선택해야만 할 때 막시밀리안 쪽에 붙을 가능성이 더 크겠군. 약혼에 대해 리네아 공녀는 뭐라고 하던가?"
"가신들이 탈린을 후보자로 결정하고 공녀에게 알리자 이것은 나의 의무라는 취지로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백작위가 가지는 무게에 짓눌렸군. 어린 여자애니까 당연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럴 바에는 내 조카와 결혼하라는 제의를 받아들이고 마음이나 편하게 지낼 것이지. 검도 휘두를 수 없는 어린 여자애가 무슨."
글렌 공작은 코웃음을 치고 보고자를 물렸다.
그는 몸을 의자에 기대며 고개를 뒤로 들었다. 아무 장식이 없는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영주들이 회의를 간혹 들판에서 열 때가 있다.
마치 전투에 나선 군대처럼 들판에 천막을 치고 가신들은 갑옷을 입고 무장을 한 상태로 회의에 임한다.
영주 역시 갑옷을 입고 무장을 한 상태로 회의를 주재한다.
가신들의 지지가 필요할 때 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 역시 그대들과 같이 기사라는 점을 강조하는 행사다.
기사는 영주의 가장 강력한 칼이니까 절대로 놓으면 안되기에 벌이는 일이다.
무기를 가진 자에게는 잘 보여야 하거든.
그런데 칼 쥐는 법조차 아는지 의문스러운 여자애가 과연 제대로 된 충성심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싸우는 것으로 머리가 가득 찬 그 마초들에게서?
그 여자애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현실을 알 필요가 있을 거야.
게다가 내가 아니라 막시밀리안을 선택했다라......
좋아. 그렇다면 내가 그 약혼식에 찬물을 끼얹어 주지.
의무라는 것.
18세.
어린 여자의 감성이 현실과 부딪칠 때 과연 의무라는 짐을 버텨낼지 한 번 보자고.
글렌 공작은 줄을 당겨 집사를 불렀다.
* * *
많은 사람들이 항구의 시장거리에서 벌어진 사건을 목격했다.
즐길거리가 너무 없어서 교수형조차 축제처럼 즐기는 시대였다. 그러니 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진 전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는지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시장거리의 건물들은 기본이 2층이었고, 창고를 겸한 살림집을 들이기 위해 3층이나 4층으로 지어진 건물도 흔했다. 그 만큼 많은 사람들이 나의 전투 장면을 본 것이다.
모두가 자신이 본 것을 떠들었고, 보지 않은 자들도 본 것처럼 떠들었다.
사실 밀수나 인신매매를 일삼는 범죄 조직이 항구의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다가 경비대에 의해 공개적으로 토벌되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드문 것도 아니다.
칼마르 항구에 자리잡고 있는 시장거리의 사람들이라면 1년에 한두 번은 꼭 큰 규모의 난장판이 벌어져서 범죄자와 경비병이 쫓기는 쫓는 모습을 보곤 했다.
그렇더라도, 아니 그래서 더 이번에 자신들이 목격한 것이 충격적이었다.
"자네 봤나? 나는 봤어!"
"운이 없게도 못 봤네. 하필이면 우리 상회의 배가 막 도착을 해서 상품을 검수하러 가지 않았었겠나. 한참 상품을 검수하고 있다가 소식을 들었지. 경비병들이 몰려와서 브람 상단의 배를 압류하면서 배를 지키던 선원들과 싸움이 벌어졌었거든."
"정말 아쉽군 그래. 자네도 봤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런 장면을 난생 처음 봤다네. 정말 잔인하고 무서우면서도 사나이의 가슴을 뛰게 하는 그런 면이 있었지."
"글쎄. 규모가 좀 크긴 한 모양이지만 뭐, 상행을 하다가 보면 어쩌다 겪는 일 아닌가. 내가 강도와 산적을 만나지 못하고 마무리한 상행이 있기는 있었던가? 기억이 안 나는데? 도시에서 자리잡고 사는 사람들에게나 충격이겠지. 도둑이나 소매치기가 칼을 들고 날뛰지는 않을 테니까 말일세."
