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1화 (11/248)
  • 11. 평판과 명성

    나는 가지각색의 다양한 무기를 가지고 달려오는 선원들을 향해 전투 망치를 휘둘렀다.

    손을 바꿔가면서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현란한 움직임이었다. 전투 망치가 만드는 원은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선원 사이를 누볐다. 선원들은 전투 망치의 공격을 제대로 받아내지도 못했다.

    나무 방패는 스치자마자 그대로 박살이 났고 철로 된 방패는 방패를 든 사람의 팔을 부러뜨렸다.

    칼로 내리치고 창으로 찔러오는 자들은 자신의 무기와 전투 망치가 부딪치는 충격을 못 이기고 놓쳐버렸다. 무기가 부러지기도 했다.

    파괴의 원을 피하려고 하다가 상체를 얻어맞고 그대로 엎어지는 자들도 속출했다.

    단 한 명에게 30명이 넘는 선원 겸 해적들이 일방적으로 몰렸다.

    누구도 나의 전투 망치를 멈추게 하지 못했다

    심지어 화살조차.

    "쏴! 쏴 버려!"

    선원들의 뒤쪽에서 발작적인 고함이 들렸다.

    활을 챙겨온 몇 명의 선원이 그 소리에 반응하듯 시위를 당겼다.

    화살이 공기를 갈랐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나를 향해 화살이 날아왔다.

    그러나 화살 역시 다른 무기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망치가 만드는 원은 화살 역시 박살을 냈다.

    눈이 날카로운 사람이라면 날아올 것이라고 알고 있는 화살 정도는 충분히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막아내는 것은 한 차원 더 높은 수준이다.

    나는 지금 평소와 달랐다.

    맹세코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회귀 전의 나라면 이렇게 할 수 없다.

    그것은 분명했다.

    이런 무지막지한 전투 망치를 실전에서 휘두르는 것도, 화살을 보고 막는 것도 다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금은 가능했다.

    살짝 열이라도 오른 것 같은 이 상태는 주변의 먼지 하나하나까지 셀 수 있을 것 같은 고양된 감각을 선물했다.

    이 고양된 감각.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은 아슬아슬함.

    그러나 한 편으로는 오랫동안 훈련해서 내 것으로 만든 것처럼 편안한 움직임.

    내가 끝내기 전에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투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선원들의 대열을 종단하고 말았다.

    나의 뒤에는 부러지고 박살난 병장기들이 버려져 있었다.

    깨어지고 부러지고 으깨진 선원들이 쓰러져서 신음하고 있었다. 아니,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은 행운아였다. 절반이 넘는 사람들은 그조차도 불가능했다.

    나는 그제서야 고양된 감각에서 천천히 벗어나고 있는 자신을 자각할 수 있었다. 주변의 먼지 하나하나까지 구별하고 찍어낼 수 있었던 감각이 공격해 들어오는 병장기는 잡아낼 수 있는 정도로 가라앉았다.

    나는 전투 망치를 옆으로 내려 들면서 내가 지나온 길로 몸을 돌렸다.

    망치 머리에서는 피가 뚝뚝 흘러 떨어졌다. 살점과 머리카락이 아직 망치 머리에 붙어 있었다.

    거대한 전투 망치는 그것을 휘두른 나 자신보다 더 위협적으로 보였다.

    나는 다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구원을 위해 달려온 선원들이 실패한 순간이었다.

    *

    브람은 기사와 대치하는 와중에도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았다.

    이제는 가망이 없었다.

    부하 모두를 이끌고 후퇴하는 것은 이제 포기해야 했다.

    살 수 있는 사람이라도 살아야 했다.

    "도망쳐라! 형제들이여. 도망쳐!"

    브람은 비통한 감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을 들을 수 있는 자들이 짧고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세 번 연달아 울렸다. 그리고 그 휘파람 소리를 들은 자들 역시 휘파람 소리를 세 번 연달아 울리며 움직였다.

