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기억과의 만남.
"제 위치를 지켜라! 진형에 끼어드는 놈은 찔러버려!"
모두에게, 도망치는 자들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기사가 크게 외쳤다.
그래도 겁에 질려서 도망치는 사병 몇 명이 경비대가 진형을 이루어 길을 막고 있는 곳으로 밀고 들어갔다가 불문곡직 그대로 목이 잘렸다.
그제서야 잠깐의 비이성적인 공포가 잦아들고 사병들이 정신을 차렸다. 브람은 사병들을 다시 밀어붙여서 공포에 빠뜨리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경비대 사이에 기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경비대 사이에서 대기하던 기사는 자신의 말을 몰아 브람에게 달려들었다.
상인이라면 살이 찌고 배가 나온 사람을 연상하기 쉽다. 아무래도 보통 사람보다 잘 먹을 테고, 돈과 상품을 다루는 일이 주가 되다 보니 몸을 쓰지 않으리라는 편견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그런 편견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었다.
이들은 암염을 운송해서 파는 상인들이었다. 거기다 밀염까지 매매한다. 치안도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먼 거리를 돈이 될 만한 상품, 아니 돈 그 자체를 가지고 이동하는 것이다. 이들은 상인이면서 용병이고 선원이며 가끔은 약탈자가 되기도 한다.
시장에서 흔히 보는 친절한 상점 주인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상인인 것이다.
브람은 상단주 답지 않게 실력도 이곳에 있는 상단 사람들 중에서 제일이었다.
거대한 도를 몸의 일부처럼 다루면서 연달아 사병들을 썰어대는 실력을 보면 기사라도 상대하기 버거운 수준이다.
브람의 뒤를 따라가며 손을 보태던 크리스토퍼는 자신이라도 정면으로 상대하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이 놈!"
브람을 향한 기사의 공격은 의미가 없었다.
너무 짧았다.
지금 칼마르의 기사는 창을 가져오지 않은 상태였다. 휴대한 기사용 검과 활이 그가 가진 무기의 전부였다.
그가 가진 무기로는 말을 타고 방어선을 돌파하며 주위의 적들에게 검을 휘두르거나 도망가는 적들에게 검이나 활로 공격하는 것이 가능할 뿐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그 정도면 충분했다.
기껏해야 간첩 혐의를 받는 상인들을 잡아오는 임무였고, 그 임무조차 면피하기에 급급한 상인들이 제공하는 사병이 다 해치울 참이었다.
주군을 지키려는 기사들처럼 필사적으로 날뛰는 적을 상대한다는 것은 상정 밖이었다.
그래도 말을 탄 기사였다. 무기탓을 할 수는 없었다. 저런 기형적인 대검을 들고 날뛰는 상인 따위는 밟아 죽일 수 있어야 했다.
그런 것도 하지 못한다면 기사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까?
기사 서임을 해줄 귀족을 찾기 못해서 선배 기사에게 기사 서임을 받은 모지리도 아니고 칼마르의 백작에게 기사 서임을 받은 기사가?
브람의 공격을 피하며 옆으로 뛰듯 움직인 말 위의 기사는 자신의 기병용 검을 연달아 내리쳤다.
이렇다 할 보호구를 걸치지 않았던 브람은 대검을 받쳐서 공격을 막으며 오히려 기사에게 접근했다.
그러자 기사가 아니라 말이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다.
창처럼 길게 내밀어지는 거대한 검이 발하는 기세는 말조차 겁을 먹고 움츠리게 만들었다.
경비대의 기사는 수준이 떨어진다는 소리가 있던데 말까지 그렇다니. 역시 잘 훈련된 군마는 군대가 아니면 보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성인 주먹 2개와 맞먹을 정도로 큰 망치머리를 가진 전투망치를 가지고 사병들의 뼈를 부숴대던 크리스토퍼가 미끄러지듯 기사의 뒤쪽에게 접근했다.
그의 망치는 말의 뒷다리를 강타했다.
원래 타고나기를 약하게 타고나서 사소한 일로도 부러지는 것이 말의 다리뼈다. 그러니 거대한 망치의 일격은 말의 다리뼈를 부수기에 충분했다.