"아니야. 경비대가 소금장사꾼들을 때려잡은 것은 자네 말대로 우리가 어쩌다 겪는 일과 별 다를 바가 없었네. 익숙한 싸움이었지. 하지만 용병 기사 홀로 수십 명을 격파하는 것은 장관이었어. 나도 상행이라면 제법 다녔고 싸움이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겪었다고 자부하는데 그런 장면은 본 적이 없네. 홀린 것처럼 봤다니까. 거기다 힘은 또 얼마나 장사인지 거인의 피가 섞인 것은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였다네. 그 커다란 망치를 파리채 휘두르는 것처럼 휘두르는데 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야! 막아도 다 튕겨져 나가! 분명히 피가 튀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장면인데 어찌나 호쾌하고 시원하던지. 내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니까."
"그래? 어떤 사람인가? 용병 기사라고 하니 섬기는 귀족이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지?"
"자세한 것은 몰라. 얼마 전에 달라벤 강에 있던 수적들을 토벌할 때 마틴의 추천으로 참가했던 기사라고 하던데, 실력은 확실하다는 말이 있었거든. 그런데 실제로 보니까 확실한 정도가 아니었던 거지."
"마틴이라고? 그 객주 노릇하는 마틴?"
"그래. 마틴이라면 믿을 수 있지. 그래서 마틴에게 거간을 맡아달라고 한 상단이 몇 군데 있는 모양이야. 그 정도의 실력자는 정말 드무니까 말일세. 상행을 떠날 때 그런 실력자가 하나 있어주면 정말 든든하지 않겠나?"
"그렇지. 믿을 만한 실력자는 귀하고 또 귀한 존재지."
*
믿을 수 있다니.
내가?
아니 이 사람들이 나를 언제부터 봤다고 믿을 수 있고 실력이 뛰어난 용병기사 취급인 걸까.
나는 하루가 멀다하고 들어오는 제안을 보고 황당함을 느꼈다.
소소한 선물과 함께 도착한 제안이랄지 초청장이랄지 애매한 문서는 하나같이 나에 대한 칭송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실력이 뛰어나고 믿을 수 있는 용병 기사라며 자신들의 상행에 합류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중심이었다.
'실력이 뛰어난' 이라는 평판은 나 자신이 직접 도적이나 해적들의 머리를 깨가면서 얻어낸 것이고, '용병 기사'라는 신분은 아직 서임을 받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종자나 수습기사로 부르기에는 너무 실력이 뛰어나니 적당히 타협한 호칭일 것이다.
실제로 인맥이 없어서 서임을 받지 못했지만 실력에 자신이 있고 무장을 갖출 만한 재력이 있는 자들이 스스로를 용병 기사로 자처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그냥 용병보다는 용병 기사가 더 몸값이 높으니까 말이다.
용병 기사.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타이틀인 것이다.
그러나 '믿을 수 있다'는 평판은 뭔가 말이다.
칼마르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되는 외지인이고 유명한 가문 출신이 아니니 보증해 줄 만한 사람도, 가문의 이름도 없다.
게다가 내 기억 속에만 남은 사실이지만 한 때는 칼마르 시에 빨대를 꽂고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도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래서 칼마르의 상인들이 나를 믿을 수 있다고 하는 말에 뭔가 배덕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기도 하고.
물론 왜 이런 평판이 포함이 된 것인지는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마틴 덕분이다. 그가 객주로 쌓아온 신용에 기댄 평판이다.
즉, 마틴이 거간하는 용병 기사니까 믿을 수 있다라는 보증인 것이다. 만약 내가 사고를 친다면 마틴이 배상 할 것이다. 설사 계약서가 없더라도 말이다. 그게 암묵적인 규칙이다. 만약 마틴이 배상을 거부한다면 마틴은 자신의 신용을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은 내게도 부담이었다.
마틴은 내가 카알을 토벌하고 돌아온 이후로 지나칠 정도로 호의적이었다. 결투 재판 건도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느낌에 거절하기는 했지만 그 자체로는 꽤 그럴 듯한 제안이었다.
마틴은 나에게서 호의를 사고 싶어하는 것이 분명했다.
왜 그러는 것일까?
나는 마틴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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