    브람의 명령이 휘파람으로 변해서 가장 멀리 있는 부하에게까지 전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지금까지 어떻게든 대열을 이루고 서로를 의지하며 싸우던 브람의 부하들은 명령을 받자마자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일부는 근처의 건물로 뛰어들어가고 일부는 포위망의 빈틈을 찾아 달리기도 했다. 그 중 가장 간이 큰 자들은 내가 선원들을 쓸어버린 그곳으로 향했다. 선원들이 온 길을 되짚어 가려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브람도 있었다.

    그러나 브람은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너! 너는 내가 반드시 죽인다!"

    *

    상단주 브람은 눈이 뒤집혀서 나를 향해 달려왔다.

    브람을 견제하던 경비대의 기사가 브람을 놓치는 바람에 벌어진 사태였다. 브람의 부하들이 몸을 던져서 기사의 추격을 막았기 때문에 기사는 어어 하는 사이에 브람을 놓치고 말았다.

    브람은 자신의 거대한 검을 쥐고 끌어당겼다. 그 상태로 내게 들이 박았다. 마지막 순간, 검을 힘껏 내밀면 나를 꿰어버릴만한 거리가 되는 순간 벼락같이 검을 내질렀다. 마치 창을 쓰는 것 같은 몸놀림이었다.

    나는 다시 전투 망치를 잡고 브람을 향한 참이었다.

    브람과 그 사이에 있는 먼지를 볼 정도는 아니지만 그 사이에 있는 병장기가 움직이는 궤도는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전투 망치의 머리가 검끝과 부딪쳤다.

    불꽃이 튀고 검이 휘었다.

    잔뜩 인상을 쓴 브람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지는 순간,

    검이 부러졌다.

    고맙다. 크리스토퍼.

    네 망치 정말 쩐다!

    만약 질이 좀 떨어지는 쇠로 전투 망치를 만들었다면 진작에 깨졌으리라. 통짜 쇠로 만든 자루가 아니었더라도 진작에 부러졌을 것이다.

    크리스토퍼가 질이 좋은 무기를 가진 덕분에 나는 편하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브람이 부러진 검을 쥔 채 태클이라도 걸 듯이 내게 돌진해 들어왔다. 순간 나는 브람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브람은 곰 같은 사나이였다.

    주먹 한대쯤은 웃으면서 맞아줄 수 있는 맷집의 남자였다.

    그러나 내 주먹은 지금까지 브람이 겪었던 그 어떤 주먹과도 차원을 달리하리라.

    단 한 대에 눈에서 빛이 사라지고 손발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비틀거렸다.

    "역시. 브람 상단주. 이걸 버티네. 이래서 내가 져 줬던 것 같아. 그 때는 도저히 답이 안 나왔거든."

    나는 브람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다시 한 번 주먹을 날렸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정신이 날아갔다.

    눈이 완전히 맛이 가버린 채 옆으로 쓰러져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쓰러진 브람은 내 포로가 됐다.

    포로가 된 것은 브람 뿐만이 아니었다.

    브람의 부하들이 도망을 선택했을 때 경비대는 오히려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도망치는 범법자를 여러 명이 몰이하듯 잡는 것은 경비대의 특기 중의 특기였다. 평소에 늘 하던 일이 그것이었으니 말이다.

    상부의 지시는 명백했다.

    되도록이면 산 채로 잡을 것.

    팔 다리가 없어도 말만 할 수 있다면 상관없음.

    포로들에게서 알아볼 것이 많다는 의미였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자는 여기에 아무도 없었다.

    혹여라도 너무 대놓고 죽인다면 입막음이 아닌가 의심하는 자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경비병 정도면 윗선이 어떤 분위기인지 정도는 알아볼 만한 인맥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은 조심해야 할 시기였다.

    그러니 지금까지는 사실상 전투를 치른 것이나 다름이 없어서 상부의 지시를 따를 겨를이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상부의 지시를 따라 포로 획득을 위주로 해야 했다.