말은 구슬픈 울음을 토해내며 주저앉았다.
갑작스러운 말의 부상에 말 위의 기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낙마를 하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였다.
그러나 공격에 대한 기사의 반응이 느려지기에는 충분했다. 기사는 자신의 어깨를 강타하는 브람의 거대한 검에 낮은 비명을 토하며 뒤로 넘어갔다.
원래라면 경비대의 병사들이 기사의 주변에서 엄호해야 한다.
그게 기본이다. 기사는 무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사 혼자 보병들 사이로 뛰어들 경우, 그리고 만약 그 보병들이 기사와 싸우는 것에 능숙한 숙련병이라면 기사는 순식간에 말에서 끌어내려져서 단검에 찔려 죽거나 맞아 죽는다.
탱크 같은 방어력 끝판왕조차 보병의 엄호 없이 혼자서 도시로 기어들어가면 박살이 나는데 기사가 홀로 튀어나왔다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그런데 칼마르의 경비병들은 기사가 혼자 튀어나갔다가 낙마하는 것을 구경만 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이대로 기사가 죽기라도 한다면 책임추궁을 피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경비병들은 인기척에 놀란 토끼가 번개 같은 속력으로 도망가는 것보다 더 빠르게 낙마한 기사를 향해 몰려왔다.
덕분에 브람은 기사를 향한 마지막 일격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그제서야 다른 방면을 막고 있던 기사 2명이 천천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포위망의 일각을 허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그렇게 날아갔다.
*
나는 경비병들의 뒤편에서 그 모든 장면을 한눈에 담고 있었다.
처음에는 경비병들의 뒤통수만 보다가 건물에서 튀어나와서 탈출해 보겠다고 칼을 휘둘러대는 자들을 보니 다 알만한 사람들이었다.
자기 키와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도를 휘두르는 자는 소금장수 브람.
몇 번 보지는 못했지만 내 검문소에서 통행세를 징수할 때마다 유난히 까탈을 부리던 자라서 기억이 어긋날 리는 없다.
소금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뒷배가 든든하다는 뜻이지만 그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면서 간혹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정상적인 소금뿐 아니라 밀염까지 나르는 것이 분명한 자라서 찔리는 구석이 많을 텐데도 절대로 수그리지 않았다.
만약 내게 원거리 상행에 나서는 소금장수라는 것 자체가 준군사조직이나 다름없다는 상식이 박혀 있지 않았다면 적당히 져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나도 막나가는 성향이 없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보니 건물에 의지해서 버티고 있는 자들 중에 여럿이 눈에 익었다. 다 브람과 함께 다니던 자들이었다.
거칠고 자리들끼리만 의리있는 밀염상 무리들.
내가 신세를 진 일은 없으니 마음에 꺼려지는 부분도 없다.
나는 밀염상 브람의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옆에 망치 들고 있는 자. 저 자도 눈에 익은데?
저거 크리스토퍼 아닌가?
칼마르 시에서 검문소를 차린 어중이떠중이들을 쓸어버릴 때 여럿 담궜다고 들었는데 원래는 칼마르 쪽이 아닌 모양이지?
막시밀리안 대공일까?
아니면 글렌 공작?
칼마르 시에 대항했던 연합의 일원이었지만 일선에서 칼 들고 날뛰었지 내부의 정치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상대방인 칼마르와 그의 동맹 세력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그냥 돈 나오는 호구취급이나 했지.
내가 반쯤 맛이 가버렸던 시기라 나답지 않게 굴긴 했지. 영업의 기본은 정보인데 말이지.
지나고 보니 정보의 부족이 아쉬울 뿐이었다.
기억하기로는 그 당시 황제가 되고 싶었던 선제후들은 사실상 내전에 돌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곳곳에서 대리전이 벌어졌고 약탈이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칼마르는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했었다.
달라벤 강의 이권을 잠식하던 연합의 역할은 칼마르의 중립을 깨기 위한 협박 같은 것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칼마르는 이런 사태를 좌시할 수 없었다.
강에서 산까지 이어지는 긴 전투가 있었고 결국 칼마르가 이겼다.
나는 졌고.
그런데 그 당시에 내 목을 따겠다고 며칠씩 숲 속에서 술래잡기 하던 놈이 저기 있네 그려.
칼마르의 적으로 말이지.
이렇게 반가울데가.
나는 도로를 틀어 막고 눈을 부라리는 경비대를 향해 접근했다.
"멈춰라. 접근하면 죽인다."
경비대의 경고는 살벌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중이었으니 당연할지도 몰랐다.
나는 고개를 들고 찬찬히 그들을 둘러보았다.
"윌리엄 경.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과연,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나왔다.
포위망의 일각을 담당하던 기사였다.
"항구에 살 것이 있어서 왔는데 이 난리군요. 윌리암 버로스입니다."
"휴고 린드버그입니다. 리암 경에게서 윌리엄 경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뛰어난 실력에 겸손한 성품을 가진 명예를 아는 분이라는 하시더군요."
아아, 이것은 평판이라는 것이다.
처음 본 사람인데도 내 실력을 알아주지.
"리암 경이 저를 너무 좋게 말씀해 주셨군요. 칼마르의 기사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랬을 뿐입니다."
휴고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잡아들여야 하는 자들의 저항이 너무 심하고 실력도 뛰어나서 걱정이 되던 차에 기사급의 쓸만한 인재 하나가 한 손을 거들겠다고 하니 반가웠을리라.
칼마르에 머물고 있고, 칼마르의 사람들과 적당한 인맥도 맺고 있는 사람이니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휴고 경! 적들이 상단 건물에 불을 질렀습니다."
"태워서 숨길 것이 많은 모양인가 보다. 건물에 불까지 질렀으니 조금 있으면 다 튀어 나올 거다. 놓치는 놈들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라!"
상단 건물의 창으로 연기가 좀 새어 나오더니 조금 후에는 불길이 확 치솟았다.
휴고의 말대로 무엇인가 안에서 대량으로 태운 것이 분명했다.
저들은 이제 곧 탈출을 위해 날뛰기 시작할 것이다.
브람과 크리스토퍼가 그들 앞에 설 것이고.
*
밖으로 뛰쳐나와서 사병들을 쓸어버리고 기사까지 하나 반죽음으로 만들어버렸던 브람과 크리스토퍼는 경비병들의 견제에 건물까지 물러난 후였다.
그리고 그들 뒤로 건물에 남아 있던 자들이 모두 몰려 나왔다.
"형제들은?"
"항구에서 신호가 올라온 것을 봤습니다."
"그럼 곧 오겠군."
브람은 항구쪽으로 향한 길목을 살펴보았다.
조금 전에 기사 하나를 쓰러뜨린 방향이다.
지금은 다른 기사가 와서 경비대와 함께 있었다.
흩어졌던 상인들의 사병도 싸울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이었다. 겁을 먹은 티가 좀 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항구 쪽 길을 두드릴만 했다.
겁을 먹은 자들이 제대로 싸울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혼란은 전염이 빠르고 겁을 먹은 자들은 종종 이성을 잃고 도망치기도 한다. 이미 저들은 한번 공포에 잠식되어 도망간 적도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다른 길목의 경비대 병사들이 몰려오겠지만 조금만 버티면 형제들이 올 것이다.
그럼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
그 동안 들인 돈과 시간에 대한 대가는 글렌 공작에게 달라고 하자.
그러려면 일단 살아나가야 했다.
형제들과 함께.
브람은 자신의 거대한 검을 들었다.
"가자!"
브람의 명령과 함께 살아남은 부하들은 일제히 항구 쪽으로 돌격했다. 가장 앞에는 브람이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정면에는 피맛을 보다가 만 경비병들이 기세를 올리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명백하게 겁을 집어먹은 자도 보이고 전의를 활활 불태우는 자도 보였다. 중구난방이었다.
지금까지 제법 격렬하게 맞붙기는 했지만 경비병들은 아직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어쩌면 바로 눈 앞에서 상인들이 동원한 사병들이 박살 나는 것을 본 것이 가장 큰 타격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다를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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