    그래서 브람이 각오했던 것처럼 많은 희생이 나오지는 않았다.

    몇 명은 탈출에 성공했지만 거개는 칼마르 경비대의 포로로 잡혔다. 특히 선원들은 배와 함께 모조리 억류됐다.

    그것으로 짧은 전투는 끝났다.

    그리고 나는 내 자신의 평판이 단순히 소문이 아님을 많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증명했다.

    무기를 들고 덤비는 30여 명의 선원들을 혼자서 압도해 버린 나에게 아직 서임을 받지 못한 기사 훈련생이나 종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이름의 뒤에 정중하게 경을 붙이며 존경을 표하기 바빴다.

    내게도 명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명성은 나를 또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 * *

    신성 마르스홀롬 제국

    대륙 유일의 제국

    5백년간 이어진 위대한 제국

    대륙 문명의 중심은 신성 마르스홀롬 제국이 성립된 이후로 언제나 제국이었다.

    대륙의 상당 부분과 주변의 섬에 왕국들이 산재해 있기는 하지만 대륙의 역사에서 그들은 언제나 주변인에 지나지 않았다.

    지배하고 공격하고 교류하는 주체는 언제나 신성 마르스홀롬 제국이었다.

    그 제국을 지배하는 자들은 8가문이었다.

    그리고 제국의 황제는 8가문의 대표자들이 뽑았다.

    8명의 선제후가 그들이었다.

    황제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가문을 대표하는 자들.

    선제후들은 공개적인 지지를 통해 누구를 황제로 선출할 것인가를 결정했다.

    선출된 자는 황제가 되어 귀족들로 구성된 원로원의 조력을 받으며 제국을 통치했다.

    그러나 황제의 관은 세습되지 않는다.

    황제가 서거하면 선제후들 사이의 합의에 의해 새로운 황제가 뽑히는 것이다. 하나의 가문에서 몇 대에 걸쳐 황제를 독점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3대를 넘기는 경우는 극히 예외였다.

    마르스홀롬 제국이 세워지고 대략 3백년이 지나고부터 이어진 이 제도는 가끔 삐그덕 거리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제대로 기능을 했다.

    가끔 병신 같은 황제가 나오기도 하고, 어쩌다 미친 것 같은 황제가 나오기도 하지만, 대개는 무난한 황제가 선출되어 무난하게 통치했다. 어쩌면 통치를 흉내 낸 방치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선제후들의 노력과 선택 덕분이기도 했다.

    어떤 선제후도 자신의 목을 쥐고 흔들 강력한 황제를 원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만약 그럴만한 가문이 등장하면 나머지 선제후들은 암묵적인 담합과 견제를 통해 자신들의 뜻을 표명했다. 그러면 그럴만한 가문은 머지않아 가문의 인재와 부를 잃고 다시 선제후들 중 하나로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사실 황제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뜻만으로 제국을 이끄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 가문이 마음대로 통치하기에 제국은 너무 복잡하고 거대했다.

    8명의 선제후를 정점으로 하는 귀족들은 계약과 맹세, 관습을 통해 복잡한 위계질서를 형성했고 그것은 몇 개의 거대한 귀족 집단으로 분리되었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지를 가지고 영지 안에서는 왕처럼 행세했다.

    그리고 그 안에 자유 도시, 자치 도시, 반독립적인 영지를 가진 단체, 칙명에 근거해 세워진 단체, 비밀 결사 등이 또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의 권리를 순순히 포기할 자는 없었다. 설사 황제가 명령하더라도 자신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면 일단 고개를 쳐들고 볼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는 것보다 목숨을 빼앗기는 것이 더 낫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자들도 많았다.

    그들에게 황제는 제국 통합의 상징에 지나지 않았고, 8명의 선제후는 멀리 사는 웃어른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10년이나 황제가 선출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를 겪기 전까지는.

    그리고 욕망에 복종하는 인간이 어디까지 막 나갈 수 있을지 모를 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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